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40화 (40/127)

#40

“여기 오기 전에 누구 만났어? 알파?”

“네.”

“너한테 상당히 관심 있나 보네. 페로몬을 엄청 진하게 묻혀 놨는데, 알고 있어?”

“그런 놈이 어디 한두 명인가요? 지금 누구도 그러고 계시는데.”

정곡을 찌르는 말에 장 대표는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식사는 뻔하고 지루했다. 장 대표는 혼자 주구장창 제 자랑을 늘어놓았다.

관심도 없는 남의 얘기를 듣고 있는 건 고역이었지만, 차라리 귀찮게 질문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분명 맛있어야 할 음식들인데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부드러운 매시트포테이토가 깔끄러운 모래알처럼 입 안에서 겉돌았다.

“잘 못 먹네. 맛없어? 여기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입이 짧아요.”

“다음번엔 밥 말고 술을 마시러 가야겠다.”

“…….”

벌써 다음 만남을 계획하는 말에 그나마 있던 입맛마저 사라졌다. 게다가 술이라니, 속내가 참 투명하지 않은가.

선경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가는 걸 봤는지 장 대표는 눈치 빠르게 설명을 보탰다.

“요즘 자주 나가는 모임이 있어. 삼사십 대 젊은 기업인들끼리 가볍게 친목하는 자리인데, 다들 잘나가는 사람들이라 인맥 만들기 좋을 거야. 가 봐서 마음에 들면 꾸준히 나와도 좋고.”

“알파만 있는 거 아니에요?”

“알파 비율이 높은 편이긴 하지. 그래도 형질에 차별을 두진 않아. 베타들도 많고…. 물론 오메가는 대부분 파트너 자격으로 오긴 하지만. 선경이 네가 가입하면 첫 번째 오메가 회원이 되겠네.”

“파트너….”

장건주는 기분 나쁜 말을 묘하게 돌려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선경은 말끝을 흐리며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어쨌든 다음번엔 장 대표가 원하는 대로 모임에 따라 나가 줘야 할 듯싶었다.

레스토랑을 나오자 밖에는 두 대의 검은 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발레파킹 요원에게서 차 키를 건네받은 장 대표가 당연하게 선경의 팔을 붙잡았다.

“집으로 갈 거지? 데려다줄게.”

“제 차도 기다리고 있어요.”

“따로 보내면 되잖아, 나랑 같이 가.”

이대로 보내긴 아쉬웠는지 재차 함께 탈 것을 권했다. 정말이지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장 대표가 에스코트하듯 허리에 팔을 두르려다 우선경에게서 맡아지는 알파 페로몬에 멈칫거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선경은 한 발자국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다음에 뵐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사를 건넨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장건주는 붙잡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는지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었다.

우선경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지친 듯 한숨을 터트렸다. 고작 몇 시간 같이 있었을 뿐인데 피로감으로 머리가 무지근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강 비서가 허리를 반쯤 돌리며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저녁은 좀 드셨습니까?”

“그냥 뭐 적당히요. 부탁한 건 사 왔죠?”

“네. 지금 드릴게요. 잠시만요.”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은박 포장에 싸인 알약과 생수병이 뒷자리로 넘어왔다.

선경은 소화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쓴맛에 눈살을 찌푸렸다. 까드득, 뚜껑을 돌려 따고 미지근한 물을 들이켜자 목울대가 쉼 없이 꿈틀거렸다.

“병원에 가 보셔야 하는 건 아닙니까? 점심때부터 속 안 좋으셨잖아요.”

“유난 떨 것 없어요. 아파서 그런 거 아니니까.”

“혹시 불편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바로 차 돌리겠습니다.”

차는 천천히 움직이며 큰 도로로 합류했다. 어느새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에 섞여 속도를 내고 있었다.

강 비서는 운전 실력이 좋았다. 마음 놓고 의지할 만큼 승차감이 편안했다.

빽빽한 빌딩 숲이 우거진 서울 시내를 바라보며 선경은 노곤한 몸을 시트에 기댔다.

“저 창문 좀 열게요.”

“아, 네!”

손끝을 더듬어 버튼을 누르자 창문이 끝까지 내려갔다. 움직이는 차 안으로 서늘한 밤공기가 들어찼다.

머리가 엉망으로 흩날리고 바람에 얻어맞는 뺨이 시렸지만 뒤집어쓴 장 대표의 페로몬이 바람에 씻겨 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참을 만했다.

열린 차창 위로 살짝 팔을 포개고 얼굴을 기댔다. 공허한 눈은 빠르게 지나치는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크게 숨을 들이켜자 옷소매에 배어 있던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마치 숲에 온 것 같은, 피곤한 몸을 나른하게 풀어 주는 냄새였다. 우선경은 말없이 코를 더 깊게 묻었다.

***

지도 교수와 면담을 마친 한지석이 스터디 룸으로 넘어왔다. 오랜 대화로 다소 지쳐 보였지만 한편으론 후련한 얼굴이었다.

오전 강의가 취소돼 모처럼 여유가 생겼다. 한지석은 지도 교수와 함께 곧 있을 실무 실습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정을 내려야 했다. 덕분에 면담은 평소보다 한 시간은 더 길게 이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최정훈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지석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대화도 나눌 겸 이른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꼬셨다.

“뭐 먹을래? 오랜만에 밖에 나가서 먹을까?”

“됐어, 학식이나 먹어.”

“하여간 낭만 없어. 그럼 본관으로 가자. 거기 백반 아직도 하나? 얘기하니까 오랜만에 땡기네.”

본관으로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지만 한지석은 그것까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운동 삼아 걸을 수 있어 환영이다.

그렇게 최정훈과 오붓하게 교정을 걸었다. 칙칙한 알파끼리 걷기엔 너무 완벽한 날씨였다.

“오늘 교수님이랑 상담했지? 결국 로펌 가기로 했냐?”

“어.”

“어디로 갈 건지 정했어?”

“태광. 그렇게 불러 대는데 한 번은 가 줘야지.”

“배부른 소리 한다. 거기 인턴 하고 싶은 애들이 쌔고 쌨는데. 야, 친구로서 하는 말인데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고 다니지 마라. 뒤지게 처맞기 싫으면.”

진심이 담긴 충고에 한지석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지? 이 자식, 요새 웃음이 좀 헤프다. 최정훈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한지석을 훑었다.

“너 요즘 뭐 있지?”

“뭐가.”

“요새 중간에 자꾸 사라지잖아. 요 앞 천사의 빛 오피스텔에 자꾸 들락거린다는 소문도 있던데, 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냐?”

“정훈이는 나한테 참 관심이 많네.”

“말 안 해서 그렇지 애들도 다 궁금해해. 지난번에 스터디 룸 사건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그분은 대체 왜 오신 거야? 너 왜 말을 안 해 줘?”

“그분? 아.”

“아아, 로 끝내지 말고 좀 제대로 해명을 해 보라고. 오피스텔도 혹시 그 오메가랑 관련된 거야? 뭐야, 혹시 둘이 연애해?”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말 못 해. 위약금 걸려 있다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계약 이야기를 들먹이자 최정훈은 할 말이 없어졌다.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호되게 당할 수도 있다.

저 역시 계약을 해 본 입장이라 무턱대고 알려 달라 요구할 순 없었다. 정훈은 머쓱한지 콧잔등을 긁었다.

“그럼 그거나 알려 줘. 그분 건강은 어때? 좀 좋아졌어?”

“건강? 어디가 아프대?”

“…눈치 진짜 개가 물어갔다. 너는 타인에게 관심이 전혀 없냐? 세상에 그 가련한 얼굴을 보고도 걱정이 안 되든?”

술병을 불치병이라 단단히 착각한 최정훈이 한지석의 무심함에 대해 성토를 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인문대에서 강의가 끝나는 시간대였는지 사람이 우르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밀물처럼 흘러나오는 인파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지석의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하얀 얼굴은 평소와 똑같이 무심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쩐지 썩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열받아 보였다.

중얼중얼 잔소리를 늘어놓는 최정훈을 놔두고 지석은 방향을 꺾어 인문관으로 내달렸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니 따라잡는 건 순식간이다. 곧장 우선경을 붙들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선경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당황한 나머지 표정 관리도 잊고 커다란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옆에 함께 있던 남자 오메가 역시 느닷없이 등장한 한지석을 보며 헛숨을 삼켰다. 그는 우선경보다 더 놀란 듯 보였다. 주먹으로 벌어진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표정이 안 좋은데.”

“…….”

“뭔데 그래요?”

우선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하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지석은 작게 한숨을 쉬며 뒤돌아섰다. 마찬가지로 벙쪄 있는 최정훈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점심은 다음에 먹자.”

“뭐? 어? 어디 가!”

“나중에 얘기해.”

우선경을 당연하게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며 최정훈은 어안이 벙벙해져 할 말을 잃었다. 자신처럼 넋이 나간 안석현을 보고 뒤늦게 어색한 인사를 했다.

***

“축제요?”

한지석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한 번 더 되물었다. 우선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머그 컵을 집어 들었다.

둘이서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엔 오피스텔만 한 곳이 없었다.

기분이 처져 있는 우선경을 억지로 소파에 앉혀 놓고 그가 곧잘 마시는 밀크티를 만들어 건넸다. 따뜻한 머그잔이 제법 미지근하게 식을 때까지 옆에 앉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표정이 제법 누그러진 우선경은 대뜸 ‘대학교 축제에 참여해 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무슨 주점… 같은 걸 한다던데.”

“학부생 때는 몇 번 했었죠. 그것도 벌써 몇 년 전 일이긴 한데. 그러고 보니 학교에 포스터 붙어 있는 건 봤어요. 곧 축제인가 보죠?”

“신입생은 무조건 필참이래요. 나한테도 꼭 참여하라던데.”

“그게 그렇게 싫었어요? 내키지 않으면 빠져도 되지 않나?”

전후 사정을 모르는 한지석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선경은 푹 인상을 썼다. 머그잔을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돼먹지도 않은 협박을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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