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37화 (37/127)

#37

***

지상 15층짜리 건물 외벽은 켜켜이 쌓인 세월 때문인지 빛이 바래 있었다. 정나미 없고 멋도 없는 회색 콘크리트 건물엔 서화 건설이라는 이름이 크게 박혀 있다.

요즘엔 신사옥을 짓거나 리모델링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던데, 서화 그룹의 모태였던 서화 건설은 창업자의 유지에 따라 여태껏 초창기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다소 칙칙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내부는 그야말로 대기업 특유의 윤택함이 흘러넘쳤다.

특히 대표이사실은 누구의 취향인지 몰라도 돈 처바른 태가 났다.

중후한 색상의 가죽 소파가 푹 내려앉았다. 많고 많은 곳을 놔두고 굳이 옆자리를 꿰차고 앉은 장 대표는 우선경에게 사업 보고서를 건넸다.

10페이지 분량의 서류를 천천히 읽어 볼 동안 장 대표는 소파에 팔을 걸쳤다. 제 옆에 앉아 있는 우선경을 곁눈질로 살피며 넌지시 말을 던졌다.

“회의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그래도 네 부탁이라 다른 것들 다 제쳐 두고 이 건부터 처리한 거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서 결론은요?”

진심이라곤 코빼기도 안 보이는 무미건조한 인사에 장 대표는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는 사업 보고서에 있는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천호동 쪽에 얼마 전 완공된 건물이 있어. 원래는 그룹 연수원으로 사용할 목적이었는데, 당장 급하지는 않아서. 이걸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

“…….”

“결론만 말하자면 사회 복지 차원에서 무상으로 제공할까 해. 기간은 네가 말한 3년이 딱 적당할 것 같고.”

“정말로 괜찮은 거예요? 신축인 거 같은데.”

“손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야지. 겸사겸사 홍보도 하고.”

홍보? 의아한 듯 돌아보는 시선에 장건주는 어깨를 넓게 벌리며 사업 계획서를 툭 두드렸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엔 낡고 허름한 천사원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돕는 만큼 뽑아 먹어야지. 이번에 보도 자료랑 바이럴 광고 쫙 돌릴 생각이야, 써먹기 딱 좋잖아. 귀엽고 불쌍한 아이들과 철거 위기에 빠진 보육원이 새로운 둥지로 이전하는 모습. 스토리 나오지? 안 그래도 홍보 팀과 마케팅 팀이 지금 잔뜩 벼르고 있어. 신축 건물이라 그림도 잘 나올 거야. 이보다 좋은 홍보가 어딨겠어.”

“그렇게까지 벗겨 먹을 생각이래요?”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장 대표는 느긋하게 다리를 꼰 채 살짝 몸을 비틀어 앉았다. 오른손을 등받이 위에 길게 늘어트리고 우선경을 바라봤다.

마치 이때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럼 우리도 계산을 해 볼까?”

“…….”

“내가 도와줬으니 넌 뭘 해 줄 거야.”

집요한 시선이 뺨에 와 박혔다. 선경은 들고 있던 보고서의 커버를 닫고 얌전히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장건주를 돌아보는 얼굴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도움을 청할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라 크게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뭘 해 드려야 만족하시겠어요?”

도발적인 질문에 장 대표는 웃음을 터트렸다.

무릎에 올린 왼손을 쥐었다 펴며 그러게, 뭐가 좋을까, 하고 즐겁게 중얼거렸다.

우선경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건 카페에서 헤어진 지 일주일 만이었다.

[오늘 계약하죠.]

덜렁 메시지 하나를 보내오더니 뒤이어 만날 장소와 시간이 적힌 문자가 하나 더 도착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한지석은 보고 있던 책을 덮고 외출할 준비를 시작했다.

***

메시지에 적혀 있던 주소는 학교와 근접한 초고층 오피스텔이었다.

신축인 데다가 한국대에서 도보로 5분밖에 걸리지 않아 한국대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지만 비싼 월세와 감당하기도 벅찬 관리비 때문에 정작 이곳에서 자취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대신 1층에 있는 카페와 맛집들 문턱만 닳도록 드나들었다.

오피스텔 1602호 안에는 우선경 이외에 2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모두 각 잡힌 정장 차림에 인텔리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삼십 대 후반쯤 돼 보이는 남자들을 옆에 대동하고 있으니 말간 얼굴을 한 우선경은 유독 어리고 설익어 보였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고 타고난 위세가 꺾이는 건 아니다. 사람 부리는 게 익숙한 우선경은 턱짓으로 제 양옆을 보좌하고 있는 남자들을 가리켰다.

“여기는 저희 쪽 고문 변호사님. 오늘 계약 도와주실 겁니다.”

“반갑습니다. 지난번에 한 번 뵀었죠?”

“안녕하세요, 한지석입니다.”

안면이 익숙했던 남자는 성북동 저택에서 만났던 변호사였다. 그는 가늘게 뜬 눈을 찡긋 감으며 한지석에게 알은척을 해 왔다.

“그리고 여기는… 강준일 비서님이라고.”

이번엔 오른편에 선 남자를 가르쳤다. 어쩐지 우선경의 표정이 떨떠름했는데, 본인 역시 남자를 낯설어하는 모양새였다.

소개를 하다 말고 멈추자, 강 비서는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며 한지석에게 묵례했다.

“도련님을 보좌하는 강준일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강 비서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지석입니다.”

비서라는 사람은 변호사와 달리 조금 더 날것의 느낌이 났다.

악수하며 맞잡은 손바닥이 꽤 거칠다. 체격도 듬직해서 어쩐지 비서보다는 경호원이라고 하는 쪽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강 비서의 다부진 얼굴엔 열렬한 의기가 가득했다. 과연 우선경과 상성이 잘 맞을까 싶은 남자였다. 그래서 저렇게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가?

앞머리를 시원하게 넘긴 우선경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한지석과 눈이 마주치자 안 그래도 찡그리고 있던 눈매가 더 사나워졌다.

“못 보던 사이 비서가 생겼네요?”

“…나도 왜인지 모르겠어요.”

“본인이 모르면 어떻게 해요.”

“이건 할아버지가 억지로… 아니, 됐고. 그냥 빨리 시작하죠.”

손을 내젓자 옆에서 대기하던 고문 변호사가 잽싸게 계약서를 준비했다. 만년필과 인주까지 꼼꼼하게 꺼내 놓은 뒤 계약에 관한 조항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보육원 문제는 이미 완공된 연수원 시설을 무상 임대 해 주는 것으로 쉽게 해결됐다.

천사원 아이들과 직원들까지 해서 60여 명만 수용할 수 있으면 된다 하였는데 정원 250여 명의 신축 건물을 지원해 줘 오히려 호화로운 생활을 하게 됐다.

다만 서화 쪽에서 원하는 홍보와 촬영과 관련된 초상권 문제는 따로 협의가 필요해 보였다.

이 점에 대해선 제삼자인 한지석이 가타부타 말을 얹을 수 없어 의사 결정권을 가진 원장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가 좋은 방향으로 결정할 거라 믿고, 한지석은 우선경과의 계약에만 집중했다.

두 사람은 고문 변호사가 동석한 자리에서 계약 조건들을 세세하게 나눠 살폈다.

계약 기간은 6개월.

하루 2시간, 주 3회.

요일 미정. 시간대 미정.

[특이사항]

*계약 기간 중 다른 알파, 오메가를 만나도 상관없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서로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조항을 살펴보던 한지석이 물었다.

“날짜와 시간은 정해 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한지석 씨 공부에 최대한 방해되지 않는 쪽으로 맞춰요.”

“그렇게까지 배려해 줄 줄은 몰랐는데요.”

“나중에 변호사 시험 떨어지면 내 탓이라고 할까 봐 그런 겁니다.”

우선경은 샐쭉 눈을 치켜떴다. 불미스러운 일에 변호사 시험 떨어지는 것도 포함이라며 경고를 날린다.

별걱정을, 한지석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월, 화, 금. 12시부터 2시까지로 하죠.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좋아요. 강도는? 지난번처럼 하면 됩니까?”

“그것보다 더 약하게, 그냥 집에 있을 때처럼 편하게 풀어놓는 거로 하죠. 김 박사님이 얘기하시길 약한 강도로 자주 접하는 게 더 좋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김 박사님은 매번 동석합니까?”

아니요, 이번엔 우선경이 고개를 저었다.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누르더니 마뜩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대신 강 비서가 있을 겁니다.”

“아….”

역시 경호원이었구나. 힐끗 눈짓을 보내자 우선경의 옆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던 강 비서가 해쭉 웃으며 다시 한번 묵례를 해 왔다.

한지석은 수요일을 제외하고 모두 수업이 있었다.

오전, 오후 강의가 빡빡하게 채워진 스케줄이었는데, 그 전후로 비는 시간마저 거의 대부분 도서관이나 스터디 룸에서 공부를 하는 데 사용했다.

약속한 페로몬 치료를 위해 할애해 주는 두 시간은 그의 점심시간 겸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그냥 편하게 와서 쓰세요. 어차피 이 집에 들르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고, 난 잠깐 있다가 가는 정도니까.”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뒤, 우선경은 오피스텔의 출입 키와 비밀번호를 넘겨줬다. 매번 성북동 자택으로 가는 것도 시간 낭비니 페로몬 치료는 학교와 가까운 오피스텔에서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24평쯤 되는 오피스텔은 주변의 원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호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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