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한지석은 웃음을 터트리며 주변 식당을 훑었다.
갈비탕, 순댓국, 돈가스, 김밥집…. 뷔페처럼 다양한 메뉴들이 있었지만, 이 중 우선경이 잘 먹을 것 같아 보이는 곳은 없었다.
밥이라…. 이왕이면 좀 제대로 된 걸 먹이고 싶은데. 중얼거리는 지석의 눈에 마침 적당한 곳이 들어왔다.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식당 문을 밀고 들어갔다.
이제 막 강의가 끝난 선경은 부지런히 짐을 챙기고 있었다.
잠시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드르륵, 몸을 떨었다. 한지석이 뭔가를 보낸 것 같은데, 사진이라 미리 보기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강의실을 나오며 뒤늦게 메시지를 열어 보는데, 강 비서가 양손 가득 비닐봉지를 들고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이게 뭐야.”
몹쓸 것을 본 사람처럼 선경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인간 CCTV이자 경호원 역할을 자처하는 강 비서는 선경의 명령으로 학교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지석과 따로 만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새 점심 메뉴를 골랐는지 손에 든 비닐봉지에 ‘명품 누룽지 삼계탕’이라고 적힌 상호명이 또렷하게 보였다.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는다. 190을 웃도는 장신의 키에 체격까지 좋은 두 남자는 먹성이 대단했고 신기하게 입맛까지 닮았다. 이 분위기에 휩쓸려 잘 먹고 다녔더니 요즘 선경의 얼굴에도 살이 부쩍 올랐다.
12시에 맞춰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진한 닭 국물 냄새가 풍겼다. 이게 뭐라고 여태 멀쩡하던 배 속이 요동치며 허기가 졌다.
어이가 없어 우두커니 서 있자, 한지석이 직접 현관까지 마중을 나왔다.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채였다.
“뭐 해요, 빨리 손 씻고 식탁에 앉아요.”
선경은 홀린 듯 손을 씻고 식탁 앞에 앉았다.
어느새 눈앞엔 딱 먹기 좋게 식은 삼계탕이 차려져 있었다. 소금, 김치도 아담한 종지에 덜어 놓은 게 상차림이 꽤 정갈했다.
“잘… 먹겠습니다.”
점심치고는 좀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챙겨 준 정성이 있으니 맛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선경은 숟가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국물을 한 입 떠먹었다.
적당히 심심하면서 진한 육수가 목구멍으로 후루룩 넘어간다. 찹쌀누룽지 특유의 구수한 맛도 났다. 생각보다 입에 잘 맞아서 눈이 조금 동그랗게 커졌다.
그를 지켜보던 한지석의 얼굴에도 옅게 미소가 번졌다.
“많이 먹어요.”
“맛있게 드십쇼!”
선경의 반응을 확인하고서야 두 남자도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했다. 강 비서는 배가 고팠는지 먹는 속도가 빨랐고, 한지석은 우선경과 비슷하게 속도를 맞춰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때, 바지 속에 넣어 두었던 선경의 핸드폰이 다시 한번 울렸다.
장 대표였다.
[오늘 시간 돼?]
[같이 저녁 먹었으면 하는데.]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촉촉하게 씹히던 닭고기가 지금은 질긴 고무줄처럼 느껴졌다.
우선경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천천히 답장을 적었다. [네.] 짤막한 내용을 보내면서도 어찌나 내키지 않는지 미간엔 작게 홈이 팼다.
장 대표와는 세 번을 만나기로 했다.
뭐 거창하게 데이트라고 부를 만한 건 아니다. 그냥 단순히 밥 먹고 얘기 좀 하다 헤어지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무수히 일어날 수작질을 견뎌 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선경은 조용히 생각을 곱씹었다.
장건주가 자신을 오메가로 대하고 있다는 건 몇 번의 만남으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장 대표는 관심을 애써 숨기지 않았고 그가 보내오는 페로몬은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함부로 선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우 회장의 손자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양반일 테니.
그나마 안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왜 그래요? 맛없어요?”
이후 먹는 둥 마는 둥 하자 한지석이 물었다. 얼굴 기색을 살피는 게 느껴졌지만 선경은 굳은 안색을 풀지 못했다.
“별로 입맛이 없어서, 저 먼저 일어날게요. 신경 쓰지 말고 두 분은 마저 드세요.”
결국 의자를 뒤로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상태론 도저히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아직 두 시가 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다.
식사를 건성으로 마친 선경은 양치를 하고 소파에 기대 누웠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한낮이라 해가 훤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복작복작 몰려다니는 사람들과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이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나 빼고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자조적인 감상이 흘러나왔다.
부피가 큰 쿠션을 여러 개 겹쳐 놓고 그 위에 엎드려 턱을 괴고 있던 선경은 창문에서 그만 시선을 돌렸다. 마침 대각선에 앉아 있던 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다리를 꼰 채 독서 중이었다.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오롯이 활자에 집중하고 있었다.
소설책이라도 보는 건가 싶었는데 언뜻 보이는 책 표지엔 ‘군주론’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저렇게 재밌게 볼 책은 아닌데, 선경은 한지석의 독서 취향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래도 확실히 높은 곳이 어울릴 상이긴 하지.
지적인 분위기와 다부진 체형의 조합은 문무를 겸비했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아마도 과거에 태어났다면 왕의 신임을 얻고,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고관대작 정도는 거뜬히 해 먹었을 거다.
만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순 있었다.
한지석은 누가 보더라도 올곧고 강직한 성품을 가졌다. 자신의 선택엔 늘 망설임이 없었고, 상황 판단이 빨랐다. 머리가 좋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한지석이 판사가 되려 하는 게 이해가 갔다. 본인에게 딱 어울리는 직업이다. 선경의 머릿속에선 고지식한 법복을 입고 판사석에 앉아 있는 모습까지도 상상이 이어졌다.
분명 끈질긴 시선이 느껴질 텐데, 한지석은 흔들림 없이 책만 들여다봤다.
음악도 틀어 놓지 않은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의 손가락은 가끔씩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가 사락사락 넘어가는 소리는 제법 듣기 좋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우선경은 문득 충동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넌지시 지석을 불렀다.
“한지석 씨.”
“네.”
“나한테 페로몬 좀 묻혀 줄 수 있어요?”
뜬금없는 소리에 한지석은 책에서 시선을 떼고 턱 끝을 치켜들었다. 무슨 꿍꿍이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선경을 바라보는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요?”
“내 말은, 조금 더 진하게요. 이왕이면 옷이랑 머리에 흠뻑 배게.”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맡았으면 하거든요.”
“…….”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요. 누구를 만나야 하는데, 좀 피하고 싶은 알파라 그래요.”
한지석은 들고 있던 책을 탁, 소리 나게 접었다. 더 이상 볼 생각은 없는 듯 덮은 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하더니 떠보는 듯한 질문을 던졌다.
“페로몬이 몸에 밸 정도면 상당히 가깝게 붙어 있어야 할 텐데, 감당할 수 있어요?”
“한지석 씨만 괜찮다면, 나는 상관없어요.”
겁 없는 대답에 그는 하, 작게 웃음을 뱉었다.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손을 뻗었다.
“이쪽으로 와요.”
쿠션에 기대 있던 선경은 냉큼 일어나 그 앞으로 다가갔다.
고민할 것도 없이 내민 손을 덥석 붙잡자 한지석이 손목을 쥐고 끌어당겼다. 그의 무릎과 선경의 다리가 거리를 좁히며 바짝 닿았다.
“나한테 올라와 앉아요. 자세는 우선경 씨 편한 대로 하고.”
한지석이 앉아 있는 소파 위로 조심스럽게 다리를 올렸다. 그의 어깨를 잡고 양쪽 무릎을 넓게 벌려 앉았다.
마주 본 자세는 생각보다 어색하진 않았고, 엉덩이 밑에 깔린 허벅지도 단단해서 제법 편했다.
“흥분하면 안 됩니다. 그건 정말 곤란하니까.”
“강 비서가 저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한지석은 가볍게 웃으며 허리 뒤로 손을 감았다. 훨씬 더 안정감이 느껴졌다.
페로몬을 조금 더 진하게 풀었는지 짙게 가라앉은 숲 냄새가 물씬 풍겼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시선이 못내 어색해 선경은 눈을 돌렸다.
“얼굴 보고 있는 건 좀 그렇죠?”
“네.”
“그럼 그냥 어깨에 기대요.”
한지석은 꼿꼿하게 세운 등 위로 손을 올리더니 꾸욱, 힘주어 눌렀다. 버티고 있던 우선경은 그의 품 안에 풀썩 안겼다.
타인의 체온이 맞닿는 느낌은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몸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자 한지석은 긴장을 풀라며 아이를 달래듯이 등을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준비하고 갈 정도면, 누군진 몰라도 정말 피하고 싶은가 보네요.”
“있어요, 나랑 스무 살도 더 차이 나면서 치근덕거리는 인간.”
“양심 없는 사람이네.”
통쾌한 표현에 선경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한지석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 위에 턱을 기댔다.
자세가 한결 편안해지자 긴장도 누그러진다. 진득한 페로몬이 몸을 휘감았지만, 성적인 긴장감보다 아늑함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한지석의 페로몬에 많이 익숙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겠지, 선경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알파의 페로몬이 몸에 배길 기다리며 편안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페로몬을 묻혀 간 효과는 생각보다 더 좋았다.
약속된 장소에서 만난 장 대표는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역한 냄새라도 맡은 듯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