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지금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할아버지와 고모의 시선까지 부담으로 다가왔다.
실수하면 안 된다. 정신 바짝 차리자.
순식간에 입 안이 메말랐다. 선경은 평상시대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긴장이 몰려와서 그런지 숨조차 편히 쉬어지질 않았다.
장건주는 분명 자신이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거다. 하지만 페로몬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시하듯 진하게 퍼트렸다.
“이거 아무한테나 안 주는 건데.”
그가 입고 있던 정장 재킷에서 얇은 머니 클립을 꺼냈다. 까맣게 윤기가 도는 가죽 지갑 안에서 빳빳한 명함 하나가 뽑혀 나온다.
서화 그룹 로고가 음각으로 새겨진 고급 명함지엔 장건주의 개인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아저씨 회사에 한번 놀러 와. 맛있는 거 사 줄게.”
“어머 장 대표님, 나는 용돈이라도 주는 줄 알았잖아.”
“우 사장님, 선경이 이제 다 큰 성인인데 용돈 주면 남들이 이상하게 봐요. 그치?”
장 대표는 빙긋 웃으며 동의를 구했다. 우선경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그의 손에 억지로 명함을 쥐여 줬다.
“진짜, 진짜 비싼 거로 사 줄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떠는 모습에 우 회장이 재미있는 짓을 한다며 껄껄 웃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할아버지에게 장단을 맞췄다.
“…….”
우선경만 홀로 웃지 못했다. 누가 봐도 불편해 보이는 표정으로 손바닥 안에서 겉도는 명함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그것을 본 장 대표는 웃으며 팔을 뻗었다.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랑한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힘이 들어간 손끝이 연한 귓바퀴와 귓불을 뭉근하게 어루만졌다. 장난 같아 보이는 손길이었지만 선경은 하얗게 얼어붙었다.
장건주가 보내는 성적인 시그널이 분명하게 전달됐다.
***
[한 번만 더 고려해 주세요. 요구하시는 건 뭐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 우선경]
[섹스만 빼고요. - 우선경]
주말 아침, 연달아 온 두 개의 메시지를 심란하게 바라보며 지석은 길게 한숨을 뱉었다.
오늘따라 집중이 안 돼 카페로 나왔건만 한 시간이 넘도록 같은 페이지만 보고 있다. 정신은 온통 우선경이 보낸 문자에만 쏠려 있었다.
재벌가 도련님은 의외로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센 성격이라 매몰차게 거절하면 분명히 떨어져 나갈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질기게 붙어 있었다.
아직도 자존심이 남아 있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절실한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이 와중에도 섹스는 안 된다고 똑 부러지게 조건 다는 건 칭찬해 줘야 하나?
아니, 그보다 정말 뭘 믿고 겁도 없이 이런 부탁을 하는지 모를 노릇이다. 정말로 자신을 무성욕자 혹은 부처쯤으로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법관이 되려는 자는 오메가에게 성욕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러기엔 지난번 경험해 봐서 알 텐데….
“…….”
한지석은 머리를 저었다. 그만 생각하자. 우선경과 자신은 서로 피하는 게 상책이다.
다시 책에 집중하는데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책을 덮었다. 어차피 오늘은 공부하기 그른 듯싶으니 다른 생산성 있는 걸 하자 싶었다.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고 상체를 느긋하게 뒤로 젖혔다. 잠시 고민하던 지석은 핸드폰을 들었다.
저장된 연락처를 찾아 눌렀다. 신호음이 짧게 이어지더니 금세 전화가 연결됐다. 스피커 너머로 중년의 남성이 지석의 이름을 반갑게 불렀다.
“네, 원장님. 잘 지내셨죠? 오늘 보육원 들를까 하구요. 아마 두 시쯤… 도착할 거 같아요. 현진이한테도 전해 주세요.”
천사원은 한지석이 고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봉사를 다니던 곳이다.
그 인연은 벌써 8년째 계속됐다. 최근에는 로스쿨에 들어가면서 방문하는 주기가 길어졌지만 그래도 짬이 날 때마다 최대한 와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보육원은 늘 형편이 빠듯했다. 정부에서 받는 지원은 한정적이었고, 보살피는 아이들은 많았다.
어려운 경기 속에 사회 복지 시설에 대한 후원마저 점차 줄어 가는 추세라, 50여 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천사원은 부족함에 허덕여야 했다.
지어진 지 20년도 더 된 낡고 허름한 시설은 군데군데 손볼 곳투성이였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돌볼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기에 지석은 천사원에 들를 때마다 필요한 생필품과 간식거리, 수리에 필요한 자원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갔다.
지석이 모는 차가 메마른 흙바닥에 들어섰다.
운동장에서 한참 공을 차고 놀던 아이들이 낯익은 번호판을 보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형! 혀엉!”
“야, 니들 제대로 인사 안 해? 지금 나 말고 먹을 거에 더 반가워하는 거지?”
“와! 피자다!”
운전석에서 내린 한지석이 환하게 웃으며 뒷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 안에선 뜨끈한 피자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우리 줘! 우리가 들게!”
“무거우니까 조심해서 들고 가.”
애가 달아 뒤꿈치를 들고 발을 동동거리는 꼬맹이들에게 피자 박스를 통째로 넘겼다. 다행히 오는 길에 식지는 않았는지 종이 박스는 여전히 뜨끈뜨끈했다.
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을 합쳐 저들 머리보다 높게 올라온 피자 상자들을 보물단지 이듯이 받쳐 들었다. 행여나 쏟아질까 게걸음 하며 조심스럽게 들고 갔다.
벌새 같은 아이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마르고 왜소한 체격을 가진 아이가 한 명 남아 있었다.
아이는 피자보다 한지석을 더 기다린 듯 보였다. 트렁크에서 남은 짐을 모두 꺼낸 지석이 먼지 묻은 손을 가볍게 털었다. 픽, 웃으며 자신을 기다려 준 아이의 머리를 장난스레 헝클어트렸다.
“김현진, 왜 같이 안 가고 남아 있어.”
“두 달 만에 오는 게 어딨어! 그렇게 바빠?”
“그럼, 바쁘지. 너 내가 공부하는 거 보면 놀랄걸? 우리 현진이는 꼴통이라 감히 상상도 못 할 거야.”
현진은 입술을 오리 주둥이처럼 삐쭉 내밀며 불만스러운 티를 감추지 않았다. 꼴통이라고 놀리는 것보다 정말 바쁘다는 말에 더 섭섭함을 느꼈다.
그런 마음을 진즉 알고 있었던 지석은 일부러 더 극성스럽게 현진을 괴롭혔다. 어느새 키가 훌쩍 커 자신의 가슴까지 오는 어린애를 끌어안고, 밭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현진은 하지 말라 소리치면서도 깔깔 웃으며 지석의 허리에 매달렸다.
“두 달 만에 보는 건데 우리 현진이는 여전히 쪼그맣네. 넌 좀 많이 먹어야 해. 중학생 키가 이게 뭐냐? 몸도 비쩍 말라 가지고.”
“…안 크는 걸 어떻게 해.”
올해 막 중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또래보다 현저히 작았다. 입이 짧아서일 수도 있고 원래 타고난 체격이 그런 걸 수도 있다.
김현진은 18살 한지석이 천사원에서 처음 만난 아이였다.
그때부터 쭉 후원을 해 오며 동생처럼 키웠다.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따로 공부도 가르쳐 봤지만, 안타깝게도 현진은 학업 쪽으론 영 소질이 없었다. 이후론 가르치길 포기하고 농구나 축구, 레슬링같이 몸 쓰는 방식으로 놀아 주곤 했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부터도 유독 작긴 했다.
하지만 큰 눈에 동글동글하고 유순한 이목구비를 가진 탓에 남자아이임에도 작은 체구가 제법 어울렸다.
최근 들어선 사춘기에 접어들었는지 조그맣다, 귀엽다는 말만 나오면 발끈하곤 했다.
저도 남자라고, 볼때마다 지석의 큰 키와 체격을 부러워했다. 형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알파로 발현하면 다 이렇게 되냐는 질문을 수시로 해 댔다.
그래 봤자 아직 수염도 나지 않은 꼬맹이면서. 혼자 생각에 빠져 있던 지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함께 짐을 나르며 옆에 꼭 붙어 따라오던 현진은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 이거 비밀인데.”
“뭔데?”
“있잖아. 나 요즘 냄새 맡는다? 알파랑 오메가 냄새.”
예상치 못한 말에 한지석은 걸음을 멈추고 옆을 돌아봤다. 페로몬을 맡는다니, 발현이라도 할 모양인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원장님도 알고 계셔?”
“응, 얼마 전에 같이 병원 가서 검사도 받았어. 결과는 아직 몰라.”
“넌 뭐가 되고 싶은데?”
현진은 보란 듯 어깨를 쭉 펴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알파지, 동현이가 그러는데 같은 직업을 갖더라도 알파는 진급도 빠르고 돈도 더 준대. 거기다 형처럼 몸도 커지고 힘도 세지고, 아마 머리도 좋아질걸?”
“허무맹랑하네. 어디서 그런 얘길 들었어?”
“부잣집에 입양도 갈 수 있댔어. 우리가 여길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래.”
“…….”
아이가 무심히 내뱉은 비관적인 말엔 차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천사원에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4살에서 18살, 유아와 성장기 청소년들이었다.
본래 유아기가 지나면 입양될 확률이 급격히 줄어든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만 돼도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이차 성징 이후로 알파, 오메가로 발현하는 아이들이 생기면서 뒤늦게 입양되는 사례가 조금씩 늘고 있었다.
가족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일종의 수단으로 아이들을 데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무조건 반대하고 막을 순 없었다. 불법은 아니었으니까. 적법한 절차만 따른다면 누구든지 입양이 가능했다.
아이들은 쉽게 보고 배운다. 특히나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눈치가 유독 빨랐다. 이 녀석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어느 정도 차면 새로운 가족을 만나기란 어렵다는 걸.
김현진의 말처럼 특수 형질로 발현하는 게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지석의 얼굴이 여전히 굳어 있자, 김현진은 분위기를 푼답시고 눈치껏 귀염을 떨었다. 허리를 반쯤 숙이더니 한지석의 손목에 얼굴을 비볐다.
“형 냄새도 맡아진다. 신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