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24화 (24/127)

#24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저장된 번호가 아니라서 액정에 뜬 숫자가 길었다.

우선경의 집에서 사람을 보낼 거라던 말이 떠올랐다. 한지석은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뒤지는 뒷모습을 예의 주시하며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우선경 님 모셔 가기로 한 수행 기사입니다. 한지석 씨 맞으시죠?

“네, 우진이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곧 도착할 것 같아 미리 연락드렸습니다. 예상 시간은 7분쯤 뒤입니다.

“한국대 2번 출구 쪽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정확한 위치는 문자로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통화를 끝낸 한지석은 습관적으로 숨을 길게 뱉었다.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동작에서 하루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에가 낀 냉동고 속에 한참 동안 파묻혀 있던 우선경이 마침내 허리를 세우고 일어났다.

그의 손엔 아이스크림 두 개가 들려 있었다.

결정을 내리기 힘든지 양손에 든 것을 한지석의 눈앞에 내밀었다.

한지석은 사과 맛이 나는 빨간 막대 아이스크림과 소다 맛 아이스크림을 무미건조하게 내려다봤다. 못마땅한 것을 본 것마냥 눈살을 가느다랗게 찌푸렸다.

이거 먹는 꼴은 죽어도 못 보지.

재고의 여지도 없이 빨간색 아이스크림은 다시 냉동고 속으로 들어갔다.

추가로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과 갈색 유리병에 담긴 숙취 해소제를 꺼냈다. 아쉬워하는 우선경을 데리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전에 물부터 마셔요.”

한지석은 생수병 뚜껑을 따 우선경에게 건넸다. 손에 쥔 아이스크림을 인질로 삼고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던 중이다.

우선경은 마지못해 생수를 한 모금 억지로 삼켰다. 조금 전 마신 숙취 해소제 때문에 배 속은 이미 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길은 한지석의 왼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보상을 얻기 위해 꾸역꾸역 그의 말을 따랐다.

“원래 술버릇이 그래요?”

포장지를 찢던 한지석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던 우선경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어깨를 으쓱거린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지 피시식 웃는데, 페로몬을 뚫고 술 냄새가 물씬 풍겼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꼴을 보아하니 아직도 취해 있는 게 분명했다.

아이스크림에 환장하는 술버릇은 어찌 보면 귀엽게 봐줄 수도 있지만,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조심성 없이 아무나 덥석 따라가는 것도 그렇고, 손에 쥐여 주기만 한다면 시키는 걸 넙죽넙죽 하는 것도 말이다.

한지석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그런데 내가 누군지는 알아요?”

“…….”

작은 얼굴에 알 듯 말 듯한 표정이 번졌다.

눈치를 보는 건지 숙취 해소제의 효과가 도는 건지 모르겠지만 반말을 지껄이던 어조가 새삼스레 조심스러워졌다.

“모르면… 안 줄 거예요?”

“하!”

한지석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싶었는데 정말로 못 알아볼 줄은 몰랐다.

대체 뭘 믿고 날 따라온 거야? 만약에 따라간 게 질 나쁜 알파였다면 벌써 홀랑 잡아먹히고 남았다. 우선경은 정말로, 좀 많이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몰라본다고 해서 섭섭할 건 없었다.

그래 뭐, 기억 못 할 수도 있지. 지금 제정신도 아닌데.

한지석은 약속대로 포장을 벗긴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먹으면서 얌전히 기다려요.”

원하는 걸 쥐여 주자 우선경은 차분히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옆에 놔두고 한지석은 그동안 받지 못한 연락들을 확인했다.

정말 안 올 거냐는 동기의 문자가 두 개, 아까 통화했던 수행 기사가 답신한 감사 문자가 한 개, 권우진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메시지가 각각 한 건씩 남겨져 있었다.

권우진에겐 전화를 걸어 장소를 옮겼다는 말을 전했다.

다소 노곤하게 들리는 한지석의 목소리에 권우진은 별다른 일은 없느냐고 재차 물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하나하나 설명하기엔 모두 하찮은 것들이었기에 됐다고만 말했다.

통화를 끝낸 뒤 핸드폰을 테이블 상판 위에 던지듯 올려놓고 지석은 잠시 눈을 감았다.

피로가 중첩된 눈두덩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현재 상황을 우선경에게도 공유했다.

“거의 다 왔다고 하는데 아마 차가 여기까지 들어오기는 힘들 거예요. 다시 전화 오면 그때 같이 큰길로 나가서….”

느릿하게 감았던 눈을 떴다. 옆에 앉아 있는 우선경은 아까부터 말없이 아이스크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먹으니까 얌전해지네, 그런 생각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

눈앞에 보이는 모습이 가관이다.

할 말을 잃은 지석은 의자 등받이 위로 팔을 걸쳤다. 대체 어디까지 하려나 싶어 잠시 놔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둥근 기둥 모양의 하늘색 아이스크림이 우선경의 입술 사이를 들락거렸다. 차가워서 그런지 입술이 빨갛게 얼어붙어 있었다.

하늘색으로 얇게 코팅된 소다맛 부분을 아껴 먹겠다고 녹여 먹고 굴려 먹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이가 닿으면 혹여나 얇은 코팅이 깨질까 혀를 내밀어 핥았고, 아이스크림을 옆으로 눕혀 입술로 기둥을 살살 빨았다.

딱 머리만 하얀 부분은 특별히 우유 맛이 났다.

혀를 둥글리며 머리를 핥다가 입술을 오므려 녹은 아이스크림을 쪽 빨았다.

외설적인 광경에 한지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스크림이 녹으면서 표면에 촉촉한 물기가 어렸다. 정성 들여 아껴 먹던 선경이 아예 기둥을 입에 삼키고 빨았다. 볼이 홀쭉하게 파이며 춥춥, 흡입하는 소리가 났다.

차마 눈 뜨고는 못 보겠어서 우선경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뺏었다. 한지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화를 냈다.

“누가 아이스크림을 그따위로 먹어.”

“내 거야, 줘.”

“됐어, 그쪽은 물이나 마셔.”

“달라고.”

손을 뻗는 우선경에겐 아까 먹다 남은 생수를 던졌다.

한지석은 가져간 하늘색 막대 아이스크림을 인정사정없이 씹어 먹었다. 우선경이 그토록 아껴 먹던 하늘색 소다 맛이 눈앞에서 단번에 사라졌다.

“안 돼!”

아이스크림을 강탈당한 선경은 다급하게 일어났다. 어찌나 급했는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가 나뒹굴었다.

선경은 정신없이 달려와 한지석의 턱을 붙잡았다.

“아 해!”

막대기는 비어 있었고 한지석의 입엔 아직 삼키지 못한 아이스크림이 가득했다. 차마 입을 벌릴 순 없어 꾹 다물며 버티는데 우선경은 포기는커녕 집요하게 매달렸다. 하나 더 사 먹으면 될 일인데 만취한 사람에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안 돼, 먹지 마! 빨리 입 벌리라고!”

턱 근육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마음은 더 급해졌다. 한지석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끼워 넣던 우선경은 그대로 의자에 타고 올랐다. 허벅지를 깔고 앉아 그의 어깨와 턱을 움켜잡았다.

성인 두 명이 올라탄 의자는 비좁았고, 위태롭게 흔들렸다. 불안한 자세에 선경의 몸이 옆으로 넘어갈 듯 기울어졌다.

놀란 지석이 손을 뻗어 선경의 허리를 붙잡았다. 잠시 집중이 풀어져서일까, 힘주어 다물고 있던 입술이 살짝 열렸다.

그 사이로 부서진 빙하 같은 아이스크림 조각들이 언뜻 보였다.

제 것을 찾은 우선경의 눈동자가 광기로 반짝, 빛났다.

***

띠리리리리-

침대에 엎어져 반쯤 기절해 있던 선경은 시계 알람에 눈을 떴다. 아침 7시 정각에 맞춰 둔 알람은 오늘도 어김없이 울렸다.

전날 술을 퍼마신 후유증으로 머리는 누가 쥐어짜 내는 듯 지끈거렸고, 숨만 쉬어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겨우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두 다리로 서 있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퉁퉁 부은 얼굴을 문지르며 방 밖으로 나왔다.

계단 손잡이에 몸을 의탁하고 기어 내려온 선경은 곧장 주방으로 갔다. 도우미들과 함께 재료 손질을 하고 있던 광주댁이 그를 보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콩나물을 쟁반 위로 던지며 달려 나왔다.

“도련님!”

“…이모, 나 물 좀.”

“잠깐만 기다려 봐요! 꿀물 얼른 타 올게요!”

우선경이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광주댁은 찬장에서 꿀단지를 꺼냈다. 머그잔에 커다란 수저로 꿀 두 스푼을 가득 퍼 담았다.

거기에 팔팔 끓는 물을 넣고 덩어리진 꿀을 곱게 풀어 선경에게 내밀었다.

하얀 머그잔에선 뜨거운 김이 폴폴 날렸다.

선경은 차마 마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손에 든 잔을 바라만 봤다.

“…그냥 찬물 주면 안 될까? 나 토할 거 같아.”

“찬 거 마시면 배앓이 하신다고요! 숙취에는 꿀물이 좋아요, 얼른 후루룩 드세요. 해장도 하셔야죠. 내가 진짜 살다 살다 선경 도련님 해장국을 다 끓여 보네. 잠시만 계세요. 북엇국 금방 해드릴게요.”

폭격 같은 잔소리를 퍼붓던 광주댁은 가스레인지 앞으로 가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눈치를 보던 선경은 꿀물에 입술만 살짝 적시곤 몰래 잔을 내려놨다.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일렬종대로 깔끔하게 정리된 식재료들이 보였다. 아쉽게도 생수는 늘 미지근하게 상온 보관해 둬서 차가운 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유리병에 담긴 보리차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한 선경의 눈이 반짝 뜨였다. 그대로 유리병을 꺼내 입을 대고 마셨다.

차갑고 시원한 보리차가 식도를 훑고 지나가자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던 갈증도 제법 사라졌다. 선경은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물었다.

“나 어제 어떻게 집에 왔어?”

“기억 안 나세요? 배 집사가 새벽에 업고 들어왔잖아요! 아주 술이 떡이 되셔서는… 어휴 못살아, 술 안 좋아하시면서 대체 왜 그렇게 드셨대요? 회장님 아시면 어쩌시려구!”

“할아버지 아직 모르시지?”

“아셨다간 난리 나죠. 다행인 줄 아세요.”

엄하게 혼내던 광주댁은 보다 못했는지 결국 새 유리컵을 가져다줬다. 선경은 괜히 머쓱해져 살살 눈웃음을 흘렸다.

컵에 보리차를 한 잔 가득 따랐다. 계속 두고 마실 요량으로 유리병은 옆구리에 껴뒀다.

천천히 물을 마시던 우선경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며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 어제를 떠올렸다. 닭갈빗집에서 애들과 같이 술을 마셨던 것까진 기억이 났다.

이게 다 그놈의 과일 소주 때문이야. 진짜 확 가버리네. 그런데 내가 배 집사님한테 직접 연락을 했었던가?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셨는데 용케 집까지….

어?

‘진짜 손 많이 가네.’

‘원래 술버릇이 그래요?’

‘아이스크림 그따위로 먹지 말라고.’

“푸훕!”

입안에 들어 있던 보리차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바닥을 물바다로 만든 걸로 모자라 사레에 들려 밭은기침을 쏟아내자 해장국을 끓이던 광주댁이 소스라치게 놀라 달려왔다.

아이구 왜 이러신대! 도련님, 괜찮으셔요?

걱정과 타박하는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지금 우선경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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