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애초부터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지도교수님을 잠깐 떠올렸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권우진을 택했다. 연락처 가장 상단에 있는 이름을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부재중 통화로 넘어가기 직전,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뭐야. 웬일로 전화를 다 주시고.
“어디야.”
-이 몸은 늘 도서관이지.
“여기 지금 학교 앞인데 만취한 신입생 하나 있거든? 네가 와서 좀 데려가라.”
-엉?
권우진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미친놈이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야, 장난 칠 거면 다른 놈한테 해. 나 놀아 줄 시간 없어.
“이 오메가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
-갑자기 전화해서 밑도 끝도 없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야, 공부하느라 바빠서 집에 갈 시간도 없는데 내가 신입생 오메가를 어떻게 알고… 어? 잠깐만, 잠깐만?
내내 말귀를 못 알아듣던 권우진은 그제야 뭔가 깨달았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곧바로 왁! 소리를 질렀다. 한지석은 핸드폰을 귀에서 잠시 떨어트렸다.
-혹시 그거 우선경이야? 우선경이 지금 술 먹고 꼴았다고?!
어찌나 흥분했는지 스피커폰도 아닌데 권우진의 육성은 핸드폰을 뚫고 나오는 듯했다. 제발 아니라고 해 줘. 뒤에 붙은 말이 간절했다.
“이름까진 모르겠고, 그때 그 네가 탄 외제 차.”
-아이고 미친. 맞네. 지금 어디라고? 학교 앞?
“후문 쪽 먹자골목. 여기 이름이… 돈대감?”
-아! 오케이, 어딘지 알아. 그런데 걔 지금 혼자 있어? 일행은?
“길거리에서 그냥 혼자 자고 있던데.”
한지석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알렸다. ‘와, 큰일 났네, 어쩌지.’ 권우진은 정신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일인가 싶었다.
-걔가 그럴 애가 아닌데. 아무튼 지금 바로 갈게, 잘 좀 데리고 있어 줘.
“오 분 내로 튀어와. 안 그러면 버리고 갈 거야.”
-뭐? 안 돼, 절대 안 돼! 걔 손끝 하나 다치면 안 된다, 진짜 큰일 나! 알겠지!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아무튼 빨리…!”
그 순간 까딱까딱 흔들거리던 우선경의 머리가 앞으로 쑥 쏠렸다.
옆에 서서 통화를 하고 있던 한지석은 순간적으로 오른팔을 뻗었다.
다행히 엎어지기 직전에 손으로 얼굴을 받아냈다. 한지석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주 사람 간 떨어지게 하네.”
유독 손이 큰 탓에 그 안에 얼굴이 다 들어왔다. 말랑말랑한 감촉과 손바닥을 누르는 콧대의 단단한 느낌이 동시에 느껴졌다.
숨이 막히는지 우선경은 끙끙거렸다. 고개를 들면 될 것을 손목을 붙잡고 프하프하, 답답한 호흡을 내뱉는다. 손바닥에 입술이 뭉개지고, 잠자리 날갯짓 같은 숨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시끄러워, 빨리 오기나 해.”
마지막 용건까지 전달한 뒤 통화를 종료했다. 한지석은 오른손에 잡힌 우선경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뒤로 넘겼다. 다행히 별 저항 없이 따라온다.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게 한 뒤에야 손을 내렸다. 잠에서 깼는지 우선경은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정신 좀 들어요?”
“…….”
“방금 권우진 불렀어요, 걔가 집에 데려다줄 거예요.”
한지석은 무릎을 굽히고 우선경과 눈높이를 맞췄다. 몽롱하게 풀린 눈이 따라 내려오더니 시선을 맞춘다.
취기가 조금 가신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 같이 온 사람 없어요? 짐은? 핸드폰이나 지갑, 뭐 이런 거. 술은 어디서 마셨어요?”
“후우, 더워.”
취조하듯 묻는 말은 깡그리 무시하며, 우선경은 셔츠에 손을 올렸다.
이미 단추가 두 개나 풀려 있는 넉넉한 옷깃 사이로 손을 넣고 목을 쓸었다. 술을 마셔서 빨갛게 달아오른 살갗은 열이 나는 것처럼 뜨끈뜨끈했다.
정말로 더웠다. 아래로 죽 흘러내린 손가락이 막혀 있던 단추에 걸렸다.
툭, 툭 무심하게 단추를 열자 양손은 단번에 붙잡혀 저지당했다.
한지석은 황당한 낯으로 물었다.
“미치겠네. 술버릇이 원래 이래요?”
“더운데.”
“시끄럽고 얌전히 앉아서 기다려요. 권우진 곧 올 테니까.”
품이 꽤 넉넉했던 오버핏 셔츠는 단추 밑단만 아슬아슬하게 남겨두고 있었다. 새하얀 몸이 벌어진 셔츠 사이로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취한 주제에 옷은 순식간에 벗네, 한지석은 기가 막힌지 실소를 터트리며 우선경의 옷을 대신 여몄다.
그가 단추를 목 아래까지 단정하게 잠그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선경이 물었다.
“아이스크림은?”
“뭐?”
뜬금포 같은 소리에 반말이 튀어 나갔다.
“아이스크림 사 온다고 했잖아.”
“뭔 아이스크림 타령이야. 차라리 그냥 다시 자고 있어요.”
마침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권우진이었다.
뒤치다꺼리에 지친 한지석은 꿇고 앉았던 무릎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 이 주정뱅이를 당장 넘겨버리고 싶었다.
“어디야.”
-가고 있는데, 지금 선경이 집에서 사람이 갈 거야. 네가 알려 준 곳으로 차 보냈대. 네 연락처 알려 줬으니까 모르는 번호로 전화 와도 잘 받으라고.
“몰라, 그딴 거 내가 알 바 아니고 빨리 와서 애나 챙겨 가.”
-얼마나 취했어? 많이 심해?
얼마나 취했냐고?
페로몬이 사방팔방 흘러나오는 것도 모자라, 쌕쌕거리며 내쉬는 숨소리 하며 발그레 달아오른 뺨까지. 딱 알파들 꼬이기 좋은 상태였다.
게다가 하는 짓은 하나같이 눈을 못 떼게 만들어 시한폭탄이 따로 없었다.
옆에서 딱 붙어 감시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사고 칠 것 같은….
뭐야, 어디 갔어.
옆을 돌아봤을 땐 빈 의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잠시 통화를 하는 사이에 우선경이 사라져 버렸다.
황당해하는 지석의 시선에 저 멀리 혼자 휘청휘청 걸어가는 형체가 걸렸다.
-여보세요? 한지석?
“나 지금 바빠. 끊어.”
핸드폰을 움켜쥔 채 냅다 달렸다. 다행히 취한 우선경은 걸음이 빠르지 않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혼자인 줄 알았는데 그새 웬 멸치 같은 알파 새끼가 하나 붙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우선경이 그렇게 찾던 쭈쭈바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알파는 간격을 조금 벌린 채 걸었다. 옆에서 뭐라 속살거리며 술 취한 우선경을 꼬드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뒤를 바짝 붙으니 아이스크림, 편의점, 모텔 같은 단어가 흘러들어왔다.
“진짜 손 많이 가네.”
불쑥 그사이를 파고들어 갔다. 한지석의 등장에 옆으로 밀린 우선경이 크게 휘청거렸다.
옷깃을 붙들자 마른 몸이 땅으로 넘어질 듯 기울었다가 한지석의 손에 잡혀 끌려왔다.
“이거 놔.”
제 의사와 상관없이 몸이 휘둘리는 게 싫었는지 우선경은 허리에 감긴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손이 떨어진 건 선경의 힘이 세서가 아니라 순전히 한지석의 의지 때문이었다.
우선경을 놔준 한지석은 땀이 맺힌 이마를 닦았다. 덥다 못해 열이 뻗쳐 어금니를 꽉 물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우선경을 마주 봤다.
취해서 제대로 분간도 못 하는 게 뭐가 그렇게 분한지 그 역시 뾰족한 눈을 치켜들고 한지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뭔 줄 알고 아무나 막 따라가? 이 사람 알아?”
“아이스크림 파는 곳 알려 준댔어.”
“살 돈은 있고?”
“…….”
제법 야무지게 말대꾸하던 우선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와중에도 지갑이 없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선경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어색하게 눈치를 보고 있는 알파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이 사 준대.”
“아, 그래. 그쪽 입에 아이스크림도 물려 주고 다른 것도 물려 준다고 했었지.”
뒤에서 들었던 말을 똑같이 읊었다. 뜨끔한 알파가 한지석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다.
오히려 우선경의 반응이 덤덤한 걸 보아하니 ‘다른 것’이 뭔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저딴 게 그렇게 먹고 싶어?”
“먹고 싶어. 당신은 왜 아까부터 자꾸 혼내는 거야?”
“그러게.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한지석은 머리를 헝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15시간이 넘도록 종일 공부한 것보다 지금 겪은 몇십 분이 더 피곤했다.
“원하는 거 사 줄 테니까 따라와요. 이상한 거 넙죽 받아먹지 말고.”
***
또 어디로 튈까 봐 이번에는 손목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두 손을 꼭 잡고 가는 모습은 다정해 보이기는커녕 도망간 범죄자를 붙잡고 연행해 가는 형상이었다.
한지석은 근처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편의점을 찾았다. 그가 움직이자 취한 선경이 그 뒤를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우선경은 골반까지 오는 하얀 냉동고에 머리를 처박고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혼자 낑낑대는 모습에 알파들이 말을 붙이려 슬쩍 다가오다가도 뒤에서 감시하며 서 있는 한지석을 보고 눈치껏 발길을 돌렸다.
흉흉한 페로몬이 느껴지자 열심히 냉동고를 파헤치던 선경이 뒤돌아보며 쓴소리를 던졌다.
“그거 하지 마.”
“뭘.”
“페로몬으로 겁주지 말라고. 냄새 맡기 싫어, 완전 별로야.”
그러더니 본인은 다시 냉동고 안으로 머리를 쏙 들이민다.
뭐? 냄새가 별로야?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한지석은 어처구니가 없어 이마를 짚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