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28화 (28/127)

#28

똑같은 일상들이 반복됐다. 지루하긴 했지만, 별일이 없어 오히려 편안한 날들이었다.

조별 과제는 순조롭게 끝났다.

전시회를 데려가 준 보답으로 버스를 태워 주겠다고 장담했던 친구들은 그 약속을 완벽하게 지켰다.

홍재영은 안석현이 준비한 자료를 이용해 그야말로 영혼을 갈아 넣은 PPT를 만들었고, 윤봄은 이를 바탕으로 흠잡을 곳 없는 발표를 해냈다.

덕분에 교수님에겐 극찬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그에 상응하는 점수도 얻었다.

5조 녀석들은 고맙게도 우선경의 뒷배경을 떠들고 다니지 않았다. 생각보다 의리가 깊었고,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았다.

이후로도 친분은 계속 유지됐다.

가끔씩 인문대 복도나 계단에서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했고, 강의가 겹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당당하게 옆자리를 꿰차고 앉아 같이 수업을 듣곤 했다.

과 사람들은 이들이 우선경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신기하게 여겼다. 덩달아 관심이 따라왔다.

여전히 아니꼽게 보는 인간들도 있었지만, 호의를 갖고 적극적으로 말을 붙이는 사람들이 늘었다.

누구와는 어울리고, 누구는 무시할 수 없다 보니 결국 말을 걸어오면 전부 다 대꾸를 해 줘야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선경은 최근 들어 학교를 다니는 게 조금 피곤하다 느꼈다.

이 얘기를 권무열에게 해 주자 무열은 핸드폰을 붙잡고 박장대소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차와 연결된 블루투스 스피커를 타고 쩌렁쩌렁 울렸다.

-이야 우선경, 혼자 친구도 사귀고. 다 컸네?

“시끄러워.”

-그래, 귀찮아도 사람들 인사도 좀 받아 주고 같이 어울리고 그래야지. 그게 다 경험이고 사회생활 아니겠냐. 하지만 네 불알친구는 나라는 거 잊지 마. 걔들이 아무리 잘해 줘도 절친 자리는 절대 못 내준다.

“여자 친구 생겼다고 나부터 내팽개쳤던 놈이 할 만한 소리는 아닌데.”

-억울하면 너도 연애하든가. 페로몬 샤워 할 때 만나는 놈들 다 알파라며, 괜찮은 사람 없었어?

모든 것을 털어놓는 사이다 보니 권무열은 우선경의 사적인 비밀들까지 꿰고 있었다.

스스럼없이 묻는 질문에 선경은 지금껏 만나온 알파들을 되새겨 봤다.

5명, 6명? 대략 그 정도쯤 됐나?

김 박사가 어렵게 섭외한 이들은 모두 2, 30대의 신체 건강한 젊은 알파들이었다. 외형이야 말할 것 없이 훌륭했고, 페로몬 또한 건강하고 맑았다.

누가 봐도 매력적인 알파들이었다. 그게 이성적인 관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선경은 자신이 아직도 베타의 틀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오메가 됐다고 하루아침에 취향이 남자로 바뀌겠냐.”

-페로몬의 노예들이 무슨 성별을 따져. 그런 거 상관없지 않아? 거의 본능이라던데. 눈 돌아가면 취향도 무시하고 남녀 가릴 것 없이 붙어먹는다면서. 그리고 너, 지난번엔 분명히 처음 보는 알파 새끼한테 꼴려서 사고 칠 뻔했었다며.

권무열은 거침없이 정곡을 찔렀다. 할 말이 없어진 선경은 활짝 열린 운전석 창문에 팔을 걸치고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다른 알파들을 봐도 별생각이 안 드는 걸 어떻게 해. 성별의 문제를 떠나서 아예 관심이 안 생겨.”

우선경이 페로몬 치료를 받는 목적은 딱 하나였다.

지난번처럼 알파 페로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페로몬 샤워라는 자극적인 치료를 선택하면서도 선경은 혹시나 못 볼 꼴을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우려가 무색하게 다른 알파들의 페로몬에는 크게 자극받지 못했다.

어쩌면 지난번 일은 그저 우연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선경은 알파 페로몬에 대한 역치가 높았다.

최근까지도 덤덤한 반응을 보이자 김 박사는 치료를 슬슬 중단하자는 의견을 보내왔다.

-아직 네 취향을 못 만나서 그런 거겠지. 네가 눈이 좀 높아? 마음에 드는 애 없다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연애 한번 안 해 본 놈이 어련하시겠냐고. 기다려 봐. 네 취향에 들어차는 알파 나타나면 또 다르겠지.

“잘 아네. 전문가 납셨지.”

-당연하지! 감히 20년 지기 소울메이트의 짬을 무시하, 어? 우리 애기 전화 왔다. 야, 끊어.

여자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며 권무열은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내버렸다. 전화가 끊긴 차 안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선경은 아쉬워하는 내색 없이 핸들을 돌렸다. 차가 부드럽게 우회전했다. 코너를 돌자 마침내 목적지인 형의 회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담동 사거리에 우뚝 솟은 대형 빌딩은 외벽이 온통 유리로 둘러져 있었다. 그 전신에 햇빛이 닿으면서 건물은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큰형인 우선우는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대표실까지 이어지는 복도 곳곳에는 소속 연기자들의 프로필 사진이 액자 형태로 걸려 있었다.

연예인은 잘 몰랐지만 사진 속 사람들은 다 구면이다. 우선우는 계약을 고려할 때마다 꼭 동생에게 의견을 물었다.

우선경의 미적 기준에 통과한다면 상업 시장에서도 반드시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이건 사람뿐만 아니라 작품에서도 통했는데, 사실 오늘도 영화 컨셉에 대해 의견을 물을 게 있다며 부른 것이다.

한껏 매력을 어필하고 있는 사진들을 둘러보며 선경은 제 취향이 유별나고 까다롭다는 것을 인정했다. 모두가 아름답고 빛이 나는 외모를 가졌지만, 이중에도 제 취향은 없었다.

***

넓고 길쭉한 책상에 모여 앉아 익숙하다는 듯 책을 훑었다.

봉긋하게 펼쳐진 법전과 묵직한 기본 서적, 두툼하게 묶인 사례집들은 흡사 활자의 무덤처럼 보인다.

샤프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답안을 써 내려가는 손은 잠시도 쉬지 않았고, 이따금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빨대로 커피를 들이켜는 잡음 같은 게 이어졌다. 모두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기출 사례를 파고 또 팠다.

그러기를 몇 시간째, 드디어 타이머가 알람을 삑삑 울렸다.

동기 중 한 명은 기다렸다는 듯이 볼펜을 내던졌고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더는 못해. 나 이제 글자만 봐도 울렁거린다.”

“저기 봐요. 정훈 오빠는 진짜 토하는 중.”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최정훈이 책상 아래로 고개를 숙인 채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웩웩거리는 모습은 공부에 질렸다기보다는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최정훈은 스터디하는 내내 통 집중을 못 했다.

배탈이라도 난 것인지 계속 아랫배를 문질러댔고 식은땀을 흘렸다. 이 상태로 몇 시간을 앉아 공부한 것만 해도 대단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들은 한지석이 허리를 숙이고 있는 정훈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봤다.

“어디 안 좋아?”

“아…, 배가 계속 아프네. 왜 이러지.”

최정훈은 명치 부근을 붙잡고 끙끙거렸다. 집중이 풀어지자 참고 있던 고통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통증의 강도가 심해지는지 눈가가 점점 일그러졌다. 고통을 참아내느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오빠 괜찮아요?”

“아니, 나… 너무 아파.”

“병원 가 봐야 되는 거 아냐?”

주변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최정훈은 배를 움켜쥐고 겨우겨우 허리를 들었다. 숨쉬기도 버거운지 입으로 헉헉 가쁜 숨을 내쉰다. 그의 이마와 뺨, 목과 티셔츠까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안 돼…. 오늘 알바 가야 해.”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아르바이트 타령을 하고 있었다.

“또 무슨 알바?”

“…지난번에 그거, 페로몬.”

“다 끝난 거 아니야?”

최정훈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지석의 손목을 붙잡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으… 지석아, 나… 이거 꼭 해야 된다.”

“이 상태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안 돼, 해야 돼. 꼭 가야 돼….

장기가 뒤틀리는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최정훈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지석은 그가 하는 짓이 영 답답했는지 짜증스레 목덜미를 문질렀다.

최정훈을 병원으로 보내려면 결국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연락처 줘, 대신 가 줄 테니까.”

***

평범한 부잣집은 아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담벼락과 그 뒤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저택만 보더라도 집주인의 위세가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이런 집에서 살 수 있는 재력가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한 폭의 그림 같은 정원을 지나 현관까지 이르렀을 때,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이 다가와 공손히 물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따로 맡기실 짐은 없으신가요.”

두 손을 배꼽 위에 모으고 상체를 살짝 숙인 자세에 지석은 고용인의 얼굴 대신 정수리만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정갈하게 빗어 헤어 망으로 고정한 머리는 빠져나온 잔머리 하나 없이 깔끔했다. 입고 있는 진갈색의 유니폼 또한 단정하다.

가슴팍에 붙은 아크릴 소재의 명찰까지. 가정집에서 일하는 고용인이라고 하기엔 옷차림과 에티튜드 모두 지나치게 전문적이고 교육받은 모습이다. 마치 호텔에서 접객을 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괜찮습니다.”

한지석의 대답에 고용인은 가벼운 묵례로 화답하곤 먼저 돌아섰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움직이는 직원의 뒤를 따라 성북동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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