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강아지도 아니고 왜 이렇게 킁킁대. 너 그거 이리 주고 얼른 가서 애들이랑 피자 먹어. 형은 원장님 좀 만나고 갈게.”
지석은 손을 뻗어 김현진의 품에 들려 있던 종이 쇼핑백을 모조리 가져왔다. 그는 턱 끝으로 생활관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아이는 이번에야말로 강아지처럼 낑낑거렸다.
“배 안 고픈데, 나도 옆에 있으면 안 돼?”
“안 돼. 가서 두 조각 먹어. 이따가 가서 확인할 거야. 할당량 안 채우면 오늘 안 놀고 수학 문제집 푼다.”
으익, 싫어! 눈썹을 축 늘어트리고 가엽게 졸라 대던 김현진은 문제집 소리를 듣자마자 지석을 버려두고 포르르 도망갔다.
작달막한 뒷모습이 생활관으로 사라지자 지석은 한숨을 삼키며 미뤄 뒀던 걸음을 재촉했다.
***
“현진이 병원 다녀왔다면서요. 결과는 어떻게 나왔어요?”
원장을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그간 천사원에 생긴 여러 이슈로 원장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베타라고 하더라. 아직 현진이한테는 얘기 안 했어. 그 녀석 생각보다 더 기대하고 있는 터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계속 고심 중이야.”
원장은 주름진 이마를 문지르며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김현진은 검사 결과가 아직 안 나온 줄 알고 있었지만, 이미 병원에 갔던 날 저녁 통지를 받았다. 결과는 의외로 베타였다.
“페로몬을 맡는다면서요. 베타인데 그럴 수가 있어요?”
“지금 당장은 베타이긴 한데 조금의 가능성은 있나 봐. 요즘은 검사 장비가 워낙 발달해서 형질 예측도 가능한데, 오메가가 될 확률 5%가 잡혔어.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좀 더 지켜봐야지. 페로몬은…, 전부 다 맡을 수 있는 건 아니고 우성 형질들 정도만 감지하는 수준이야.”
“그래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네요. 서운해하지 않게 잘 얘기해 주세요. 현진이도 이제 컸으니 설명해 주면 이해할 겁니다. 그것보다 보육원이 철거된다는 건, 대체 무슨 말입니까?”
속 썩이는 얘기가 나오자 원장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굳은살이 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렇게 됐다.”
힘없이 웃어 보이는 모습이 되레 더 처량하게 보였다.
원장은 법원에서 온 우편물을 집어 건넸다. 봉투 안에서 나온 건 하도 읽어 너덜너덜해진 공소장이었다. 한지석이 그것을 받아 내용을 꼼꼼히 확인했다. 읽어 내려갈수록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여기서 애들 돌보기 시작한 지 벌써 20년도 더 된 거 알지? 여기 땅 절반은 임대로 기증받았던 건데 작년에 기증자가 돌아가셨어. 그걸 상속받은 아들이 보육원을 철거하고 여기에 건물을 세우고 싶으시단다. 어쩌겠어. 원래 주인이 돌려 달라고 하는데 방도가 있나.”
“합의는 해 보셨어요? 사용료를 낸다거나 대지를 매입하는 방법도 있잖아요.”
“그 액수가 말도 안 되는 금액이야. 애초부터 협상은 생각하지도 않는 거지. 철거 말고는 답이 없어.”
원장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배를 채운 아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을 열심히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한낮의 더운 바람과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함께 실려 왔다.
한지석 역시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소장을 여러 번 살펴봤지만 걸고 넘어갈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무상 임대였으나 임대 기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고, 말 그대로 주인이 이제 그만 돌려 달라고 하는 것이니 반환해야 했다.
아마 법원 측에 사정을 호소해 봤자 반환 기간을 한두 달 정도 연기해 주는 것에 그칠 것이다.
생각을 곱씹던 한지석은 주름진 미간을 눌러 펴며 물었다.
“지자체 쪽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지원 사업 하고 있는 것 없대요?”
“시설을 이전하려고 해도 마땅한 부지가 없고, 예산도 부족해서 당장은 도와줄 수가 없다네. 그린벨트로 묶여 있는 땅이 있는데 해지되려면 적어도 3년은 기다려야 된다는 거야. 그동안 애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거지. 50명을 한꺼번에 받아 줄 시설은 없으니까. 아마 전국 각지에 있는 보육 시설로 나눠서 보내야 될 거다.”
“…….”
속상한 듯 허공을 향해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원장은 애써 웃어 보이며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했다.
“에휴, 미안하다. 괜히 이런 말 꺼내서 애먼 사람까지 심란하게 만들었네. 걱정 마. 3년 뒤에 다시 모이면 되지. 잠깐 고생하는 것뿐이야.”
앉아서 허리를 숙인 채 골똘히 생각하던 지석은 손에 쥔 고소장을 다시 펼쳤다.
소장에 적혀 있는 숫자들을 여러 번 읽고 머리에 새겨 넣는다. 무언가 결심한 듯 그의 까만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어?”
“부탁할 사람이 한 명 있긴 한데, 일단 한번 얘기를 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원장님 그동안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 어….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런데 누구한테 부탁하려고? 이걸 도와줄 정도의 재력가가 있어?”
원장의 물음에 한지석은 말없이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오전 내내 들여다보던 문자를 다시 불러왔다.
“이 사람이라면 아마 가능할 거예요.”
***
카페에서 만난 우선경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들여다보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한지석 씨.”
“네.”
“혹시 미쳤어요?”
예상치 못한 물음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한지석은 표정을 가다듬고 최대한 진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뭐든지 다 들어줄 수 있다면서요. 이건 어렵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적당한 수준이라는 게 있지, 무슨 대가가 이런 식으로…. 본인 가치가 이 정도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닙니까?”
“내 가치보단 우선경 씨의 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죠.”
“나를 무슨 재벌쯤으로 생각하나 보네요.”
“아니었어요?”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에서 의미를 읽었는지, 선경은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리곤 부연 설명을 보탰다.
“재벌은 우리 할아버지지, 내가 아니라고요. 난 아직 물려받은 것도 없는 일개 학생이고…. 물론 남들보다 더 여유로운 건 맞는데, 당장 융통할 수 있는 재산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군요.”
“서울 시내에 있는 부지 2천 평, 복리 후생 시설을 갖춘 600평짜리 건물. 이걸 삼 주 안에 구해 달라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상황이 급해서 그렇습니다. 정 어렵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죠.”
급하다는 사람치고 한지석은 그다지 간곡하게 부탁하지 않았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해 주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정작 절실한 건 우선경 쪽이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한지석이 만남을 청해 왔을 때 만사를 제쳐놓고 쪼르르 달려 나왔다. 그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 오는데도 차마 자리를 박차고 떠날 수 없었다. 자존심은 상하는데 그만큼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이왕이면 제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영락없이 주변에 도움을 구해야 하는 꼴이 된다.
선경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물었다.
“갑자기 사회 복지사가 되려는 이유가 뭐예요? 원래 이쪽이 적성이었어요?”
“설마요.”
이제껏 여유를 부리던 한지석은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협상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조건이 과하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이건 우선경 씨 개인에게 하는 부탁이라기보다 서화 그룹에 부탁하는 겁니다. 사회적 약자를 지켜 주는 데 힘을 보태 주셨으면 하는 거죠. 대신 나도 우선경 씨가 원하는 만큼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언제는 엮이지 말자더니. 태세 전환이 참 빠르시네요.”
“사실 지금 약간 후회 중이에요. 그러니까 맘 바뀌기 전에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불러 놓고도 한지석은 뻔뻔스럽게 협상의 우위를 지키고 있었다. 선경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초조함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요.”
결국 고민하다 핸드폰을 움켜쥐고 일어났다. 우선경의 얼굴은 어딘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대로 몸을 돌려 카페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내려간다. 한지석은 가만히 앉아서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유리문으로 분리된 별도의 룸 안으로 들어간 우선경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고민이 되는지 팔짱을 낀 채 한자리를 이리저리 맴돌았다.
이윽고 선경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지갑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명함을 하나 찾아냈다.
결연한 표정으로 핸드폰에 명함 속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전화를 걸면서도 안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교차했다.
하지만 장건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선경은 눈을 질끈 감고 그에게 아쉬운 부탁을 해야 했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데는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선경은 자리에 앉자마자 아이스티를 들이켰다. 얼음이 녹아 컵 표면엔 물이 흥건했지만 상관치 않았다. 그의 젖은 손가락을 바라보던 한지석은 조용히 휴지를 건넸다.
선경은 조금 후련해진 얼굴로 말했다.
“일단 알겠어요. 한지석 씨가 제시한 조건은 최대한 맞춰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은 해 뒀으니 확정되면 연락 줄게요.”
“가능할 것 같습니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요. 내가 힘쓸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이해한다는 듯, 한지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손에 묻은 물기를 말끔히 닦아 낸 선경은 휴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떠날 듯한 모습에 지석이 물었다.
“벌써 가요?”
“용건 끝났잖아요. 한지석 씨 귀한 시간 더 뺏을 생각 없어요. 갈게요.”
지난번 로스쿨에서의 일로 앙금이 남은 것인지, 우선경은 쌀쌀맞은 태도를 고수했다.
홀연히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한지석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이상하게 입가에 걸린 웃음이 계속 떠나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