#20
한국대 먹자골목은 낮과 밤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저녁 6시 정도가 되면 잠자고 있던 고깃집과 술집, 포차들이 간판에 불을 밝히고 문을 열었다.
스피커가 터져나가도록 시끄럽게 음악을 틀어대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대학생들이 나타나 가게의 빈자리를 채웠다.
화요일이면 어떻고, 어제 마셨으면 또 어떠한가.
한창 술 마시기 좋아하는 대학생들에게 요일을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다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먹고 마셨다.
그냥 웃고 떠들고 마시는 것 자체가 즐거웠으니까!
술과 음식을 파는 곳이라면 어느 가게 할 것 없이 왁자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너무 고마워서 그렇지. 티켓 구해 준 것만으로도 절 받을 일인데 돈도 안 받았잖아. 그러니까 저녁은 우리가 사게 해 줘!”
“그렇지! 은혜를 갚는 건 한국인의 미덕이지!”
차마 안 먹겠다고 할 수도 없었고 내가 살 테니 좋은 곳으로 가자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어영부영하는 사이 대학가 먹자골목까지 끌려온 것이다.
선택된 곳은 오래된 닭갈빗집이었다.
낡은 가게는 환기도 잘 안 되는 듯 뿌연 연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맛집이긴 한 건지, 테이블의 빈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손님이 차 있었다.
“선경아, 오늘 술 마셔도 괜찮지?”
“차도 안 가져왔잖아, 이럴 때 마셔야지. 어때, 콜?”
우선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윤봄은 불투명한 파란색 컵에 물을 따르고 수저 젓가락을 돌렸다. 잔뜩 허기진 탓에 행동이 빠릿빠릿했다.
“아 배고파, 빨리 시키자! 이모, 여기 뼈 없는 닭갈비 4인분에 치즈랑 쫄면 사리 추가요!”
메뉴는 윤봄이 알아서 시켰다. 여러 번 와 본 단골집인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척척 주문을 넣는다.
안석현은 사람 수에 맞춰 가장 깨끗한 앞치마를 공수해 왔고, 홍재영은 말도 없이 냉장고를 열어 소주와 맥주병을 꺼내왔다. 우선경은 이들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다들 되게 익숙하다.”
“응! 우리 여기 자주 와, 이래 보여도 한국대 맛집이거든. 개강총회도 여기서 했었고 웬만한 뒤풀이도 다 여기서 해.”
일주일에 한 번은 오는 것 같다며 안석현은 히힛,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가 선경에게 가장 깨끗한 앞치마를 건넸다. 짙은 남색에 빨간 테두리가 들어간 앞치마에는 눈이 예쁜 하늘색 두꺼비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기괴한 것을 손에 들고만 있자 안석현이 ‘이렇게 입는 거야’ 하며 직접 목에 걸어 주고 허리끈도 바짝 묶었다.
처음 입어 보는 홍보용 앞치마가 영 어색한지 선경은 뻣뻣하게 허리를 세웠다. 다들 역시 도련님은 앞치마도 잘 어울리신다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웃어대기 바빴다.
어느새 좁은 테이블엔 반찬이 깔렸다. 까만 철판에는 빨간 양념으로 버무려진 닭갈비가 수북이 올라왔다.
지글지글 볶아지는 소리와 시각적 자극에 제법 허기가 졌다. 고기 익는 냄새에 선경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기다릴 동안 한 잔씩 할까?”
홍재영이 능숙하게 초록색 병을 흔들었다.
병 안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꽈드득, 병뚜껑을 돌리더니 브이 자를 그린 손가락 두 개로 병목을 가격한다. 화려한 퍼포먼스에 기포도 없는 소주가 샴페인처럼 튀어 올랐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 빈 잔을 들어 재영에게 내밀었다. 오늘의 소믈리에는 팔등에 손을 붙이고 경건한 자세로 소주병을 기울였다. 꼴꼴꼴, 투명한 술이 잔을 아슬아슬하게 채웠다.
“두꺼비가, 여기에도 그려져 있네?”
우선경은 눈앞에 보이는 초록 병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곳에는 앞치마와 동일한 두꺼비가 똘망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소주를 따라 주던 재영이 미심쩍다는 듯이 쳐다봤다.
“너 설마 술 처음 마시는 건 아니지?”
어린애 취급 하는 듯한 질문에 살짝 기분이 상했는지 선경은 눈을 흘겨 떴다.
“마셔 봤어.”
1월 1일, 열두 시 정각에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며 권무열과 호기롭게 양주를 마셨다.
물론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음주 경험이 없던 뜨내기들은 뭣도 모르고 스트레이트를 고집하며 감당 못 할 술을 퍼붓다가 한 시간도 안 돼서 뻗어버렸다.
주량이 세지 않은 건 확실했다. 특히 도수가 센 건 취향이 아니다. 그 이후로는 적당히 와인 한두 잔 정도만 즐겼다.
“자자, 다들 잔 들고.”
“오늘 덕분에 재밌었다.”
“선경아, 잔 들어! 짠 하자, 짠!”
너도나도 소주잔을 치켜들길래 선경도 무리에 끼어 같이 잔을 들어 올렸다.
쨍, 가볍게 술잔을 부딪치고 다들 시원하게 들이킨다. 술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안석현조차 꺾지도 않고 한 잔을 단번에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경도 조심스럽게 반절을 삼켰다. 입에 머금자마자 흡, 소리가 절로 터졌다.
“맛이 이상해.”
“으잉?”
“알코올 맛밖에 안 나.”
이런 걸 대체 왜 마시는 거야? 눈썹과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곧바로 찬물을 들이켰다. 여러 번 헹구듯 물을 마셔 봤지만 소주의 여운은 질기도록 남아 있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가야. 소주는 맛으로 먹는 게 아니야. 취하려고 먹는 거지.”
그 참맛을 모르는 게 참으로 애석하구나, 지켜보던 재영은 쯧쯧 혀를 차더니 의자를 뒤로 끌며 일어섰다.
술로 가득 찬 냉장고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 안에서 다른 라벨의 소주병을 꺼냈다. 같은 소주였지만 노란 유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홍재영은 빈 잔에 새 소주를 채웠다. 투명한 것이 보기에는 전혀 다른 게 없었다. 의심이 가득한 우선경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마셔 봐.”
“…….”
“에헤이,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일단 한번 마셔 보라니까?”
재영이 소주잔을 쥐여 주고 재차 닦달했다.
결국 못 이기는 척 입술을 살짝 적셨다. 아까와 달리 달짝지근한 맛이 혀끝에 닿았다.
“…….”
차갑고 달다. 소주 특유의 향이 끝에서 살짝 느껴지긴 했지만 유자의 상큼한 맛이 알코올 향을 제대로 눌러 주고 있었다. 게다가 달달해서 제법 맛있다. 솔직히 말하면 여태 먹어 본 술 중에 제일 입에 맞았다.
입맛을 찹찹 다시는 우선경을 보며 홍재영은 본인의 선택이 뿌듯한 듯 가슴을 쭉 폈다.
“어때? 괜찮지?”
“…어.”
어느새 남은 술까지 홀짝 마시곤 슬쩍 빈 잔을 내밀었다.
홍재영은 영업에 성공했다며 히죽 웃었다. 다시 한 잔 가득 채워 주자 이번에도 혼자 냉큼 마셔버린다.
“야야, 조심해라. 이래 봬도 14도야. 그렇게 마시다가 훅 간다고. 같이 짠도 해가면서 마시란 말이야.”
“맞아, 빈속에 마시면 금방 취해. 떡이랑 쫄면은 다 익었다. 야채도 건져 먹어.”
윤봄이 먼저 익은 사리들을 앞접시에 덜어 건넸다. 빨간 양념이 묻은 쫄면과 숨이 죽은 양배추에선 매콤한 냄새가 났다.
선경은 젓가락으로 떡을 잡았다. 말랑하게 잘 익은 밀떡을 앞니로 조금 씹었다. 양념이 살짝 자극적이긴 했지만 보기보다 맛있었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철판을 가운데 두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오늘 전시회의 소감을 나눴다.
기대했던 특별전도 좋았지만 라움 큐레이터들과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오늘을 정말 잊지 못할 거야, 윤봄은 감동에 젖은 눈으로 회상에 빠졌다.
“진짜 멋있었어. 그치?”
“학예사 진짜 매력 쩔어. 김주원 큐레이터님은 진짜 아우라가 남다르더라. 나 사실 문화재청이나 국박(*국립중앙박물관)으로 취업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맘이 흔들렸어. 나중에 지원해 보려고.”
“유학 스펙 안 보는 것도 의외지 않았냐? 아, 그건 라움 한정인가? 다른 곳은 아니지?”
“원래는 필수지.”
짠, 다시 한번 술잔이 맞부딪혔다. 선경도 빠지지 않고 잔을 내밀었다.
유자 소주는 어느새 우선경의 전용이 됐다.
모두가 소주와 소맥을 달릴 때 아무도 찾지 않는 과일 소주를 제 옆에 챙겨놓고, 혼자 따라 마셨다.
선경이 빈 술잔을 채우자 옆에 앉아 있던 안석현이 남의 소주잔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건 또 뭐야, 의도를 몰라 빤히 쳐다보자 자작하면 애인 안 생긴다며 히죽 웃는다.
“그런데 우선경 너는 왜 청강생으로 다니는 거야?”
잘 익은 닭갈비를 입에 한 점 집어넣던 윤봄이 물었다. 술도 들어갔겠다, 궁금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질문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음, 뭐라 말하면 좋을까. 선경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나름 고민했다. 요즘 뭐라더라. 제 귀에도 들려오던 소문 하나를 떠올렸다.
“돈은 많은데 한국대 들어올 머리는 안 돼서.”
“아, 그렇구만!”
대충 둘러댄 변명에도 윤봄은 별 의심 없이 수긍했다.
내가 그렇게 머리가 나빠 보이나? 선경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평소보다 웃음이 헤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청강생은 졸업장이 안 나오잖아, 나중에 취업은 어떻게 하려고?”
“괜찮아. 집에 돈 많아. 사업하면 돼.”
“와씨, 개부럽다.”
윤봄이 의자 뒤로 목을 젖혔다. 아냐, 부러우면 지는 거야! 나는 지지 않아! 천장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 선경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참 신기하지? 학교에 잘사는 척 오지는 애들 쌔고 쌨는데, 쟤는… 찐인 거 같아.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걸까.”
다시 허리를 곧게 세운 윤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우선경의 재력을 가늠해 봤다. 그럭저럭 잘 사는 놈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때 홍재영이 흥미로운 가설을 제기했다.
“라움 갤러리 혹시 쟤네 할아버지 거 아냐?”
“오?! 그럴듯한데? 검색해 보자!”
윤봄은 옳다구나, 손뼉 쳤고 홍재영은 테이블에 엎어놓았던 핸드폰을 들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라움 갤러리를 검색해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