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서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다들 우선경을 바라보며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지 말지 선택하는 건 이제 온전히 우선경의 몫이 되었다.
아무리 준비하는 데 시간이 들고 여러 사람이 고생을 했어도 우선경이 싫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 자리에서 바로 접고 철수해야 했다.
후우, 땅이 꺼지도록 숨을 뱉은 선경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숨죽이며 상황을 지켜보던 김 박사와 눈이 마주치자 그에게 손짓했다.
“박사님, 잠깐만 저랑 얘기 좀 하시죠.”
선경은 김 박사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본 김 박사가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저 사람 우성 알파인거 알아요?”
“제가 그걸 모를 리 있나요, 그래서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선경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속 시원히 설명하지 못하는 게 본인도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다.
김 박사는 눈썹 앞머리를 삐쭉 들어 올렸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잘생긴 우성 알파를 섭외해서 좋아할 줄 알았건만, 왜 도리어 죽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경의 하얀 손이 김 박사가 입고 있는 카키색 카디건 자락을 움켜잡았다. 큰 결심을 한 듯 입술을 한번 꽉 말아 물었다.
“즈 사르미 그 알프에으.”
“…예?”
“그띄 그 페르믄. 즈 사름이라그!”
어금니를 꽉 물고 입술을 거의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형편없는 복화술 실력에 듣는 사람은 도통 해석할 수가 없었다. 예? 뭐라구요? 안 들려요. 김 박사는 몇 번이나 되물었다.
답답해서 발을 한번 쾅! 내리찍은 선경은 복화술을 포기했다. 다 내려놓고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저 사람 페로몬이라구요, 내가 흥분했었던 게.”
“아!”
그제야 김 박사는 짧게 탄성을 질렀다.
한국대, 우성 알파!
그게 쟤야? 눈짓하니 우선경이 재주 좋게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군지 죽어도 밝힐 수 없다는 황소고집 때문에 그 당시 알파의 신상은 김 박사도 알지 못했다.
그저 학교에서 만난 20대, 우성 알파라는 것 정도였다.
“와, 세상 참 좁군요. 아니 그러게 미리 좀 얘기해 주셨으면 좀 좋아요?”
“제 잘못은 충분히 알겠으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나 얘기해 주세요.”
“으음….”
김 박사는 고심하듯 목을 낮게 울렸다. 가늘게 뜬 눈으로 한지석을 바라보며 대책을 강구하는 중이다.
“일단 어떤 점을 걱정하는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좋은 쪽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쪽?”
“지금까지 반응들을 봤을 때 우선경 씨는 알파 페로몬에 꽤 높은 역치를 가지고 있다는 게 제 소견입니다. 하지만 예전의 그 경험 때문에 계속 불안감을 느끼는 거잖아요. 이번에 또 한 번 겪어 보면 확실해지지 않겠습니까? 그저 우연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라면 그사이 치료를 받았던 효과로 괜찮아졌을 수도 있고요.”
“또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죠.”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뭐가 됐든지 한 번쯤은 확인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운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같은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우리 모두 생각 못 했잖아요. 이건 기회라고요.”
선경은 눈을 내리깔고 바짝 마른 입술을 이로 씹었다. 그의 말에는 동의하지만 복잡한 심경은 나아지지 않았다.
“만약에 제가 또….”
“옆방에서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을 겁니다. 위험한 상황이 오기 전에 나서서 제지할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동안 해 보셔서 잘 아시잖아요. 위험할 것 없습니다.”
“…….”
“정 그렇게 불안하시다면 미리 억제제를 처방해드리도록 하죠. 효과가 나타나는 데는 삼십 분 정도 걸릴 텐데 괜찮겠습니까?”
억제제 이야기가 나오자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선경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 볼게요.”
“좋습니다, 현주 씨. 프로몬 아스테이트 5mg 준비해 줘. 지금 바로 드실 수 있게.”
“네, 박사님.”
지시가 떨어지자 담당 간호사가 자물쇠가 걸린 캐비닛을 열고 약을 꺼냈다. 잠시 후 억제제가 은색 트레이에 담겨 전달됐다.
선경은 집게손가락 한 마디만 한 크기의 알약을 집어 들었다.
혀 위에 올려놓고 물과 함께 삼켰다. 그새 녹은 알약의 씁쓸한 맛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우선경은 혀를 입천장에 비비며 일부러 맛을 느꼈다.
억제제는 이제 고작 식도를 넘어가고 있을 텐데도 신기하게 마음이 든든해진다.
***
어김없이 테이블 위엔 타이머가 올라왔다.
원래대로라면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지루하게 쳐다보고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에 마땅히 눈 둘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단둘만 남은 서재는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마저 들릴 것처럼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지난번과 달리 작정하고 풀어놓는 한지석의 페로몬은 우선경을 잡아먹을 듯 몸에 감겨왔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버틸 만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선경은 손목에 채워진 심박수 측정기가 자신을 구해 줄 응급구조 버튼이라도 되는 양 쉼 없이 만지작거렸다.
“서재, 구경해 봐도 됩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선경은 퍼뜩 어깨를 떨었다.
너무 놀란 티를 내서 민망해질 정도다. 하지만 한지석은 무던한 표정으로 허락을 기다릴 뿐 조금도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입술이 벌어졌지만 대답은 쉽게 나오질 않았다.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한지석은 대뜸 일어나 뒤에 있는 책장으로 걸어갔다.
선경은 그제야 경직되어 있던 상체에 힘을 풀었다.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서재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케케묵은 고서적부터 최근 발간된 신작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증조부 때부터 모아오기 시작했다던데 그 양이 워낙 방대해 따로 책 관리를 하는 사서 직원을 둘 정도였다. 도서관과 달리 섹션을 나누진 않았지만 나름의 규칙에 따라 정리되어 있었다.
한지석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서재를 둘러봤다. 바닥부터 천장 아래까지 책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거대한 책장은 한눈에 봐도 압도적이었다. 흥미 가득한 시선이 꽂혀 있는 책들을 꼼꼼하게 훑었다.
그가 서재를 구경하는 동안, 선경은 남몰래 한지석의 모습을 관찰했다.
길게 뻗은 남자의 뒷모습은 마치 본인이 이 서재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공간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양손을 바지 주머니 안에 찔러 넣은 탓에 한지석의 검은 슬랙스는 팽팽히 당겨져 있었다. 길게 뻗은 다리 선을 따라 보기 좋게 올라붙은 엉덩이와 단단한 허벅지가 자연스럽게 모양을 드러냈다.
와, 다리가… 운동하나? 넋 놓고 보던 선경은 제 생각에 놀라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천천히 이동하던 한지석은 어느 한 곳에서 멈춰 섰다. 고전 소설을 모아둔 곳이었다.
그의 시선이 책 한 권에 오래 닿았다. 신기한 듯 쳐다보더니 손을 뻗어 책등을 조심스레 쓸었다. 그는 한참이나 그 앞에 머물러 있었다.
보다 못한 우선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장 앞으로 걸어가 한지석의 시선이 내내 꽂혀 있던 두툼한 책을 대신 꺼냈다.
녹색의 양장 책은 낡고 헤지다 못해 겉엔 하얀 주름이 잡혀 있었다. 1919년에 나온 헤르만 헤세의 소설 초판본이었다.
“책은 보라고 있는 거예요.”
“소장하는 건 줄 알았어요.”
“여기 있는 것 중에 아끼는 건 없어요. 어릴 때 보고 낙서도 해놨는데요, 뭐.”
한지석은 조심스럽게 표지를 넘겼다. 과연 함부로 다뤘다는 말답게 첫 페이지 제목 아래 빈 공란엔 색연필로 낙서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삐뚤빼뚤한 게 도형 같아 보이기도 하고, 글자 같기도 했다. 딱 어린애의 작품이었다.
“어릴 때부터 서재에 자주 왔었나 보죠?”
“주로 여기서 놀았어요. 낮잠도 자고, 공부도 하고. 따로 놀이방이 있었지만 서재가 제일 마음 편했던 거 같아요. 아마도 여기서 나는 냄새가 좋았던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이해해요, 나도 책 냄새 좋아해서.”
나란히 옆에 서자 페로몬이 한층 진하게 맡아졌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향기는 어느새 몸에 자늑자늑 감겨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체감되는 진한 페로몬에 선경은 뒷걸음질 쳤다.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리다 가까이 있던 긴 소파에 걸터앉았다.
책장에 등을 기대고 페이지를 한 장 두 장 넘겨보던 한지석이 넌지시 물었다.
“아까 듣기로는 오늘이 치료 마지막이라고 하던데.”
“네.”
“해 보니까 효과는 좀 있었나요?”
“글쎄요.”
선경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나도 내 몸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섣불리 대답할 수 있겠는가.
툭, 툭. 소파 아래로 떨어진 발끝이 규칙적으로 바닥을 걷어찼다.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어 뭉툭한 소리만 났다.
무언가 고민하던 선경이 한참 만에 입을 뗐다.
“그때… 화장실에서 나한테 했던 말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