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32화 (32/127)

#32

그날 새벽 첫 히트 사이클이 터졌다.

예정대로라면 한 달 뒤에 시작되었어야 했다. 아마도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선경의 호르몬 주기에 영향을 끼친 게 분명했다.

처음으로 겪어 본 발정기는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 머릿속이 온통 성욕으로 들끓었다.

꼿꼿하게 선 성기는 무슨 짓을 해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옷이 피부에 닿는 느낌조차 성감으로 느껴져 고통스럽기만 했다.

안쪽 깊은 곳이 뜨겁고 간질거렸다. 불덩어리를 삼킨 듯 몸이 달아 참을 수가 없었다. 뭐라도 쑤셔 넣어 줬으면, 애타는 마음에 엎드려 엉덩이를 높게 치켜들었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부풀어 오른 젖꼭지를 빳빳한 침대 시트에 비비고, 흠뻑 젖어 있는 구멍 주변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투명하고 끈적거리는 애액이 엉덩이골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선경의 하얀 허벅지와 시트까지 흥건하게 적셨다. 민감해진 몸은 끊임없이 음심을 부추겼다.

다행히 의료팀이 집에 상주하고 있던 탓에 예고 없이 터진 히트 사이클에도 즉각적인 대처가 이뤄졌다. 그날 선경은 독한 진정제를 맞고 잠든 와중에 몇 번이고 발기하고 혼자 사정했다.

그렇게 사흘을 앓았다.

침대에서 겨우 벗어났을 땐 몸무게가 4kg이나 빠져 있었다.

남아 있던 젖살까지 쏙 빠져 가뜩이나 예민해 보이는 얼굴은 더 차갑고 날렵하게 변했다.

발현 때와 달리 발정기가 끝난 직후는 놀랍도록 몸이 가벼웠다. 오히려 개운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일상으로 복귀한 선경은 다른 일은 다 제쳐놓고 김 박사부터 찾아갔다.

“소견서 써 주세요.”

다짜고짜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 소견서를 부탁했다.

이로써 우선경이 겪는 증상은 확실해졌다. 한지석의 페로몬에만 유달리 자극을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한지석 이외에도 영향을 주는 제삼자가 나타날 순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가 가장 유력한 요인이었다.

A4용지에 우선경이 겪는 증상과 문제점들이 조목조목 나열됐다. 마지막엔 ‘해당 알파의 페로몬에 지속적인 노출이 필요함.’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의사 직인이 쾅, 찍히자 선경은 소견서를 챙기고 미련 없이 병원을 떠났다.

그리고 한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르는 번호라 안 받는 것인지 몇 번을 걸어도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우선경입니다, 늦어도 괜찮으니 꼭 연락 부탁합니다.]

그에게 짤막한 문자를 남겨놓은 뒤, 차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대시보드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드르륵, 진동을 울렸다. 액정 위에 한지석의 이름이 뜨는 걸 보고 서둘러 핸드폰을 집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실제보다 더 낮게 들리는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무슨 일입니까.

“잠깐 만났으면 해서요. 할 얘기가 있어요.”

-문자로 하면 안 되는 얘기입니까?

“네.”

하아, 상대방이 대답 대신 길게 숨을 뱉었다. 긴 한숨에는 성가셔하는 티가 역력했다.

선경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초조함에 입술 각질이 다 해지고, 피가 번졌다.

-솔직히 말하면 우선경 씨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오늘은 계속 일정이 있어서 바쁩니다.

“제가 학교로 갈게요. 잠깐이면 돼요.”

-학교로 와도 한참 기다려야 될지 모릅니다. 우선경 씨를 위해서 시간 못 빼는데, 그래도 기다릴 수 있겠어요?

“…상관없어요.”

잠시의 침묵이 지났다. 한지석은 귀찮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통보하듯 말했다.

-정 그렇다면 알려 주는 곳으로 와요. 만날 시간은 장담 못 합니다. 오래 걸린다 싶으면 알아서 돌아가요.

잠시 뒤, 법학도서관 307호실. 이라고 적힌 문자가 날아왔다.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선경은 핸드폰을 대시보드 위로 내던졌다. 통화 내내 절실함이 가득했던 태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운전석 헤드 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채 각질이 벗겨져 피 맛이 나는 아랫입술을 쭉쭉 빨았다.

한참 기다려야 된다고? 자신을 바람맞히겠다는 의도가 벌써부터 읽혔다. 알면서도 당해 줘야 하는 상황이라 우선경 역시 짜증이 솟구쳤다.

“해보겠다 이거지? 나도 각오하고 나왔다고.”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 죄 없는 한지석 욕을 진탕 퍼부은 뒤 기어를 당겼다. 잠잠하게 대기하던 컨버터블은 성난 배기음을 울리며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로스쿨 건물은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두 번째 방문이라 그런 걸까, 우선경은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법학도서관은 로스쿨 건물에 부속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그곳까지 찾아가는 것도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우선경은 처음 보는 출입통제 게이트에 가로막혀 잠시 머뭇거렸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학생증을 태그하는 것을 보고 똑같이 따라 해 봤다. 다행히 한국대 학생이라면 모두 이용할 수 있는지 앞을 막고 있던 아크릴판이 자동으로 열린다. 이게 뭐라고, 큰일을 해낸 것처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대리석으로 뒤덮인 웅장한 로비를 지나 촘촘히 연결된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오가는 사람은 많은데, 도서관이라 그런지 사위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3층으로 올라가자 그나마 조금 더 활기가 느껴졌다.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가볍게 수다를 떨었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모습도 흔히 보였다. 자판기가 있는 휴게실 앞은 특히 북적거렸고, 간혹 이어붙인 의자에 드러누워 쪽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307호 앞에 도착했다.

선경의 시야에 [다목적실-장기 사용 중]이라고 적힌 푯말이 들어왔다.

괜히 긴장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조심스럽게 문을 노크하려던 순간, 닫혀 있던 문이 안쪽에서 벌컥 열렸다.

“엄마앗! 깜짝이야! 누구세요?”

밖으로 나오려던 여자가 주먹을 쥔 선경을 보며 놀라 소리쳤다. 그녀의 소스라치는 반응에 우선경 역시 당황하고 말았다. 목소리가 떠듬떠듬 기어 나왔다.

“아… 여기 혹시 한지석 씨 있나요?”

“네? 지석이 오빠요?”

여자는 놀란 가슴에 손을 얹고 문밖에 선 우선경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건 뭐야, 또 한지석 쫓아다니는 오메가인가? 은테 안경에 가려진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여기 공부하는 곳이에요. 이렇게 찾아오시면 곤란해요.”

“죄송합니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안에 한지석 씨 있으면 좀 불러 주실 수….”

“아이참, 안 된다니까요.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아는 사이예요? 그러면 직접 연락을 하시든가요.”

여자는 완강했다. 힐난하는 말투는 이미 그를 한지석을 쫓아 도서관까지 잠입한 스토커로 대하고 있었다.

“왜? 누군데 그래.”

“아니 오메가인 거 같은데, 와서 지석 오빠 있냐고 찾잖아.”

“또야? 요새 좀 잠잠하다 했다.”

스터디 룸 내부도 어수선해졌다. 안에서 공부에 열중하던 이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 쪽으로 다가가 말을 보탰다. 언뜻 살펴봤지만, 그 무리에 한지석은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연락해 보겠습니다.”

부끄러움과 굴욕감이 덮쳐왔다. 당황한 선경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황급히 인사하고 자리를 피하려던 때, 뒤늦게 무리에 합류한 최정훈이 밖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고맙게도 그는 우선경을 단번에 알아봤다.

“어?! 잠깐만요! 그, 맞죠?”

“아, 안녕하세요.”

“와, 세상에 어떻게 여기서 만나지? 무슨 일이에요? 한지석 보러 왔다구요?!”

황급히 문을 열고 나온 최정훈은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고 우선경의 손을 덥석 잡았다. 환하게 웃으며 펄쩍펄쩍 뛰는 모습이 기분 좋은 대형견을 보는 듯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와요.”

그는 선경의 손을 붙잡고 스터디 룸 안으로 데려갔다. 안에 있는 의자 중 가장 푹신하고 좋은 놈을 골라 가져오더니 우선경을 앉혔다.

그 열의가 어찌나 대단한지 선경은 거절도 못 하고 속절없이 끌려다녔다.

“학교엔 무슨 일로 왔어요? 아니 그보다 몸은 좀 어때요?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은 건가? 얼굴은 많이 좋아졌어요!”

질문이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우선경을 병약한 오메가로 믿고 있던 최정훈은 이 우연한 만남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며칠 전 한지석이 자신 대신 성북동에 다녀온 이후 이렇다 할 후일담을 들려주지 않아 몹시 궁금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렇게 건강해진 모습으로 찾아온 것을 보면 아무래도 치료 효과가 좋았던 것 같다.

“저 밖에서 기다릴게요. 여기서 다 같이 공부하시는 건 줄 모르고.”

“아니에요, 신경 쓸 것 없어요. 아까 그건 한지석 스토커가 찾아온 줄 알고 그랬던 거지 나쁜 의도는 없었을 거예요. 그치, 유라야?”

최정훈이 슬쩍 묻자,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던 여자가 퍼뜩 손을 들었다. 안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기다리던 중이었다.

“네! 그럼요!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우린 괜찮으니까 편하게 계세요! 아, 마실 것 좀 드릴게요.”

“아, 저 괜찮….”

대답도 듣지 않고 최정훈은 캐비닛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에너지 드링크와 정체가 불분명한 건강 즙, 박스째 사놓은 커피 티백과 홍삼 팩 같은 게 가득했다. 최정훈은 그중 비타민 음료를 챙겨 잽싸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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