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알파가 변경되었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서재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료팀은 비상이 걸렸다. 최정훈에게 맞춰 이미 끝내 놓은 세팅을 뒤집고 다시 준비를 시작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한지석이 서재에 들어서자 5명의 간호사들은 짐승이 사냥감을 노리듯이 달려들었다.
의자에 앉은 지석에게 설문지 작성을 요청했고, 옆에선 상태 확인을 위한 기본적인 검사가 시작됐다.
능숙한 손놀림이 팔꿈치에 패드를 감고 혈압을 쟀다. 바로 이어서 페로몬 수치를 확인하겠다고 손가락을 찔러 피를 뽑는다. 동시에 귓구멍 안으로 불쑥 체온계가 들어왔다. 삐빅- 기계에선 알람이 울렸다.
여러 명이 달라붙어 검사를 진행하는 와중에, 정면에선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계약서를 한지석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두 손이 묶여 있는 한지석에게 고문 변호사는 전문적인 법률용어를 써가며 비밀 유지 조항을 대신 읊었다.
다양한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한지석은 당황한 기색 없이 하나하나 순서대로 처리해 나갔다.
일단 3페이지 분량의 건강 관련 설문지를 빠르게 작성한 뒤 넘겨주고, 간호사의 요청대로 심박수를 측정하는 웨어러블 타입의 스트랩을 손목에 채웠다.
동시에 변호사가 낭독한 계약서는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내용을 직접 확인했다.
묘하게 협박처럼 들렸던 설명과 달리 계약서 자체는 특별히 거슬리는 내용이 없었다. 다만 계약의 주체가 ‘서화 그룹’이었다는 게 새삼 놀라웠을 뿐이다. 과연 집주인은 급이 다른 재력가였다.
지석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잠긴 펜 끝으로 계약서 말미에 쓰여 있는 ‘우선경’ 이름 세 글자를 툭툭 두드렸다. 딸깍, 머리를 누르자 꽁무니에서 얇은 펜촉이 뛰어나왔다.
“사인하면 됩니까?”
“역시 법 공부하시는 분들은 편하네요, 보통은 질문만 한 시간인데.”
“설명을 무섭게 하시니까요,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간 충분히 겁먹겠던데요.”
변호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이 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는 업무용 말투라고 해명했다. 서명을 확인한 변호사는 계약서 내용 중 빠진 곳이 없는지 한 번 더 살핀 뒤 서류를 챙겨 나갔다.
얼추 세팅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이 돼서야 김 박사가 나타났다.
정신없는 직원들과 달리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한결 가볍다 못해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오늘 치료에 참여하기로 한 알파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눈앞이 캄캄했었다.
가뜩이나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페로몬 치료라 적합한 알파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은밀하게 지원자를 받고, 거기서 또 조건을 세세히 따져가며 선별해야 한다. 1명을 구하기 위해선 노력과 시간, 정성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갔다.
심지어 이번이 마지막이라 더 이상 섭외해 놓은 알파도 없었다. 당일 취소 연락을 받고 곤란해하는 김 박사에게 한지석은 필요하다면 본인이 대신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본래대로라면 거절하는 게 맞았다. 아무리 최정훈이 건실한 사람이고, 친구들은 끼리끼리 어울린다지만 검증도 되지 않은 알파를 함부로 데려올 순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우성 알파라면…? 그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대화를 나눠 보니 대타를 자처한 알파의 정체는 한동진 대법원장의 외동아들이었다.
김 박사는 오래전에 한 번 스치듯 만난 적 있었던 한지석을 기억했다. 재고의 여지 없이 곧바로 승낙했다. 거절이라니, 이건 꽃가마를 태워 모셔 와야 했다.
의료팀에게 둘러싸인 알파는 담담히 협조하고 있었다. 김 박사는 그 언제보다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한지석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통은 이렇게 두서없이 진행하진 않는데… 오늘은 시간이 워낙 촉박해서 어쩔 수가 없네요.”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갑작스럽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한지석이 일어나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김 박사가 내민 손을 맞잡고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상체를 곧게 편 청년을 따라 김 박사의 시선이 저절로 위를 향했다.
훤칠한 키에 놀라 감탄하자, 부드러운 갈색빛을 띠는 눈동자에 웃음이 퍼졌다. 긴 눈매가 살짝 접히자 언뜻 보기에 차갑기만 하던 인상이 순간 다정하게 변했다.
“이야….”
김 박사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지금껏 알파라면 수없이 만나왔지만 새삼스럽게 또 놀라고 말았다.
엄청나게 잘생겼네, 우선경 씨 많이 놀라겠는데?
예민한 도련님은 생각보다 외적인 부분을 많이 보는지라 알파를 섭외할 때 알게 모르게 최대한 외모 조건도 따지곤 했다.
제법 잘생긴 알파들을 모셔 와도 늘 심드렁하기만 했는데, 오늘은 과연 어떨까?
나름 서프라이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시작하고 싶었다.
“얼추 마무리된 것 같은데, 같이 이동하실까요?”
김 박사가 앞장서 곁문을 열었다. 삐그덕, 녹슨 경첩 소리를 내며 열리는 나무문은 그들이 있는 응접실과 서재를 연결해 주고 있었다.
한쪽은 손잡이가 달려 있고 반대쪽은 책장이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비밀의 통로를 그대로 본떠 만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문을 통과해 서재로 넘어왔다. 곁문은 성인이 지나기엔 조금 작아 몸을 숙여 지나다녀야 했다.
깔끔하던 응접실과 달리 서재는 고풍스러움이 가득했다.
바닥 전체에 깔린 붉은 빈티지 카펫이며, 세월이 묻은 명품 고가구들,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하게 채워진 수천 권의 책들이 그랬다.
신기한 듯 서재를 둘러보는 한지석에게 김 박사가 설명을 보탰다.
“치료는 이곳에서 진행될 겁니다. 의료팀은 아까 머물던 그 방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고요.”
“언제 시작하나요?”
김 박사가 손목에 찬 가죽 시계를 확인했다.
긴 분침이 정각을 지나고 있었다. 마침 약속된 시간이었다.
“세 시군요, 지각은 안 하시는 분이라 곧 오실 겁니다.”
시간이 아주 조금 흘렀다. 누군가 도착한 듯 바깥이 부쩍 소란스러워졌다. 인기척은 점점 서재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닫이문이 벌컥 열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알파가 바뀌었다고요? 갑자기 왜요?”
걸음이 빠른 우선경이 먼저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하얗고 말간 얼굴이 빠르게 앞을 스쳐 갔다.
나이 지긋한 배 집사가 뒤따라오며 열심히 보고하고 있었지만,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모든 게 귀찮은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외투를 벗었다. 금테가 둘린 오래된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옷을 던져놓았다.
“예정돼 있던 분이 급성충수염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급하게 연락받아 전달 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요.”
“대신 다른 분이 오셔서 대기 중입니다. 신상까지는 직접 확인하진 못했지만 김 박사님이 직접 검토하신 분이라 일단 승인했습니다. 혹시라도 도련님이 불편하시다면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날짜를 잡도록 하겠습니다.”
우선경은 피곤한 티가 역력했다. 우선우에게 붙들려 이것저것 봐 달라, 골라 달라, 오후 내내 시달렸더니 기운이 쭉 빠졌다.
손목에 찬 시계도 무겁고 거추장스럽다. 스트랩을 풀어 뒤따라오는 배 집사에게 건네고 목 끝까지 잠겨 있던 단추도 열었다. 셔츠 소매는 팔꿈치가 드러나도록 둘둘 접어 올렸다. 주름이 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한지석은 책장에 등을 기댄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아무래도 우선경은 답답한 걸 싫어하는 타입인가 보다. 얼마 전 만취한 채로 옷을 벗어 젖히던 모습이 떠올라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취소할까요?”
“귀찮아,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인데. 대충 하고 끝내버리죠.”
심드렁히 말하며 몸을 돌리는 순간, 책장 앞에 서 있던 한지석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우선경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눈만 깜빡거렸다.
김 박사와 배 집사는 영문도 모른 채 서로 눈치만 살폈다. 어딘가 고장 난 듯한 반응에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표정을 너무 못 숨긴다니까.
이유를 아는 한지석만 유일하게 웃고 있었다.
“도련님, 저분.”
배 집사는 뒤늦게 한지석을 알아보았다.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선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얼빠져 있던 표정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정신을 챙긴 우선경은 곧장 걸음을 내디뎠다. 한지석 앞으로 다가가 추궁하듯 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아르바이트하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그쪽이 하는데요?”
“오늘 오기로 한 알파가 내 동깁니다. 아파서 쓰러지기 직전인데 곧 죽어도 여길 와야 한다고 하길래. 병원 보내고 제가 대신 온 겁니다.”
“뭐라고요?”
황당해서 웃음이 날 지경이다. 이 와중에 한지석의 설명은 충분히 설득력 있어 더 짜증이 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필이면 왜.
“하아….”
선경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를 짚었다. 답답한 한숨과 함께 오른손이 앞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었다. 거친 손길에 복잡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선경이 눈을 치켜떴다. 한지석을 쳐다보는 눈빛은 상당히 매서웠다.
“뭘 하는지 알고나 왔어요?”
“설마 모르고 왔겠습니까.”
“진짜로 하겠다는 건 아니죠?”
“못할 건 없죠. 이미 준비까지 다 끝냈는데. 혹시 안 할 거라면 빨리 결정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나도 아까운 시간 허비하고 싶지는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