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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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에 있는 S 호텔 한식당은 할아버지가 특히 좋아하시는 곳이라 종종 찾았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리셉션을 지키고 있던 직원이 우선경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곧이어 준비된 별실로 안내했다.
한 달에 한 번, 우 회장은 가족들을 모두 불러 밥을 먹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가족 모임 같지만, 실제로는 할아버지에게 지난 한 달간의 행적을 보고하고 평가받는 자리였다.
사고를 친 놈은 신랄하게 까였고, 잘한 놈은 눈도장을 찍혔다. 그러니 아무리 현생이 바쁘고 힘들더라도 절대 빠질 수 없었다.
한식당은 시원하게 뚫린 통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다. 23층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아득한 전경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해가 산자락을 넘어가자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노을 지는 모습은 한식당이 자랑하는 절경이었고,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애써 찾아오는 손님도 있다지만 하도 많이 본 우선경에겐 식상하게만 느껴졌다.
똑똑.
별실 앞에 도착하자 직원이 대신 노크를 해 주고,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전통 문양이 새겨진 미닫이문이 부드럽게 열리자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가장 상석엔 늘 그렇듯 우 회장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양옆으로 한쪽엔 고모가, 반대쪽엔 재경과 선우가 척을 지듯 앉았다.
가볍게 시작한 식전주가 무색하게 분위기는 날이 바짝 서 있다. 이것이 과연 가족 식사 자리인지, 기업가들의 정찬 모임인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다.
이 중 유일하게 학생 신분인 우선경만 표정이 홀가분했다. 가장 마지막에 도착했어도 죄송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그저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가 앉을 뿐이다.
고모 우정화가 이 모습을 지켜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삐쭉 끌어 올렸다.
“왔니?”
“안녕하세요.”
“선경이 너 정말 독하다. 어쩜 기어코 한 번을 안 빠지고 참석하니? 세상에…. 오메가 발현한 지 얼마나 됐다고 겁도 없이 돌아다녀. 페로몬은? 그거 제대로 다룰 줄은 알아? 너 잘못하다 알파들 꼬여 험한 꼴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거 집안 망신이야.”
“역시 제 걱정 해 주시는 건 고모밖에 없네요.”
선경은 시비를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고모의 안부 인사는 늘 그렇듯 거침없고 공격적이다.
하루 이틀 겪는 일이 아니다 보니 이까짓 말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한 귀로 듣고 흘리면 됐다.
마지막 손님까지 도착하자,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됐다. 직원들이 정성껏 날라 주는 진수성찬들이 하얀 천이 덮인 테이블 위로 먹음직스럽게 깔렸다.
“선경아.”
따뜻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아 내고 있는데, 우 회장이 그를 느긋하게 불렀다.
선경은 바로 수건을 내려놓고 할아버지가 계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네, 할아버지.”
“배 집사에게 얘기 들었다. 요즘 페로몬 치료 받고 있다고?”
“어머, 너 그런 것도 하니? 거봐요, 아버지. 제가 뭐랬어요. 뒤늦게 발현된 애들은 관리가 특히 어렵다니까요? 선경이 저렇게 혼자 돌아다니는 거 너무 위험한 거예요. 학교가 다 뭐야! 그냥 빨리 좋은 집안 물색해서 알파랑 결혼시키는 게-.”
선경이 대답하기도 전에 고모가 먼저 끼어들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쌓였던 말들을 우르르 쏟아 냈다.
그녀를 막은 건 우 회장이었다. 조용히 왼손을 들었을 뿐인데, 우정화의 성토가 중간에서 딱 멈췄다.
제 차례를 기다리던 선경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학교에 많은 사람이 모이니까, 조심해서 나쁠 것 없겠더라고요, 김 박사님께 상의했더니 치료를 제안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무사히 끝냈습니다.”
“잘했다, 조금이라도 걸리는 게 있으면 바로잡아야지. 배 집사도 같은 얘기를 해 주더구나.”
숨기거나 거짓을 말해선 안 된다. 어차피 할아버지 사람인 배 집사가 모든 것을 보고했을 것이다.
선경은 긴장된 표정을 숨기며 기계적으로 숟가락을 휘저었다. 고소하고 달큼한 냄새를 풍기는 묽은 밤 수프가 그릇 안에서 물결쳤지만, 식욕은 돌지 않았다.
“재경이는 출국이 언제라고 그랬지?”
“다음 달 17일이요.”
우재경은 양손에 들고 있던 식기를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얼굴 가득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막힘없이 대답한다.
현재 진행 상태와 출국 후 계획까지 술술 풀어놓는 게, 마치 질문이 올 것을 알고 대비한 사람 같았다.
현재 본사 전략기획실에서 근무 중인 재경은 얼마 전 미국에 남동부에 있는 해외 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 가서 관리자 역할로 실무 경험을 쌓고 올 계획이다. 물론 이 또한 할아버지의 뜻이었다.
한 3년 구르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면 아마도 차질 없이 임원 자리를 보장받을 것이다. 전무 혹은 부사장급의 직책 정도가 되지 않을까. 서화 그룹의 차기 경영자로서 꽤 괜찮은 행보였다.
우 회장이 오른쪽에 놓인 연회색의 도기 잔을 슬쩍 매만졌다. 재경이 눈치 빠르게 술을 채웠다. 주름진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재경이야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다만, 그쪽 놈들 한국 사람 깔보기로 유명하니 특히 더 잘해야 할 거다. 책잡힐 일 없도록 늘 신경 쓰고.”
“네, 유념하겠습니다.”
우 회장이 반주를 들이켜자 이번엔 고모가 나섰다.
한 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잘라 낸 갈빗살을 우 회장의 접시에 옮겨 주며 살뜰하게 수발을 들었다.
“재경이가 미국 가면 본사에 우리 집안사람 한 명도 없는 거 아니에요?”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렇다고 회사를 뺏기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아버지, 저희 도경이 이번에 졸업 학기잖아요. 공부 마치면 한국으로 들어오게 하려고요.”
뜬금없이 구도경의 이름이 언급됐다.
“벌써 그렇게 됐나? 걔가 올해 몇 살이었지?”
“스물다섯이요. 재경이보다 한 살 아래예요.”
아니나 다를까, 이때다 싶어 제 아들을 대화 흐름 속에 끼워 넣는다. 빤히 보이는 속셈에 재경은 고개를 돌리며 냉소를 지었다.
우 회장 역시 그 뜻을 알면서 모른 척 물었다.
“한국으로 들어오면 정화 네가 일 가르치려고?”
“저도 그러고 싶은데, 걔는 아무래도 유통 쪽보단 본사 일이 맞지 않나 싶어요. 마침 재경이 주재원으로 나가면 전략기획실 자리도 빌 테고. 이참에 조금 일찍 들어오라고 해서 도경이 일 배우게 하면 어떨까요?”
“으음.”
“엄연히 우씨 집안 사람이고, 심지어 귀한 알파인데 썩히기 너무 아깝잖아요. 지금부터라도 본사에 잘 박아 두면 나중에 재경이가 돌아와 자리 잡을 때도 힘 실어 주지 않겠어요?”
“도경이 형 성 갈았어요?”
구씨 집안 사람 아닌가? 대화를 듣던 선경이 중얼거렸다.
선우가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웃음 참기에 실패하고 어깨를 떨었다. 재경도 테이블 아래로 숨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면전이 고모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지만, 선경은 모른 척 무시했다. 포크로 탱글탱글한 새우를 찍는 동작이 점잖기만 했다.
우 회장은 못 들은 척 술잔을 다시 한번 꺾었다.
“그 문제는 아직 상의하기에 이른 것 같구나. 나중에 도경이 놈 귀국하면 데리고 와 보거라. 그때 다시 얘기해 보자.”
“네, 아버지.”
이후로도 대화 주제는 다양하게 옮겨 갔다. 고모가 하고 있는 백화점의 사업 부진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고, 우선우가 최근 제작하고 있는 드라마도 화두에 올랐다. 감독의 이름을 들은 우 회장은 투자에 제법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식사가 얼추 마무리되어 갈 때쯤이었다.
똑똑.
미닫이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총지배인이 들어왔다. 그가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회장님, 만나 뵙길 청하는 분이 계십니다.”
“누구?”
“서화 건설 장건주 대표님이십니다.”
“장 대표가? 어서 들어오라고 해!”
우 회장은 반색했다. 의자를 뒤로 밀어붙이며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 상체를 들썩였다. 마침 문이 한 번 더 열리고, 밖에서 기다리던 장건주가 별실 안으로 들어섰다.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그냥 갈 수가 있어야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여전히 강녕하시네요. 신수가 더 밝아지셨습니다.”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 잘 지냈는가.”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저야 늘 무탈합니다. 아, 가족 식사 중이셨군요?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계시네요.”
장건주는 가족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고모 우정화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선우와 재경과도 스스럼없이 안부를 물었다. 40대 초반의 젊은 CEO는 친화력이 남달랐다.
인사는 돌고 돌아 우선경의 차례까지 왔다. 어느새 크고 두꺼운 손이 가슴 앞으로 불쑥 다가와 있었다. 장 대표가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에 보네. 작년 여름에 보고 처음인가?”
“안녕하세요.”
“선경이는 거의 변한 게 없구나. 예전이랑 똑같네.”
여상한 말투였다. 하지만 손을 마주 잡자 가까워진 장 대표에게서 묵직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 이 사람 우성 알파였지. 장건주의 형질이 뒤늦게 생각났다. 선경은 급하게 손을 뺐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장건주는 선경이 한지석 이외에 처음으로 만나는 우성 알파였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절로 신경 줄이 곤두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