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한지석은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곧게 뻗은 눈썹이 으쓱 올라간다. 진득한 시선이 우선경을 내려다보며 무슨 말인지 되묻고 있었다.
양손을 다리 사이에 모은 채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선경은 바닥을 향해 긴 한숨을 내뱉었다.
더 이상 자존심 내세워서 무엇 하겠는가, 결심한 듯 허리를 곧추세우고 한지석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런 일 한두 번 겪는 거 아니라고 했었죠.”
“…….”
“한지석 씨 때문에 히트 사이클 온 오메가가 여럿 있었어요?”
음…, 한지석은 낮게 목을 울렸다. 이런 말을 꺼내도 될지 고심하는 듯 굳게 닫힌 입술을 문질렀다.
“없진 않았죠.”
“그때 했던 대처 방법은 경험으로 터득한 거죠? 그럼 혹시 미리 막을 방법 같은 것도 알고 있나요?”
“페로몬에 흥분되는 걸 막는 방법을 얘기하는 겁니까?”
우선경은 바로 그거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분명히 그때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았잖아요. 그 좁은 곳에서 흥분한 오메가와 함께 있는데, 페로몬이 막 흘러나오는데도 한지석 씨는 멀쩡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기대하는 답변이 아니라서 미안하지만, 비결이랄 건 없어요. 아마도 타고난 체질 때문이겠죠. 그냥 내가 남들보다 페로몬 자극에 무딘 것뿐이니까.”
한지석은 자신이 우성 알파라서 페로몬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돌려 말했다. 내심 노하우를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던 선경은 답변이 맘에 안 드는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실망감이 역력한 얼굴을 내려다보던 한지석은 옅게 웃었다.
“한 가지 덧붙여 말하자면, 나도 그날 멀쩡하진 않았어요. 그렇게 보이도록 안간힘을 쓰며 참은 겁니다.”
흥분한 우성 오메가를 마주친 건 그 역시 처음이었다. 좁은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페로몬이 자극적일 줄은 몰랐다.
만약 우선경이 단순히 흥분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말로 히트 사이클까지 일으켰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끝까지 자제할 수 있었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누가 봐도 멀쩡하던데. 괜히 없는 말 지어낼 필요 없어요.”
“우선경 씨는 아직도 본인 페로몬이 어떤지 객관적으로 판단이 잘 안 서나 보죠?”
“내 페로몬이 뭐가요.”
“…대체 아는 게 뭐예요?”
한지석은 혀를 쯧쯧 차며 다가왔다. 옆자리에 앉아 우선경이 알아둬야 할 그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기 시작했다.
네 페로몬이 알파에게 어떤 자극을 주는지, 보통의 알파들은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그럴 경우 대처하는 방식까지 꼼꼼하게 읊었다.
거의 잔소리나 다름없었다.
“…말 되게 많네.”
선경은 귀찮은 듯 얼굴을 돌렸다. 입술이 달싹거리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그 말을 들었는지 한지석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한번 큰일이 나 봐야 정신 차리는 편인가 보죠?”
“그래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잖아요. 사고 안 치려고 무던히 신경 쓰는 거 안 보여요?”
선경은 보란 듯 손목에 채워진 심박수 측정기를 흔들었다. 너랑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 이 또한 나의 노력 중 하나다. 라는 의미였다.
“발현한 지 삼 개월밖에 안 됐다고요, 나도 매일이 살얼음판이에요. 몸이 변했다는 건 아는데 그걸 체감하는 건 아직 적응이 안 된다고요.”
“뭐가 제일 힘든데요?”
“…….”
“제일 힘든 거 하나만 얘기해 봐요.”
한지석은 너그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고 팔짱까지 낀 자세가 무척 편안해 보였다.
그 여유로움에 휩쓸렸던 걸까. 우선경은 본인도 모르게 제가 가지고 있던 걱정들을 그 앞에서 털어놓았다.
오메가로 발현되면서 불확실해진 미래, 할아버지의 제안과 엄격한 계승 조건. 베타와 오메가 형질 사이에서 겪는 불편함과 괴리감까지.
하나가 둘이 되고, 결국엔 구구절절한 고민들까지 털어놨다.
한지석은 끝까지 경청했고, 간간이 자신의 생각을 보탰다.
그는 꽤 괜찮은 상담가였다. 와중에 페로몬을 붓는 것까지 맡은 바 임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덥다….’
한참 대화를 이어 가던 우선경은 손으로 부채질하다 탁자에 놔둔 타이머를 확인했다.
벌써 한 시간 이십 분이 지났다. 몸이 점점 나른하게 풀리는 게 억제제의 약효가 제대로 돌고 있는 듯했다.
억제제 덕분인지, 아니면 지금껏 페로몬 치료를 해왔던 효과가 나타나는 건지 가까이에서 한지석의 페로몬을 뒤집어써도 흥분되진 않았다. 다만 좀 더울 뿐이다.
날이 많이 따뜻해지긴 했지. 선경은 고개를 돌려 창가를 내다봤다. 페로몬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고자 서재의 모든 창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그때 우선경을 빤히 보고 있던 한지석이 물었다.
“얼굴 빨간 거 알아요?”
“…더워서 그래요.”
“열나는 건 아니고?”
그의 말을 듣고 손등으로 뺨을 문질러 봤다. 손도 얼굴도 따뜻해서 별반 차이가 느껴지질 않는다. 잘 모르겠다고, 선경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좀 봐봐요.”
한지석은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가까이 몸을 숙였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진다. 큰 손이 다가와 이마를 짚었다.
너무 가까운데.
얼굴 앞까지 다가온 상체를 밀어내야 했지만 이마를 만지는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기분이 좋았다.
시원해서 계속 만져 줬으면 싶었다.
이마를 더듬던 손이 미지근해지더니 머리 위에선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선경 씨, 지금 몸이 뜨거운데.”
“괜찮, 아요. 참을 수 있어요.”
괜찮다고 어깃장을 놓는 우선경은 말투가 점점 느슨해졌다. 그와 동시에 침샘을 자극하는 촉촉한 냄새가 물씬 뭉겼다. 자제력이 풀리면서 슬슬 페로몬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억제제의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심박수도 정상이었고 우선경은 흥분하지도 않았다.
다만 축축 늘어지는 상태가 마치 술에 취한 것과 비슷했다.
선경은 몽롱해진 채로 앞에 보이는 알파에게 몸을 기댔다. 맞닿은 가슴이 들썩거린다. 한지석이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우선경 씨.”
“네에.”
“정신 차려요, 나중에 또 후회하지 말고.”
“…….”
한지석은 페로몬을 순식간에 거둬 갔다. 그리고 제게 기댄 우선경을 떼어냈다.
그 단호한 행동에 섭섭함이 밀려왔다. 정말로 취한 사람처럼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냄새 조금만 맡게 해 주면 안 돼요?”
“안 돼요.”
“왜 안 되는데?”
“말했잖아요. 내가 못 버틴다고.”
그는 장난스레 콧잔등을 구겼다. 양손으론 우선경의 팔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혹여나 세게 쥐면 아플까 봐 적당히 힘을 주는 데 그게 더 고달팠다.
띠리링-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스피커폰이 울렸다. 선경이 전화기를 바라보자 한지석은 눈치껏 손을 풀어 주었다.
버튼을 누르자 김 박사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페로몬 수치가 높아졌는데, 별일 없습니까.
“…….”
-우선경 씨, 괜찮으세요? 들어갈까요?
“삼십 분에 들어오세요.”
버튼에서 손을 떼자 전화는 끊겼다.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만 교환했다.
“오 분만.”
삼십 분이 되기까지 딱 오 분이 남았다.
“오 분만 맡게 해 줘요.”
“…….”
응?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커다란 눈망울로 애타게 말한다.
한지석은 감히 그 부탁을 거절할 요령이 없었다. 결국 손에 힘을 풀고 우선경의 팔을 놔주었다. 자유로워진 몸이 순식간에 다가와 안겼다.
약 기운에 젖은 탓에 말투와 몸짓 모두 느긋했다. 솔직함까지 더해져 행동이 더할 나위 없이 과감해졌다.
부탁대로 페로몬을 조금 풀어 주자, 우선경은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진득한 향기가 폐부까지 단번에 스며들었다. 전신에 황홀감이 깃드는 것만 같았다.
한지석의 뒷목에 감겨 있던 손이 목깃 아래로 내려가 셔츠 위를 훑었다.
한 겹 옷감에 덮인 조각 같은 등 근육이 예민하게 움찔거렸다.
냄새를 핥아 먹듯 콧날과 입술을 비비고 문질렀다. 터져 나오는 나른한 한숨에는 선경의 페로몬 또한 진하게 배어 있었다.
한지석은 위험을 감지한 듯 선경의 골반을 붙들었다. 오 분은커녕 지금 당장 떼어내야 할 판이었다.
“우선경 씨.”
그때 선경이 한지석의 목을 깨물었다. 길게 뻗은 목빗근 주위로 선명한 잇자국이 새겨졌다. 그리고 통증이 사라지기도 전에 물컹하고 축축한 것이 닿았다.
“지금 뭐…!”
한지석의 만류에도 선경은 바짝 달라붙어 그의 목을 핥았다. 작은 혀가 둥그렇게 난 치열의 흔적을 정성껏 핥고 비빈다.
그 간지럽고 노골적인 촉감에 한지석은 주먹을 움켜쥐고 숨을 삼켰다. 허벅지가 단숨에 팽팽해졌다.
“우선경 씨, 잠깐. 잠깐만요!”
“아직, 오 분 안 됐잖아요.”
“당장 비켜요.”
왼쪽으로 치우쳐진 성기가 발기하며 그 윤곽을 드러냈다. 바지 위로 불룩 솟아오른 것이 우선경의 허벅지 밑에 닿았다. 그렇게 도드라지니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흥분했어요?”
“젠장, 우선경. 나오라고.”
“정말로 내 페로몬에 흥분하는구나.”
페로몬과 억제제에 동시에 취한 우선경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엉덩이가 좀 더 깊이 내려앉았다. 허벅지가 밀착되며 한지석의 다리를 문질렀다. 단단해진 성기는 더욱 존재감을 키웠다. 우선경은 한지석의 어깨를 잡고 살살 허리를 흔들었다.
젠장, 지석은 고개를 소파 뒤로 젖히고 욕설을 내뱉었다.
잇자국이 난 목에는 굵은 핏대가 섰다. 말없이 어금니를 악물더니 그대로 우선경을 소파로 밀어붙였다.
긴 소파 위에 누운 몸이 한데 엉켰다. 체취인지 페로몬인지 모를 냄새를 정신없이 들이마시며 서로의 몸을 쓰다듬었다.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페로몬에 우선경은 거의 혼절할 듯 몸을 늘어뜨렸다.
그 순간, 서재의 곁문이 벌컥 열리며 의료진들이 뛰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