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22화 (22/127)

#22

-너 어디야. 지금 교수님이랑 대표님 도착하셨어!

“거의 다 왔어. CS 편의점 앞이야.”

동기는 오 분에 한 번씩 전화하며 아직도 오지 않은 한지석을 닦달했다.

잔소리처럼 반복되는 재촉이 슬슬 지겨워지려던 참이다. 한지석은 형식적으로 대꾸하며 귀찮은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법 길어진 앞머리가 손가락 틈새로 얽혔다.

오늘 머리 자르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회식이 잡힌 탓에 예약해 둔 헤어샵도 취소해야 했다.

오후 내내 이어졌던 민사소송법 강의가 끝나갈 때쯤, 교수님은 학교 앞에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제의하셨다.

평소 같았으면 다들 내키지 않아 했겠지만, 오늘만큼은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환영했다.

그 배경에는 태광 법무법인의 대표 변호사가 끼어 었었다.

그녀는 교수와의 친분을 핑계 삼아 강의 시간 말미에 슬쩍 나타났다. 학생들과 만난 건 우연이라고 했지만, 방문 목적은 뻔했다.

곧 시작될 실무 수습을 위한 인재 포섭을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대형 로펌에서는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괜찮은 재목들을 눈여겨봐 두고 미리 채용 확정을 해 두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지만, 일단은 눈에 띄는 인물들을 파악해 미리 선점해 두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국내 탑 티어 법무법인의 파트너 변호사. 최문영.

로펌 취업을 목표로 하는 로스쿨생들에겐 놓쳐서는 안 되는 만남이었고, 그렇지 않더라 해도 이참에 거물급 변호사와 안면을 터두는 것도 나쁠 건 없었다.

사실 이때 아니면 어딜 가서 만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인지 동기들은 평소보다 더 법석을 떨어댔다.

먼저 나서서 주변의 갈 만한 식당을 섭외해 두는가 하면 손님을 보좌하겠다며 벌써부터 최문영 곁에서 입안의 혀처럼 구는 녀석들도 있었다.

로펌 쪽으론 전혀 관심이 없던 한지석은 뭘 그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각자 원하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본인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겐 절실한 기회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CS 편의점 앞인 거 맞어?

“왜 이렇게 재촉해? 그냥 나 빼고 먼저 시작하라니까.”

-교수님이 자꾸 찾으시니까 그러지. 너 오기만을 벼르고 계신다고.

“누가 들으면 돈독한 사제지간인 줄 알겠네.”

민사소송법을 가르치는 박 교수는 상당히 세속적인 편이다. 로펌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경험 탓인지 셈에 밝았다.

그는 작년 말부터 꾸준히 한지석에게 관심을 보여왔는데, 그의 아버지가 대법원장에 임명되면서부터 그 관심은 절정에 달했다. 틈만 나면 친한 척을 해댔고, 어떻게든 아버지와 연결고리를 만들어 보려고 애썼다.

-야야, 조심해라. 옆에 계신다.

귀 밝으신 거 알잖아. 핸드폰 너머로 지레 겁먹은 동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의 말은 거의 묵음 수준이라 잘 들리지도 않았다. 혹시나 통화 내용이 새어나갈까 잔뜩 움츠러들었을 모습이 눈에 뻔했다.

“쫄지 마, 최정훈. 박 교수가 그런 거 신경이나 쓸 거 같아?”

-시끄럽고, 빨리 오기나 하라고.

“안 그래도 간판 보이는…, 잠깐만 끊어 봐.”

-뭐? 야, 너 안 오면….

한지석은 동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회식 장소인 횟집을 불과 100미터 앞에 둔 상태였다. 지나가던 것을 멈추고 그는 두 발자국 뒤로 걸었다.

‘돈대감 무한리필 삼겹살 9,900원’

웃는 돼지가 그려진 간판 아래 도통 어울리지 않는 취객이 한 명 앉아있었다.

완전 꽐라가 돼버린 취객은 의자에서 거의 굴러떨어지기 직전이다.

잔뜩 수그린 머리가 앞으로 쏠렸고 머리가 까딱거릴 때마다 의자 뒷다리는 들썩거렸다. 보는 사람마저 불안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

저대로 놔두면 100% 의자와 함께 앞구르기를 할 터였지만 한지석은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다. 심드렁하게 팔짱을 끼고 원래 서 있던 거리를 유지한 채 취객의 상태를 지켜봤다.

“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저 까다롭고 예민하신 ‘조카’분이 왜 무한리필 삼겹살집 앞에 앉아 있는지, 게다가 왜 만취 상태로 혼자 나와 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한 번 본 사람을 대번에 파악할 수는 없지만, 저 오메가는 틀림없이 곱게 자란 타입일 것이다.

지난번 화장실에서 겪었던 우선경의 반응이 생각났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수모를 겪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당황했고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도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도움을 주려는 사람을 변태 취급한 데다, 남의 셔츠도 쓰레기처럼 버린 걸 보면 성격이 만만치 않은 건 분명했다.

이후 교수님에게 옷값을 대신 전달받긴 했다. 같은 옷을 몇 벌이나 사도 될 정도로 넉넉한 액수였다. 그 외에 별다른 인사는 없었다.

그날 그렇게 헤어진 뒤로 더 이상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확실히 세상이 좁긴 좁은가 보다. 이렇게 또 발견한 걸 보면.

하긴 스무 살이면 친구들과 술 먹다 개가 되는 일이 허다하지. 저 예민하신 성격에 술 깨면 꽤나 자괴감 좀 드시겠네.

뭐 알아서 하겠지.

한지석은 관심을 끊고 등을 돌렸다. 더 이상 간섭하지 않고 제 갈 길이나 가려 했다.

“…….”

발바닥이 땅바닥에 들러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웅크린 취객에게서 말도 안 되게 좋은 냄새가 났다.

겁대가리 상실한 우선경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페로몬을 흘려대고 있었다.

간혹 지하철역을 지나다 보면 음식을 파는 가판대를 만날 수 있다. 그중 커스터드 빵을 파는 가게는 늘 인기가 좋았다.

역사에 지하철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새로운 빵을 구울 때면 사람들은 홀린 듯이 모여들었다.

갓 구워내는 빵에서 나는 냄새는 말도 안 되게 사람을 현혹했다. 바쁘게 지나가던 사람들까지도 그 앞에선 속도를 늦춰가며 냄새를 음미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 여기 꼴이 딱 그랬다.

주변을 돌아보니 같은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들은 죄다 알파 놈들이었다.

물론 크게 내색은 하지 않는다. 무심하게 전화 통화를 하며, 담배를 피우며, 친구들과 가볍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눈길은 한곳으로 모였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오메가에게서 나는 냄새를 조용히 핥으며 그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서로 교묘하게 눈치를 보는 것이 흡사 굶주린 이리 떼들 같았다.

“대체 어쩌려고 이러지?”

탄식이 섞인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이 미숙한 오메가는 제가 가진 향기가 어떤 식으로 알파들을 자극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그렇지, 이렇게 무방비하게 페로몬을 흘려댈 수가 있나?

세상 예민한 척은 다 하더니 제 한 몸 추스르지 못하고 방만하게 늘어져 있는 꼴은 지켜보고 있기가 개탄스러울 정도였다.

어찌할까 고민하며, 한지석은 팔짱을 낀 채 잠시 그 앞에 서 있었다. 생각에 집중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볼 안쪽 살을 씹곤 했다. 우선경을 앞에 두고 지긋이 관찰하는 모습은 누가 보면 자신 역시 이리떼 중 하나로 여겨질 법했다.

우묵하게 잇자국이 팬 볼 안쪽을 혀로 천천히 쓸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굳이 본인이 나서야 할 이유는 없었다. 도움을 줘도 좋은 소리 못 들을 게 뻔했고.

결정을 내리고 난 뒤엔 더 이상 그 앞에서 미적거리지 않았다. 한지석은 깔끔하게 뒤돌아섰다. 마침 다른 동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어, 미안. 누구를 좀 만나서. 아니야, 나와 있을 필요 없어. 여기서 간판 보여. 남양수산 맞지?”

10시 방향으로 환하게 불을 밝힌 파란 간판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와하핫, 술에 취한 대학생 무리가 왁자지껄 웃으며 통화하는 지석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주변은 온통 밝고 시끄러웠다. 사람도 많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대학가의 분위기는 술 냄새가 진동하는 유흥가 거리와 비슷하게 변해간다. 길바닥에 어지럽게 뿌려진 홍보 전단지가 신발에 자꾸만 밟혔다.

“이봐요.”

결국 되돌아왔다.

본인의 선택이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지 한지석은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리고 있었다. 삐뚜름하게 선 채로 우선경을 불렀다.

“…….”

깊이 잠들었는지 우선경은 움찔거리지도 않는다. 염색 한번 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새까만 머리카락만 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렸다.

그 아래로 드러나는 단정한 목덜미는 무척이나 깨끗하고 희었다. 반쯤 내리깐 지석의 눈이 페로몬의 근원지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일어나 봐요.”

우선경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상체가 흔들릴 정도로 우악스러운 손길은 결코 친절하다고 할 수 없었다.

“으응.”

잠들어 있던 선경이 겨우 눈을 뜨고 반응을 보였다. 미적미적 상체를 일으키더니 얄팍한 간이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댄다.

바로 앞에 서 있는 한지석을 멍하니 쳐다봤다. 초점이 나간 시선이 목과 턱 어딘가를 헛돌았다.

무거운 눈꺼풀이 몇 번 깜빡이더니 결국 다시 눈이 감긴다. 꾸벅꾸벅 머리를 조아리며 또 잠들어 버렸다.

“겁도 없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쯧, 혀를 찬 지석은 깨우기를 포기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데려갈 사람을 대신 불러 주려고 연락처를 훑는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누구를 불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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