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웬만한 가전들은 빌트인되어 있었고, 두 개 있는 방마저 각각 침실과 서재로 완벽히 꾸며 놓은 상태였다.
외국에서 들여온 디자인 가구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곳곳에 달린 조명과 고가의 스탠드, 하물며 벽에 달린 시계와 작은 소품까지도 누군가의 취향에 맞춰 꾸며 놨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우선경의 말대로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짧다 보니 사람 사는 집 특유의 온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당장 광고를 찍어도 될 정도로 잘 꾸며진 세트장 같았다.
그래도 지금 당장 엉덩이를 붙이고 살아도 될 만큼 오피스텔엔 모든 게 갖춰져 있었다. 심지어 냉장고 안에는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간편식들과 제철 과일이 보기 좋게 진열돼 있다.
물론 먹을 사람은 없었다. 며칠 지나 쓰레기로 버려질 게 분명한데도 시각적 만족감을 위해서인지 채워 넣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지석은 이 아까운 오피스텔을 제대로 활용해 주기로 했다. 약속된 시간 동안엔 제집처럼 편안하게 페로몬을 풀었다.
겸사겸사 휴식도 취하고, 보고 싶었던 책도 읽고, 가장 중요한 점심도 해결했다.
처음엔 칼같이 내외하며 거리를 두던 우선경도 시간이 지나자 천천히 물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같이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는 일이 잦아졌고, 가끔 소파에 기대 짧은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두 시간은 아주 잔잔하게 흘러갔다. 처음 페로몬 샤워를 했을 때처럼 자극적인 반응이 나타나지도 않았고, 서로를 과하게 의식하지도 않았다.
단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늘상 강 비서도 함께였다. 오히려 마을을 지키는 정승처럼 거실 한가운데에 우직하게 서 있는 강 비서가 더 의식이 될 정도였다.
“복숭아가 벌써 나오네? 먹을래요?”
물을 꺼내려 냉장고를 열었던 한지석은 군데군데 분홍색으로 물든 복숭아를 집어 들었다.
여름이 되려면 아직 몇 달은 더 있어야 한다.
하지만 철 이른 복숭아는 어찌나 잘 익었는지 아기 엉덩이처럼 모양이 탱글탱글했고 골이 선명하게 파여 있었다. 그저 밖으로 꺼냈을 뿐인데 주변에 향긋한 특유의 냄새가 진동했다.
마침 강 비서와 홈 바에 나란히 앉아 있던 선경은 그 향기에 이끌려 고개를 들었다.
배는 고프지 않은데 이상하게 침이 고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지석은 웃으며 알이 굵은 복숭아를 두어 개 더 꺼냈다.
물에 깨끗이 씻은 과일을 쟁반에 받쳐 아일랜드 홈 바로 가져왔다. 다리가 긴 의자에 걸터앉은 한지석은 날이 바짝 선 과도로 능숙하게 껍질을 깎았다. 어쩌면 벗긴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우선경은 그 모습이 새삼 신기한지 넋 놓고 구경했다.
한지석은 의외로 손재주가 좋다.
저 큰 손으로 과일도 잘 깎고, 요리도 곧잘 한다. 심지어 글씨도 잘 쓰는 걸 보면 손으로 하는 건 대부분 잘하는 것 같았다.
문득 그의 원래 전공이 궁금해졌다.
“한지석 씨.”
“네.”
지석은 복숭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무슨 과 나왔어요?”
“경영학과요.”
“아… 그래요.”
왠지 실망한 듯한 목소리에 지석은 고개도 들지 않고 피식, 웃었다.
어느새 복숭아를 모양 좋게 썰어 낸 지석은 작은 포크로 하나씩 찍어 건넸다.
나이순으로 강 비서 먼저, 그다음은 우선경에게. 사이좋게 나눠 준 뒤 본인은 물티슈로 젖은 손을 닦는다.
“이야, 감사합니다. 엄청 맛있을 거 같은데요?”
강 비서는 거절도 않고 포크를 넙죽 받아 갔다.
커다란 과육을 한입에 삼키더니 우물우물 씹는다. 얼마나 잘 익었는지 강 비서는 미간을 좁히며 황홀한 탄성을 흘렸다.
그 정도인가 싶었던 우선경도 한 입 베어 먹었다. 눈이 댕그랗게 뜨였다. 과연 여태껏 먹어 본 복숭아 중에 제일 달고 맛있었다.
접시는 순식간에 비었다. 저들이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울 동안 한지석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눈치를 살피던 우선경은 조심스럽게 깎지 않은 복숭아를 집어 들었다.
말랑말랑한 털복숭아라 그런지 왠지 저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에 잡히는 알맞은 중량도, 향긋한 냄새도, 향기를 그대로 응축해 놓은 듯한 핑크빛 색감도 마음에 든다. 맛은 두말할 것도 없고.
감상하듯 요리조리 돌려 보고 있는데, 한지석이 식탁 상판 끝에 양손을 올리고 몸을 붙여 왔다.
“깎아 주게요?”
“네.”
당당한 대답에 그를 지켜보던 강 비서가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혔다. 눈빛엔 의심과 불안함이 가득했다.
“아이, 도련님. 하지 마시죠? 분명히 손 다칠 것 같은데.”
“왜요, 해 보라고 해요.”
한지석은 고맙게도 우선경의 편을 들었다.
“우선경 씨가 스무 살인데 설마 과일 하나 못 깎겠… 손! 손 조심해요!”
칼을 든 폼부터가 엉망이었다.
흡사 누구 찌르러 가는 사람처럼 칼 손잡이를 움켜잡은 우선경은 제멋대로 복숭아를 회 쳤다. 껍질과 과육이 숭덩숭덩 같이 잘려 나갔다.
놀란 강 비서가 잽싸게 칼을 뺏었고, 한지석은 서랍 속에서 버터나이프를 꺼내 대신 쥐여 줬다.
한순간에 장비가 바뀐 우선경은 못마땅한 듯 눈살을 구겼다.
“당신들, 되게 자존심 상하게 만드는데?”
“잔말 말고 그걸로 깎아요, 흉악범 씨.”
뭉툭하고 동그스름한 나이프도 나름 칼이라고 칼날 한쪽에 작은 톱니가 있었다. 물론 손을 가져다 대도 안전할 만큼 무딘 날이었다. 선경은 그걸로 다시 껍질을 벗겼다.
나이프와 복숭아 속살, 그리고 우선경의 손가락이 한 몸처럼 뭉그러졌다.
과즙이 손을 적시다 못해 팔뚝까지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아까보단 잘되는지 선경은 집중하며 남은 껍질을 마저 벗겼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한지석은 반대로 되물었다.
“우선경 씨는 왜 그쪽으로 전공을 골랐습니까?”
“원래부터 예술경영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할 생각이었는데, 보시다시피 결격 사유가 생기는 바람에 다 어그러진 거죠.”
“오메가라는 게 결격 사유가 됩니까.”
“적어도 우리 집에선 그래요.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으면 결혼하고 같이 나가라는데 아쉽게도 난 아직 결혼하기엔 이른 나이고, 그렇다고 백수처럼 놀고 있을 순 없으니 그나마 대안으로 찾아 주신 방법이 이거예요. 졸업장 하나 못 따내는 청강생 신분으로 수업을 듣는 거죠. 혹시 내가 지난번에 말해 준 거 기억나요?”
“구설수 없이 공부를 마치면 갤러리를 상속받는다고 했었죠.”
“네, 그 조건까지도 결국엔 다 할아버지가 결정하신 거예요. 아직 입지가 부족한 데다 오메가로 발현까지 해 버려서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 않아요. 학교도, 전공도, 여기 있는 강 비서도, 전부 할아버지 입김이 들어가 있으니까.”
“쉬운 게 없군요.”
선경은 나이프와 홀쭉해진 복숭아씨를 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서투른 칼질이었지만 어느새 접시 위엔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결과물이 담겨 있었다. 모양이 뭉그러진 것을 일부러 큐브처럼 조각내 보기 좋게 만든 것이다.
우선경은 물티슈로 손을 꼼꼼히 닦았다. 손에선 단내가 진동했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 생각이에요. 내 몸도 내 뜻대로 통제할 거고, 갤러리도 무사히 넘겨받을 거고요. 그때쯤 되면 내 입지도 단단해졌을 테니 주도권을 얻을 수 있겠죠.”
선경은 지석이 했던 것처럼 포크로 복숭아를 찍어 내밀었다. 상대는 순순히 포크를 받아 갔다.
“그때까진 최대한 책잡히는 일 없도록 조심할 겁니다. 지금 한지석 씨와 페로몬 나누는 것도 그걸 위한 대비책 중 하나예요. 오메가가 알파 페로몬에 반응하는 것만큼 쉬운 약점은 없으니까, 어디 가서 사고 안 치려고 이렇게 연습하는 겁니다.”
“연습하다가 나랑 사고 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나 보죠? 내 페로몬에 제일 예민하다면서 경계는 하나도 안 하네요.”
“망하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니까요. 한지석 씨야말로 나 건드리고 후폭풍 감당할 수 있겠어요?”
“신세 망치고 싶지 않으면 있는 알아서 참아라, 이겁니까?”
엇험, 듣고 있던 강 비서가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감시하고 있는 한 두 분 사이에서 사고는 절대로 안 일어날 겁니다.”
느닷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브이 자를 그린 손가락으로 자신의 두 눈과 우선경과 한지석을 번갈아 가리킨다. 내가 항상 지켜보고 있겠다, 뭐 그런 의미인 것 같았다.
선경은 다 필요 없다며 양손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물티슈로 암만 닦아도 손이 끈적거리니 차라리 물로 씻을 생각이다. 그가 욕실로 사라지자 한지석은 남은 복숭아를 마저 먹고, 홈 바 위를 정리했다.
주위가 온통 단내투성이였지만, 이 와중에도 상큼하면서 깨끗한 향기가 복숭아 냄새를 뚫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과연 주인을 쏙 닮은 페로몬답다 생각했다.
***
월요일, 화요일, 금요일.
일주일 중 세 번을 만나 한 공간에서 붙어 있는 거로 모자라 페로몬까지 나누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서로의 취향과 사소한 버릇 같은 걸 파악하게 된다.
아무래도 점심시간에 만나다 보니 오피스텔에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한지석 혼자 뻔뻔하게 챙겨 먹다가 강 비서가 합류했고, 이어 우선경까지 못 이기는 척 숟가락을 얹었다.
한지석이 요리를 잘한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냉장고 속 재료로 제법 수준급 요리를 만들어 냈다. 가끔 라면을 끓일 때면 선경은 가장 먼저 식탁에 앉아 젓가락을 들고 대기했다. 혀에 착착 붙는 MSG의 맛은 차마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다.
20년간 우선경에게 건강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여 온 광주댁이 보면 기함할지도 모른다.
물론 사 먹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특히 오피스텔 1층에는 유명 맛집들이 모여 있어 포장해 오기 편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오피스텔에 도착한 한지석은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잠시 고민했다. 혼자서 결정 내리기도 뭐해 우선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점심 골라봐요. 밥/빵]
[밥]
용건만 담긴 짧은 문자에 더 간결한 답장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