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안녕.”
“좋은 아침.”
“왔어? 입은 왜 그래?”
오전 강의를 듣고 스터디 룸을 찾았다. 먼저 와 있던 동기들이 무기력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중 눈썰미 좋은 녀석 하나가 한지석의 입가에 난 상처를 알아봤다. 야트막하게 찢어진 입술을 문지르던 한지석은 아침에 봤던 우선경의 황당한 낯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냥 좀 찢어졌어.”
“립밤 같은 거 좀 챙겨 바르고 그래. 나도 요새 건조해서 그런지 하품하다가 자주 찢어지더라. 눈곱도 자주 생기고.”
“드러워, 진짜. 오빠랑 지석 오빠랑은 좀 다르죠. 오빠는 하품을 진짜 입이 찢어져라 하잖아요. 옆에서 보니까 주먹도 들어가겠더구만.”
“야, 한지석은 뭐 사람 아니냐? 쟤도 똑같이 하품하고 눈곱 끼고 그래.”
“생산자가 다르잖아요.”
“이야, 내 여자 친구 오늘따라 멘트 좀 치는데? 맵다, 매워.”
커플의 주접에 공부에 지쳐 있던 스터디 룸에도 약간의 웃음이 돌았다. 다들 이때를 틈타 스트레칭도 하고 잠시 화장실도 다녀오며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한지석도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책과 노트를 순서대로 펼쳐놓고 공부할 준비를 시작했다. 싸 들고 온 책들은 하나같이 크고 묵직해서 금세 책상 한 면을 어지럽게 채웠다.
“어제는 왜 안 왔어?”
동기 최정훈이 소리도 없이 바퀴 의자를 밀며 다가왔다.
그는 어젯밤 회식에 불참한 이유를 끊임없이 캐묻고 있었다. 뭔가 재미있는 건수를 발견한 사람처럼 눈빛이 초롱하게 빛났다.
“말했잖아, 급한 일이 생겼다니까.”
“웬 오메가랑 둘이 있는 걸 봤다는 제보가 들어왔는데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헛소리 말고 신경 꺼.”
한지석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까이 붙은 팔걸이를 밀쳤다. 최정훈이 앉아 있던 의자가 살짝 뒤로 떠밀렸지만 톡, 가벼운 발돋움 한 번에 다시 되돌아온다. 자신만큼이나 넓고 딱딱한 지석의 어깨 끝에 턱을 슬쩍 걸쳤다.
“자기, 오늘 몇 시까지 할 거임?”
“글쎄, 딱히 정해진 계획은 없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책상 위에 꺼내놓은 타이머를 12시간으로 맞춰놓는다.
옆에서 지켜보던 최정훈은 ‘으, 지독한 놈’ 하며 넌더리를 치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스터디 모임 구성원은 총 6명이었다. 최소 인원을 채워 신청하면 학교에선 제법 그럴듯한 스터디 룸을 제공했다.
재판 사례집을 풀며 의견을 나누고 자유롭게 공부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라 아무래도 대화가 제한되는 도서관보단 스터디 룸이 편했다.
정해진 시간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스케줄과 형편에 맞춰 들락거리곤 했는데 다들 공부에 도가 튼 이들이라 어느 상황에서든 본인 공부에 집중하곤 했다.
“정훈이는 오늘 스터디 째고 알바 갈 거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 동기가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쭉 빨아 마시며 말했다.
알바? 바닥에 쏟아 순서가 뒤섞인 프린트물을 다시 정리하던 한지석이 이게 뭔 소리냐며 되물었다.
“과외 잡았어?”
“아니…. 나 그거 하려고, 페로몬 알바.”
조심스러운 대답에 한지석은 눈살을 찡그렸다. 며칠 전 최정훈이 몰래 와서 상의한 적이 있었다.
웬 부잣집 오메가가 페로몬을 공유해 줄 신체 건강한 알파를 구한다고 그랬다. 말은 치료 목적이라고 했지만 그 의도가 무척이나 수상했다.
“그걸 하기로 했다고? 진심이야?”
“아니 근데 들어 봐. 진짜 개꿀 알바란 말야. 두 시간에 페이가 삼백이야.”
최정훈은 옆으로 의자를 바짝 붙이고 목소리를 낮춰 얘기했다. 한지석은 여전히 공감할 수 없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최정훈에게 아르바이트 제의가 들어온 것은 얼마 전 일이었다.
의뢰인은 대형 종합병원 특수형질과였고, 두 시간 동안 오메가에게 페로몬 샤워를 해 주면 된다고 했다. 신체 접촉은 절대 없을 거라고 그쪽에서 먼저 강력하게 선을 그어왔다.
다만 조건이 좀 까다로웠는데, 나이는 이, 삼십 대로 발현한 지 최소 10년이 넘은 알파일 것. 페로몬 통제에 능숙할 것, 최근 수술이나 약물 복용의 이력이 없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을 원했다.
언뜻 들으면 수상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병원에서 철저히 사람을 고르는구나 싶기도 했다.
“상대가 누군지는 알아?”
“아니, 그건 죽어도 안 알려 주더라고. 와서 계약서 쓰기 전까진 얘기해 줄 수 없대.”
심지어 오메가의 신원도 불분명했다.
나이도, 성별도 모두 비밀이었다. 알파 페로몬을 음지에서 몰래 구하는 걸 보면 신원이 알려져선 안 되는 사람인 건 확실했다.
“그걸 꼭 해야겠어?”
“별일이야 있겠냐. 그래도 한 번 다녀오면 등록금 절반은 채울 수 있잖아. 이번에 장학금 나오는 거랑 합치면 다음 학기는 걱정 없다고.”
대학교는 부모님께 손 벌려가며 다녔지만, 대학원까지 학비 부담을 지워드리는 건 너무 죄스러웠다.
그렇게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던 최정훈은 틈틈이 과외 알바를 해가며 학비를 모아왔는데, 사실 공부할 시간을 쪼개가며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건 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고액 아르바이트를 제의받았으니 혹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꺼림칙한 부분은 있었지만, 불법은 아니니 그냥 눈 딱 감고 저지르면 그만이었다.
그때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화장실을 다녀왔던 동기 하나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들어왔다.
열린 문틈으로 바깥의 웅성거림이 새어들어 왔다. 방음이 잘 돼서 몰랐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밖에 왜 저래? 무슨 일 있어?”
“남자 화장실에서 누가 히트 사이클이 왔나 봐요. 지금 완전 난리, 난리.”
“세상에, 요즘에도 밖에서 히트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어?”
“열성이나 발현한 지 얼마 안 된 오메가들은 그럴 수 있어. 그래서 어떻게 하고 있는데?”
동기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은 어디를 가든 늘 이야깃거리가 된다.
한지석은 별 관심 없는 듯 책상에 올려둔 법전과 두꺼운 형법서를 양쪽에 펼쳤다.
소송 사례집을 가운데 두고 백지의 노트를 그 옆에 놔뒀다. 가볍게 손가락을 풀어 준 뒤 하얀 케이스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냈다. 막 공부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이 와중에 화장실 사건을 목격한 동기는 직접 본 광경을 술술 풀어놓고 있었다.
“안에서 벌벌 떨고 우는데 너무 안됐더라고. 그거 버티는 것도 고역이라면서. 듣기로는 알파 페로몬이 좀 진정시켜 준다던데.”
“나도 그 기사 봤어. 꼭 섹스가 아니더라도, 그냥 안아 주기만 해도 페로몬 때문에 안정 효과가 돈다고 했던 것 같던데. 그런데 그게 쉽지 않지. 히트 온 오메가를 눈앞에 두고 멀쩡하게 버틸 알파가 어딨어. 웬만한 자제력 없이는 힘들어.”
쟤라면 모를까. 정훈이 턱짓으로 옆에 앉은 우성 알파를 슬쩍 가리켰다. 이어폰을 한쪽만 꽂은 한지석은 최정훈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척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듯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린 아름이 지석의 팔을 살살 잡고 흔들었다.
“오빠가 가서 좀 도와주면 안 돼요?”
“내가 왜?”
“안됐잖아요. 남들 앞에서 구경거리 되는 거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한지석은 화장실에서 현장을 보고 온 동기에게 물었다.
“119 연락했대?”
“네, 행정실에서 불렀대요.”
“그럼 됐어. 전문가가 알아서 수습해 주겠지. 쓸데없는 관심 끊어 주는 게 그쪽을 도와주는 일이야.”
딱 잘라 선을 긋는 태도에 아름은 머쓱하진 손을 원상복구했다. 한지석의 이런 개인주의적인 면모를 볼 때마다 거리감을 느끼곤 했다.
친한 사람들에겐 잘 웃고, 다정하게 대해 주지만 한지석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사람에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원리원칙을 고수하며 타인의 사정엔 함부로 참견하지 않았다.
“그래, 우리 앞길이 구만 리지. 공부나 하자.”
짝! 분위기를 환기하는 박수 소리에 다들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열린 창문 너머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한지석의 말처럼 소란은 곧 잠잠해질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최정훈은 책을 덮고 슬금슬금 짐을 챙겼다.
막상 가려고 하니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눈동자를 바쁘게 굴리던 최정훈은 옆자리를 힐끔 쳐다봤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무섭게 집중하고 있는 한지석이 보였다. 그의 책상에 놓인 타이머는 이제 8시간이 남아 있었다.
한지석의 팔을 쿡쿡 찔렀다. 그의 곁으로 몸을 바짝 붙인 최정훈은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너 계속 남아 있을 거지?”
“아마도.”
“혹시라도 말이야…, 내가 세 시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최정훈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낮추고 ‘경찰에 신고 좀 해 줘.’ 하고 소곤거렸다.
잠시 책에서 눈을 뗀 한지석은 상체를 반쯤 돌렸다.
느슨하게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펜을 든 손으로는 이마를 긁는다. 그의 부탁이 마음에 썩 들지 않는지 반듯한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위험한 거 아니라며.”
“절대 아니야! 아닌 건 확실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정훈은 손을 교차해 다소곳이 제 가슴을 가렸다. 말은 아니라고 하는데 본인도 미심쩍은 거다.
혹시라도 젊은 알파의 정기를 노리는 돈 많은 변태 오메가이면 어쩌나. 이러다 제 정절을 잃는 건 아닐까.
꿀 빠는 고액 알바가 흔한 일이 아닌 걸 잘 알다 보니 걱정이 됐다.
그렇다고 놓치자니 너무 큰 금액이라 아쉬웠다.
삼백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최정훈은 이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시끄럽고 얼른 다녀와.”
“알겠어, 후딱 끝내고 올게! 이따가 맛있는 거 사 올 테니까 다들 기대해라! 행님이 알바비 받으면 크게 쏜다.”
수선을 떨던 최정훈이 가방을 챙겨 들고 떠났다.
다시 몸을 빙글 돌린 한지석은 펜을 쥔 손을 노트 위에 올렸다. 눈은 책에 고정됐고 오른손은 물 흐르듯 글자를 적어간다. 앞으로 30분 뒤면 오후 수업이 시작됐다.
남은 시간은 짧았지만 그 전까진 하던 분량은 모두 끝내놓고 싶었다. 지석은 순식간에 집중하며 책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