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그런데 지석이를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걔 오늘 수업 연강으로 있을 텐데?”
“네. 여기서 기다리라고….”
“아니, 뭐 만날 시간도 안 정해 두고 그랬다고요? 그럴 놈이 아닐 텐데… 잠시만요. 제가 한번 연락해 볼게요.”
최정훈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수업 중인 걸 고려해서 문자를 보냈다.
[언제 오냐, 새꺄.]
간단하게 적어 보낸 것과 동시에 한지석의 자리에서 다르륵,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기가 휴대전화를 대신 집어 들었다.
“어? 지석이 형 왜 핸드폰 두고 갔지?”
“…….”
놔두고 다닐 만큼 정신이 없거나, 아니면 일부러 두고 갔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선경은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았다. 눈을 크게 뜨고 한지석의 자리를 살폈다.
덮여 있는 책과 노트, 가지런하게 정리된 필기구, 충전기가 연결돼 있는 노트북까지. 책상 위엔 주인을 기다리는 소지품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적어도 제 짐은 여기 전부 두고 갔으니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밤을 새우는 한이 있어도 꼭 만나고 가리라 결심했다.
강의가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어느새 밖은 깜깜하게 해가 졌다. 우선경이 이곳에서 기다린 지도 얼추 다섯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스터디 룸에 남아 공부하던 사람들은 눈치를 보느라 좌불안석이었다. 기다림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되레 저들이 곤란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동기 중 하나는 한지석을 찾아보겠다며 슬쩍 자리를 떠났고, 최정훈은 안절부절못하며 우선경의 얼굴을 연신 확인했다.
이런 불편한 기류 속에서 우선경은 한결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선을 살짝 내리깐 채 그저 묵묵히 제 발끝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앞으로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얼마든지 더 기다릴 생각이다.
딸깍.
그때, 문고리가 돌아갔다.
방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아아, 왔다! 누군가가 안도하듯 중얼거렸다.
“형!”
“왜 다들 안 가고 남아 있….”
문을 열고 들어온 지석이 늦은 시간까지 북적거리는 스터디 룸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얼마 안 가 그 가운데 당당히 자리 잡은 우선경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에서 단번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벽에 붙은 시계를 흘낏 쳐다본 한지석의 양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는 다리를 뻗어 곧장 우선경에게 걸어갔다. 의자에서 일어나 차분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선경의 팔을 우악스럽게 낚아챘다.
“잠깐만, 아파요. 손 좀 놓고 얘기해요.”
찡그리는 우선경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내리꽂히는 시선은 절로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지석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물었다.
“지금 몇 신 줄 알아요?”
왼쪽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다시 고개를 든 선경은 조금 지친 듯, 맥없이 대꾸했다.
“9시 반이네요.”
“내가 분명히 오래 걸린다 싶으면 알아서 돌아가라고 했을 텐데요.”
“제 기준에선 기다릴 만했어요.”
“얼굴 꼴을 보고 그런 말을 하든가! 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미련하게 사서 고생을…!”
욱한 마음에 속엣말을 쏟아붓던 한지석은 돌연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이곳엔 눈과 귀가 너무 많았다. 지석은 허공을 노려보며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손에 쥔 마른 팔목을 단단히 붙들고 스터디 룸을 빠져나왔다.
불이 꺼진 빈 강의실에 우선경을 밀어 넣고 문을 잠갔다. 달깍, 버튼 누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선경은 지친 몸을 책상에 기댄 채 조용히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윤곽만 어렴풋이 드러나는 어두운 강의실 안엔 희미한 불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어둠과 빛이 오묘하게 뒤섞인 상태에서 숨을 몰아쉬는 한지석의 옆모습이 선경의 두 눈에 깊이 새겨졌다.
유려한 이목구비에 그림자가 지며 더욱 진한 굴곡을 만들어 냈다. 마치 조각처럼 이어지는 얼굴선을 눈으로 덧그리던 선경은 실없이 웃었다. 이 와중에도 감상하는 버릇을 못 버린 자신이 퍽 한심했다.
“나 일부러 피한 거 맞죠? 바람맞히려고 핸드폰도 놓고 돌아다녔어요?”
“알면서 왜 묻습니까? 적당히 기다리다 갈 줄 알았는데, 완전히 잘못 생각했네요.”
한지석은 열 맞춰 놓인 빈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긴 다리가 성의 없이 바닥을 디뎠다.
상체가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고, 반팔 티셔츠 소매 아래로 뻗어 나온 팔목이 책상 모서리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명암 진 얼굴이 선경을 향해 까딱 고갯짓했다.
“뭡니까, 굳이 와서 해야 된다는 말이.”
“그날, 히트 사이클 온 거 알아요?”
한지석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얘기 들었습니다. 설마 사과받자고 이러는 건 아니겠고.”
“한지석 씨가 사과할 일 아니죠. 애초부터 무리하게 달려들었던 건 나였으니까. 오히려 그쪽에게 민폐를 끼친 거 알아요. 그날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그 얘기는 서로 불편할 테니 꺼내지 않는 게 좋겠네요. 그래서, 할 말이 뭡니까.”
선경은 준비해 온 봉투를 한지석에게 건넸다.
“오늘 병원에서 받은 소견서예요.”
“…….”
[상기 알파의 페로몬에 과민 반응을 나타냄. 지속적인 노출로 저항력을 높이는 방법을 추천함.]
소견서 뒷장엔 그동안 선경이 페로몬 치료를 받았던 횟수와 파트너들과의 반응 수치가 짤막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엔 한지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밋밋하게 이어지다 마지막에 치솟는 그래프는 누가 봐도 차이가 극명해 보였다.
선경이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힘든 부탁을 꺼내야 할 타이밍이다.
최대한 공손하게, 눈을 곱게 내리깔고 말했다.
“지금 그쪽이…. 한지석 씨가 필요해요. 내가 페로몬 반응에 익숙해질 때까지 옆에서 좀 도와줘요.”
“지난번처럼 페로몬 샤워를 해 달라는 겁니까?”
한지석의 안광이 시퍼렇게 번뜩였다. 제정신이에요? 되묻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히트 사이클이 일찍 찾아올 정도로 버거워했는데 그걸 또 해 달라고?”
“해야 해요.”
“돌아가요. 못 들은 거로 해 줄 테니까.”
대화할 마음이 사라진 한지석이 책상에서 엉덩이를 뗐다.
어둠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그의 하얀 티셔츠가 유령처럼 부유했다. 놀란 선경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진심으로 거절하는 겁니다.”
“나 정말 심각하다구요!”
“다른 사람 찾아봐요.”
단호한 거절에도 선경은 포기할 줄 몰랐다. 문가로 걸어가는 한지석을 따라가 붙잡고, 그의 팔에 매달리고, 사정했다.
“소견서 못 봤어요? 한지석 씨한테만 반응한다잖아요. 지금 당신이 유일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찾아요!”
“다른 알파에게도 반응할 수 있죠. 유일하다는 얘기를 꺼내기엔 아직 우선경 씨가 많은 알파를 만나 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 사정 알면서도 그래요?!”
조용한 강의실에 선경의 간절한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럼에도 한지석은 요지부동이었다.
“비용은 충분히 지불할게요. 얼마를 불러도 상관없어요.”
“재벌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아쉽게도 살면서 돈 걱정해 본 적 없어서요.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
“할 얘기는 이게 끝이죠? 그만 나가죠.”
그의 뜻은 완강했다. 도저히 설득이 불가능할 것 같아 눈앞이 아득해져 갔다.
한지석이 잠긴 문고리를 붙잡자 선경은 문과 한지석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체면도 버리고 그가 나가지 못하도록 강의실 문을 등으로 가로막았다.
선경은 다시 한번 한지석의 옷을 붙잡고 거의 빌듯이 소리쳤다.
“왜 안 되는지 이유라도 말해 보든가요! 뭘 어떻게 해 줘야 날 도와줄 건데요.”
“내가 우선경 씨 도와줄 의무라도 있습니까? 나는 그냥 더는 그쪽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뭐든지 들어줄게요. 한지석 씨가 하라는 건 다 할 테니까….”
쾅!
문을 내리치는 소음에 선경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참다못해 주먹으로 강의실 문을 내리친 한지석이 선경을 내려다봤다. 팔 아래 가두고 호흡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가 말했다.
“내가 뭘 해 달라고 할 줄 알고 그렇게 덤비는데.”
낮게 깔린 목소리는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고 있었다.
“자자고 하면 다리라도 벌려 줄 겁니까? 우선경 씨, 내가 만만해요? 그렇게 겪고 나서도 페로몬 묻혀 달라는 말이 쉽게 나오냐고! 대체 날 뭘 믿고,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함부로 그런 소릴 하는데.”
“…자 줄 순 없어요.”
솔직하게 대답하자 한지석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 쳤다.
“정말 겁대가리가 없네. 내가 페로몬으로 그쪽 정신 못 차리게 만들어 놓고 일 저지르면, 당신 감당할 수 있어? 날 몇 번이나 봤다고 그렇게 믿어요?”
“믿어요, 그래서 그쪽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한지석 씨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선을 지킬 거란 거 아니까.”
“…….”
“내가 믿는 건 법관이 되려는 한지석 씨예요. 내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알파는 당신이 유일하다고.”
판사를 꿈꾸는 한지석이라면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의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유혹을 참아 내고, 인내할 것이다.
똑똑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목표가 확실한 남자.
그래서 이 사람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만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한지석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영악하네, 중얼거리는 소리가 선경의 귀에도 생생히 들려왔다.
한지석은 그와 거리를 살짝 벌리며 말했다.
“돈 많다면서. 걱정되면 경호원 고용해서 24시간 옆에 붙여 놓든가 해요. 그쪽 말대로 나는 내 장래가 우선인 사람이라 다른 데 신경 쓸 시간이 없거든.”
“…….”
“알았으면 우리 더 이상 엮이지 맙시다, 우선경 씨.”
큰 손이 선경의 어깨를 붙잡고 옆으로 치워냈다. 버티려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선경의 몸이 속절없이 밀려나자 한지석은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잘그락, 잠가 놓은 쇠고리는 너무도 쉽게 돌아간다.
작게 바람이 일더니 등 뒤로 문이 쾅, 닫혔다.
“…나쁜 자식.”
혼자 남은 우선경은 허탈함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