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기대와 달리 그들을 맞이한 건, 사자 머리를 크게 부풀린 송 대표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대표가 송옥희 씨라는데? 어이구야, 인상이 많이 세시다. 무서워….”
“잠깐만 라움, 무슨 재단에서 운영하지 않아? 그 어디 거였지? 한영이였나? 서화였나?”
“이야! 빡보옴, 거기까지 가? 기다려 봐, 그런 건 위키에 검색하면 다 나와.”
농담이었지만 약간의 진심도 담겨 있었다. 의혹을 끝까지 파헤치겠다는 불굴의 의지는 꺾이질 않았다.
세상의 온갖 데이터베이스를 모아놨다는 인터넷 사전에 라움 갤러리를 입력하자 상세한 티엠아이 정보들이 펼쳐졌다. 홍재영은 차분히 첫 줄 개요부터 읽어나갔다.
“라움 갤러리, 1991년에 오픈. 서화 그룹 소유의 사립 갤러리다. 한남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9,850㎡ 평형, 총 4개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서화 그룹의 총수이자 소문난 미술 애호가인 우경환 명예회장이, 어… 우씨네?”
“…….”
벙찐 눈동자들이 한곳으로 모였다. 우선경은 딱히 호응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꼴깍, 털어 넣은 소주가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비밀은 짧았고 술은 여전히 달았다.
상상 그 이상의 정체에 녀석들은 말문이 막힌 듯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치 리액션 기능이 고장 난 것처럼 눈만 껌뻑거렸다.
치익-. 방치된 철판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탄내가 났다. 우선경은 서둘러 나무 주걱을 잡고 닭갈비를 뒤적거렸다. 주걱을 쥔 손 모양도, 철판을 긁어대는 모양새도 다 서투르기 짝이 없다. 누가 봐도 처음 해 보는 티가 났다.
“그렇게 놀랄 일이야?”
심드렁한 물음에 여태 넋을 놓고 있던 홍재영이 겸연쩍은 듯 인중을 긁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 그래도 정도껏이어야 말이지.”
“와하하하핫! 와나, 윤봄 이 똥멍청이가. 우선경 님… 소인이 존귀한 분을 몰라뵙고 감히 이런 누추한 곳으로 모셨습니다. 아니 메뉴도 하필 이런 닭갈비 따위를 골라 가지고….”
“선경아,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나둘 제정신을 차리며 머쓱해진 분위기를 수습했다. 적당히 가벼운 농담도 오고 갔다. 다행히 누구 하나 크게 신경 쓰진 않는 듯했다.
윤봄은 우선경이 쥐고 있던 주걱을 다시 슬쩍 가져갔다. 눌어붙은 재료들을 긁어내며 넌지시 물었다.
“그… 일부러 비밀로 했던 거지? 우리가 괜한 짓을 했네.”
“괜찮아. 별로 상관없어. 막말로 한국대 다니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 알아보는 사람 한 명 없을까. 학교나 동네가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건너 건너 아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어차피 오래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
“그래도 여태 티 안 낸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정곡을 찌르는 말에 선경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윤봄이 눈치껏 말을 보탰다.
“말하기 힘들면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어.”
“그건 아니고… 그냥 조용히 다니고 싶었을 뿐이야.”
“하긴 이해는 가. 지금만 해도 오만가지 소리를 다 듣는데 재벌인 거까지 알려져 봐라. 사람들이 그거 가만히 냅두겠냐? 아마 물고 씹고 뜯고 별의별 말이 다 나올걸? 으으, 난 생각만 해도 숨 막힌다.”
윤봄은 상상하다 치를 떨었다. 홍재영 역시 동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말없이 소주병을 기울였다. 어느새 다시 잔에 술이 가득해졌다.
그의 주도하에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잔을 치켜들었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씩 던졌다.
“뭐가 됐든 나는 특별대접 안 해 줄 거니까 그렇게 알고.”
“덕분에 전시회 잘 봤다!”
“나는 우리 조별 과제 끝나고 난 뒤에도 계속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오늘 재밌었어. 닭갈비도 좋은 선택이었고.”
짠, 손에 쥔 유리잔이 허공에서 맑은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술자리는 길게 이어졌다. 철판은 열기가 식은 지 오래다.
안석현과 윤봄은 눌어붙은 볶음밥을 마지막까지 야무지게 긁어 먹었고, 홍재영과 우선경은 라벨이 다른 소주병을 들고 서로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들의 옆엔 치우지 못한 빈 술병들이 줄 세워졌다. 마치 우리 이만큼이나 마셨어요! 자랑하듯 늘여놓은 전리품 같았다.
“프흣.”
우선경이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소주병을 보다가 느닷없이 웃는 게 영락없는 술주정이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석현이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선경아, 너 혹시 취했어?”
“몰라, 조금?”
안석현이 선경의 목덜미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기울였다. 콧구멍을 잔뜩 확장하고 숨을 깊이 들이켰다.
아까부터 상큼한 냄새가 솔솔 풍기는데, 이게 우선경의 몸에서 나는 건지 그가 마신 유자 소주의 향인지 분간이 잘 안 됐다.
냄새를 맡느라 킁킁대는 게 간지러운지 우선경은 살짝 몸을 비틀었다. 그대로 턱을 괸 채 안석현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나 냄새나?”
다소 늘어지는 말투와 눈웃음까지 살살 치는 모습은 평소 우선경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갔네, 가셨어.”
숟가락을 입에 물고 있던 윤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석현, 쟤 소주잔 뺏어. 더 먹으면 큰일 나겠다.”
“그래, 선경아. 그만 마셔. 아무래도 너 지금 취해서….”
페로몬 통제가 안 되는 거 같아, 목소리를 낮춘 안석현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기 딴에는 비밀스럽게 얘기하느라 그런 거였는데 들썩이는 입김이 선경의 귀를 간지럽혔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웃음을 터트리자 차마 제어하지 못한 페로몬이 팍,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닭갈빗집에 있던 알파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 얘가 왜 이래! 안 돼! 정신 차려!”
기겁한 석현이 우선경을 와락 끌어안고 제 몸 밑에 숨겼다. 알파들의 시선이 단숨에 집중되는데 제가 겁이 덜컥 날 정도였다.
게다가 페로몬은 어찌나 진한지, 한번 터지기 시작하자 가게 안에 자욱한 닭갈비 냄새를 뚫고 단번에 내부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몇몇 알파는 대놓고 일어나 구경하기 시작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베타인 윤봄과 홍재영은 안석현이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거기 내 가방 좀 줘.”
윤봄이 구석에 모아둔 짐더미에서 까만 백팩을 찾아 건넸다.
안석현은 가방 앞주머니를 뒤져 손바닥만 한 스프레이를 꺼냈다.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는 페로몬 소취제였다.
무색무취의 소취제를 우선경의 몸에 듬뿍 뿌렸다.
“차가워.”
안개 같은 미스트가 분사되자 선경은 칭얼대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안석현은 응석을 봐주지 않는다.
아끼는 화초에 물을 주듯 선경의 몸을 앞뒤로 돌려가며 꼼꼼히도 뿌렸다. 다행히도 이번엔 얌전히 있어 준다. 일시적이지만 향기가 잠시 잦아들었다.
난리를 친 덕분인지 우선경은 조금 제정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래도 술이 좀 취한 것 같다고 스스로 물을 찾아 마셨다. 안석현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가방 속에서 지갑을 꺼냈다.
“나가서 술 깨는 약 좀 사 올게. 뭐 더 필요한 거 있어?”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
우선경의 말에 듣고 있던 윤봄과 홍재영이 너도나도 따라 손을 들었다.
“나는 망설임!”
“그럼 난 쭈쭈바!”
먹깨비들의 주문에 안석현은 눈을 흘기면서도 같이 사 오겠다며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우선경은 푸우, 길게 숨을 고르며 정신을 챙겼다. 살짝 풀어놨던 페로몬도 다시 제대로 거뒀다.
이제 정말 그만 마셔야겠다.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났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괜찮겠어? 같이 가 줄까?”
“멀쩡해, 술 깼어.”
눈웃음도, 애교 섞인 말투도 없었다. 하지만 또박또박한 발음과 달리 우선경은 두꺼비가 그려진 앞치마를 떡하니 매고 가게 밖을 나갔다.
그게 하필 너무 자연스러워서 윤봄과 홍재영은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화장실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건물을 빙 돌아서 들어가는 입구를 겨우 찾았다.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지 문을 열자마자 코가 얼얼해지는 지린내와 시꺼멓게 곰팡이 낀 타일이 반겼다. 여러 가게들이 함께 쓰는 공용 화장실은 빈말로라도 상태가 온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선경은 차마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다른 곳을 찾아보자. 밖으로 나와 그나마 멀끔해 보이는 건물을 찾았다. 이번에도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없어 방향치마냥 상가 주변을 빙빙 돌았다.
어렵게 어렵게 볼일을 해결한 뒤 나왔을 땐 매고 있던 앞치마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중간에 거슬려서 벗었던 것 같은데 어디다 버린 건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홍재영의 말대로 과일 소주는 위험한 술이 맞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마치 중간 과정이 삭제된 것처럼 취기가 순식간에 머리꼭지까지 차올랐다.
마음은 똑바로 걷고 싶었지만 몸은 제대로 따라 주질 않았다. 취객의 모습이 으레 그렇듯 우선경도 갈지자(之)로 걸으며 휘청댔다.
아까 거기가 어디였지? 주변은 온통 엇비슷해 보이는 가게들뿐이다. 이 와중에 상호도, 위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손을 더듬거리며 주머니를 뒤져보는데, 지갑도 핸드폰도 없었다.
텅!
우선경은 제가 있던 곳과 비슷해 보이는 가게 창문에 들러붙었다.
먼지가 얼룩덜룩한 유리창에 이마를 붙이고 눈에 힘을 바짝 준 채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침 창가에 앉아있던 긴 머리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포실포실한 계란찜을 막 입에 넣으려던 여성은 황당한 듯 입을 벌린 채 선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저래. 미친놈 아녀?’
‘취한 놈이여.’
‘잘생겼으니까 냅두자.’
친구들과 뭐라 떠드는데, 취한 상태론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었다.
여기가 아닌가 봐….
우선경은 눈을 한번 끔뻑였다. 일순간 시야가 빙글 돌았다. 유리창에 이마를 붙인 채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어엇! 옆에서 담뱃불을 붙이려던 행인이 놀라 우선경을 붙잡아 일으켰다. 한눈에 봐도 술에 절어 있는 상태인 것 같아 자신이 앉으려던 플라스틱 의자를 양보해 주기까지 했다.
“감사… 함다.”
이 와중에도 꼬박꼬박 인사는 챙겼다.
앉은 채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이마는 한도 끝도 없이 내려가 의자 끄트머리에 처박힌다.
폴더처럼 납작하게 접힌 상체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을 놓고 잠든 우선경에게서 좋은 향기가 솔솔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