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27화 (27/127)

#27

***

“으….”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돌아온 선경은 제 방까지 올라가지도 못하고 응접실 소파에 쓰러졌다.

술병이 제대로 났다.

오전 내내 멀미하듯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참아냈던 선경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소파에 파묻혀 신음했다.

허이고, 옆에서 김 박사가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게 느껴졌다. 우선경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알 만하신 분이 대체 왜 그러셨을까요.”

“…….”

“페로몬에 그토록 예민하게 구시면서, 길거리를 만취 상태로 돌아다녔다고요? 그 동네 알파들 괜찮았답니까?”

책망하는 소리에 선경은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팔이나 좀 내밀어 보세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몸을 뒤집고 순순히 오른팔을 내놓자 김 박사가 스테인리스 트레이에 담아 온 수액 세트를 북북 뜯었다.

하얀 팔뚝에 고무줄을 채우더니 혈관을 찾아 능숙하게 주삿바늘을 찔러 넣는다. 폴대에 매달아 둔 수액까지 연결하자 영락없는 환자 꼴로 변했다.

선경은 바늘이 꽂혀 묵직해진 팔을 들어 올렸다. 연약한 팔에 달린 주삿바늘과 치렁치렁한 링거줄이 못내 거슬렸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주치의 처방에 이래저래 말 얹지 마세요. 잠시 뒤에 페로몬 치료 시작할 건데 이 꼴로는 절대 못 버텨요.”

삼십 분만 맞읍시다. 김 박사는 평소보다 엄격하게 말했다.

허공에 떠 있는 우선경의 팔을 대신 내려 주고 조절기를 돌렸다. 섬세하게 수액 양을 맞추던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우선경 씨.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부할게요. 과음은 절대 금지입니다.”

“네.”

“미리 주의 주지 못한 제 책임도 있으니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지만 두 번은 안 됩니다.”

“네.”

“본인이 오메가라는 걸 항상 자각하고 다녀야 돼요. 물론 어렵다는 거 잘 압니다. 뒤늦게 발현할수록 베타로 살아왔을 때의 습관을 버리기란 어렵죠. 베타일 때야 흥청망청 취해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아니란 말입니다. 적당히 기분 좋게 마시면 몰라도 필름이 끊기도록 마신다? 이건 심각한 일이에요. 페로몬 통제는 전적으로 정신력에 달려 있는데 만취가 되면 이게 다 무너진단 말입니다. 뉴스에도 매번 나오잖아요! 오메가와 관련된 성범죄엔 음주로 인한 상황이 30퍼센트 이상을 차지….”

“…….”

구구절절 이어지는 잔소리에 선경은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도질 것만 같았다.

속은 여전히 울렁거렸지만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소파에 기대앉았다. 주삿바늘이 없는 멀쩡한 팔을 푹신한 팔걸이에 걸쳐놓고 이마를 짚었다. 저릿저릿한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눈을 감고 있는 선경의 얼굴은 혈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우선경 씨 지금 제 말 듣고 있어요?”

“다 이해했어요. 두 번 말 안 하셔도 됩니다. 그보다 오늘은 누가 오기로 했는데요?”

불편한 주제를 피해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평소엔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알파의 신상을 묻자 김 박사는 못 이기는 척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차트를 집었다.

떨떠름한 목소리로 적혀 있는 알파의 이력을 읊는다.

“25살이고, 현재 한국대 로스쿨에 재학 중인 학생이네요.”

“네?”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메슥거리던 속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바짝 조여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우선경은 초조한 마음으로 애꿎은 수액 팩만 올려다봤다.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주사액을 바라보는데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사진 있어요? 이름은요?”

“누구요? 오늘 오는 알파요? 갑자기 그런 게 왜 궁금하시죠?”

여태 관심 한번 없으시던 분이? 김 박사가 호기심 그득한 눈을 치켜떴다.

“그게 한국대라니까, 혹시 아는 사람인가 해서… 아니, 아니에요. 못 들으신 거로 하세요.”

“아하.”

김 박사는 이력서를 다시 한번 들춰 보았다. 별것 없는 내용과 우선경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피식 웃는다.

“하여간 의외로 귀여우시다니까.”

선경은 괜한 것을 물었다고 입술을 깨물며 자책했다.

우선경이 거실에서 쉬고 있을 동안 의료팀은 페로몬 샤워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수액 팩이 얼추 비어갈 때 즈음 사복 차림의 간호사가 다가오더니 서재 쪽도 준비가 끝났다는 말을 전했다.

시간을 확인한 김 박사가 주삿바늘을 뽑아 주며 뒷정리를 도왔다.

우선경은 말없이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표정은 전처럼 무덤덤했지만 마른침을 삼키느라 목울대가 여러 번 꿀렁거렸다. 불편한 기색을 완전히 숨길 순 없었다.

서재에서 대면한 알파는 최정훈이란 남자였다.

알파답게 훤칠한 체격에 서글서글한 외모가 인상적이었지만, 그를 보는 우선경의 얼굴은 떨떠름했다.

아마도 긴장했던 게 무색해진 탓일 거다.

“왜 그러세요. 꼭 실망한 사람처럼.”

“아니거든요.”

“기대하신 분이 따로 있으셨던 건 아니죠?”

손목에 심박수 측정기를 채워 주던 김 박사가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선경은 눈을 매섭게 흘겼다. 다행히 눈치 빠른 김 박사는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보태진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테이블 위엔 타이머가 올라왔다. 버튼을 누르자 숫자가 쉼 없이 올라가며 시간을 기록했다.

“시작하겠습니다.”

김 박사의 말과 함께 알파의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

아르바이트하러 간다던 최정훈이 스터디 룸으로 복귀한 건 오후 6시가 채 안 됐을 때였다.

“행님 오셨다!”

어깨로 문을 밀고 들어온 정훈의 양손엔 묵직한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식새끼들을 위해 저녁거리를 사 온 아빠처럼 뿌듯한 얼굴을 하고 햄버거 봉투를 흔들었다.

“오, 일찍 왔네?”

“뭐야, 햄버거?! 맛있는 거 사 준다면서요! 나가서 먹는 거 아니었어요?”

“야, 이래 봬도 신상이야. 이거 할인도 안 해서 졸라게 비싼 거 알지?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먹어라.”

최정훈은 한껏 으스대며 종이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다들 먹는 것엔 진심인 편이라 동기들은 별다른 지시 없이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펼쳐져 있던 책들을 싹 치우고 순식간에 자리를 만들어냈다.

누군가는 종이봉투를 찢고 감자튀김을 산처럼 부었고, 어떤 이는 음료수 덮개를 열어 그 위에 케첩을 죽죽 짜냈다.

분업화된 준비 과정이 끝나자 각자 햄버거 하나씩을 챙겨 들고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최정훈도 본인의 바퀴 의자를 끌어왔다. 무거운 엉덩이를 붙이자 옆자리에 있던 한지석이 포장된 햄버거를 집어 건넸다.

“어어, 땡큐.”

“왜 이렇게 빨리 끝났어?”

“아, 그게… 그분이 오늘 몸 상태가 좀 안 좋은 거 같더라고. 중간에 너무 힘들어하길래 다음에 다시 하기로 했어. 대신 수당은 약속대로 다 받았고. 나중에 추가금도 준다더라.”

한지석은 이번에도 말없이 최정훈을 응시했다. 추궁하는 눈초리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포장을 벗기고 햄버거를 크게 한 입 깨물려던 정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보지 마. 정말로 괜찮았다고.”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내가 지금 계약서 때문에 얘기를 못 해서 그러는데, 정말 네가 뭘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아냐, 됐다.”

어휴, 진짜! 최정훈은 주먹으로 답답한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말을 못 하는 게 이토록 불편할 줄이야. 어디 대나무숲이라도 있다면 고개를 처박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었다.

오늘 만난 오메가는 음습한 취향을 가진 변태도 아니었고, 못 봐줄 만한 박색도 아니었다. 오히려 도자기 인형 같은 섬세한 이목구비에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야기는 친한 친구에게조차 발설하면 안 된다.

계약서엔 비밀엄수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오메가의 신상과 관련해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는 오늘 받은 알바비를 포함해 감당할 수 없는 위약금을 지불해야 했다.

“몸이 많이 안 좋기는 한가 보더라. 안쓰럽게.”

최정훈은 짧았지만, 인상적이었던 만남을 떠올렸다.

저택에서 본 오메가는 몸을 가누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조금 앉아 있기만 했을 뿐인데도 안색이 어두웠고, 창문을 내다보는 눈 밑은 검게 그늘져 있었다.

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걸까? 햇볕도 제대로 못 쬔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연약하다 못해 가련해 보였다.

페로몬 샤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 사람은 하얀 손을 들어 핼쑥해진 낯을 덮었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다며 눈을 감는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던지. 보고 있던 최정훈의 가슴이 다 안타까울 정도였다.

빨리 건강해져야 될 텐데. 다음번에는 좀 더 오래 봤으면 좋겠다.

최정훈은 이름도 모를 오메가의 안녕을 기원하며 손에 쥔 햄버거를 크게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씹더니 느닷없이 내용물을 들춰 본다.

이 장사꾼 놈들, 프리미엄 블랙타이거쉬림프 어쩌고 하면서 비싸게 받아 처먹더니 맛은 그냥 새우버거와 똑같네?

저만 그렇게 생각하나 싶어서 한지석을 부르려는데, 옆에 앉은 놈은 제 몫의 햄버거를 먹성 좋은 동기에게 넘겨주고 오렌지 주스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뭘 하나 봤더니 링 노트로 제본한 책자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중이다.

“밥 먹는 시간까지 뭘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리는 거냐?”

“어.”

“너 그거 활자 중독이야.”

핀잔을 주면서도 뭘 그렇게 집중해서 읽나 궁금해 슬쩍 엿봤다. 머리말에 굵은 글씨로 대법원 판결문이라고 적힌 게 보인다. 어으! 정훈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몸서리치며 등을 돌렸다.

“한국대 최대 노잼인간.”

“최대씩이나 붙여 주고 영광이네.”

“넌 분명 연애도 재미없게 할 거야. 데이트하면서도 공부하지?”

“글쎄, 오래돼서 기억도 안 나는데?”

아마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잠시 생각하던 한지석은 심드렁히 웃으며 대답했다.

깎아내리는 말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동조하는 모습은 궁상맞기는커녕 되레 여유가 넘쳐 보인다.

하여간 쓸데없이 멋있어.

최정훈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부러움을 햄버거로 조용히 삼켜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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