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41화 (41/127)

#41

정확한 사정은 이랬다.

1학년 필수 전공과목인 ‘한국화의 역사와 이해’ 강의가 막 끝났을 때, 어수선한 강의실로 웬 남자가 공지할 것이 있다며 들어왔다.

그는 본인을 4학년 과대 박진상이라고 소개했다.

‘이번 대동제 때 우리 과도 주점 할 건데, 특히 1학년은 반드시 참석이니까 그렇게 알아 둬라. 과 인원 얼마 안 되는 거 알지? 빠지는 새끼들은 나한테 단단히 찍힐 각오 하고.’

뭐야, 지가 뭐라도 돼? 난데없이 등장해 선배랍시고 똥군기를 잡자 강의실 분위기는 급격히 식었다.

반응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챈 박진상은 구석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윤봄을 손가락으로 까딱 불렀다.

‘이 새끼들이 지금 선배가 말하는데 분위기 좆같이 만들래?! 야, 과대, 너 애들 관리 안 하지? 내가 날 잡고 기강 한번 제대로 잡아 줘?’

‘죄송합니다, 선배님. 다시 잘 공지하겠습니다.’

‘하여간 요즘 신입생들은 오냐오냐 커서 예의도 뒤졌고, 눈치도 뒤졌지. 나 때는 선배들 보면 구십 도로 머리 박고 무조건… 어! 거기, 청강생. 잠깐만 스톱! 이리 와 봐.’

남자는 강의실을 나가려는 우선경을 불러 세웠다.

애초부터 학교 행사에 참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분위기도 험악해지는 것 같아 조용히 나가려던 선경은 자신을 콕 짚어 부르는 말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을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저요?’

박진상은 마치 벼르고 있었다는 듯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가까이 다가와선 껄렁하게 짝다리를 짚었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삐딱한 자세로 툭, 말을 던졌다.

‘네, 너요. 어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고 하세요, 그쪽도 포함인데.’

‘저는 참여할 의무가 없는데요.’

‘아나, 이게 지금 장난하나. 그래서 지금 너님만 쏙 빠지시겠다 이겁니까? 원하는 수업만 쏙쏙 골라 듣고, 특혜는 다 받아 가면서 정작 과 행사 때마다 모른 척 내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너같이 돈 좀 있다고 인생 제멋대로 사는 새끼들이야. 그동안은 운 좋게 잘 넘어갔나 본데, 이제부턴 어림도 없어. 알아들어?’

강의실 안 모든 이목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달갑지 않은 관심이 불편했지만, 이런 말을 듣고도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선경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최대한 눌러 삼키며 대꾸했다.

‘특혜인지 정당하게 얻은 대가인지는 제대로 알아보고 와서 따지시죠. 그리고 저 아세요? 왜 반말입니까?’

‘그래 좋아, 한번 해보자 이거지. 이봐요, 거기 예의 좋아하시는 분. 네가 받고 있는 게 특혜 아니면 뭐예요? 정식 입학한 것도 아니고 뒷돈 주고 수업 듣고 있는 놈이 어디서 정당함을 지껄여? 네가 하는 짓이 부정 입학이랑 뭐가 달라. 그렇게 자신 있으면 인터넷에 올려서 공론화해 볼까?’

박진상이 손가락을 치켜들며 우선경을 툭 찔렀다. 힘이 실리진 않았지만, 어깨는 힘없이 뒤로 밀렸다.

‘…….’

‘왜 대답을 못 해, 아까처럼 주절주절 떠들어 봐! 인터넷에 올린다니까 쫄리냐? 거봐, 너도 뒤 구린 짓 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지금 말 못 하는 거 아냐.’

우선경은 말없이 화를 삭였다. 입을 꾹 다물고 최대한 박진상을 안 쳐다보려고 애썼다.

가방끈을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리고, 바닥을 내려다보는 눈매가 굳어갔다. 내가 이런 소리까지 들어가며 참아야 하나. 머릿속으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우선경이 화가 났다는 걸 눈치챈 안석현이 잽싸게 다가와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선경아, 네가 참아, 응?”

달래는 목소리가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특혜도 아니었고, 정당하게 돈을 지불하고 듣는 수업이었지만 아무래도 남들이 보기엔 그리 정상적인 방식은 아닐 것이다. 특히 ‘한국대’가 가진 명문대 이름값이 컸다.

인터넷이나 SNS에 올라간다면 틀림없이 논란이 될 테고, 우선경이 재벌가 자식이라는 것까지 밝혀지게 될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는 99% 우선경이 불리했다.

교수가 시험도 패스시켜 준다더라.

머리가 나빠서 본인 실력으론 절대 입학 못 한다.

학위도 나오지 않는 수업을 들을 이유가 없다.

분명 저러다가 나중엔 졸업장을 받을 것이다.

카더라가 기정사실화되는 건 순식간이다.

‘재벌 특혜’니 ‘서화 그룹 뒷돈 입학’이니 진위도 파악하지 않은 어그로성 기사가 인터넷에 오르내릴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억울하지만 분을 삼켜야 했다. 우선경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참았다.

침묵하는 걸 보고 자신과의 기 싸움에서 진 것으로 생각했는지 박진상은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실실 웃음을 쪼개며 윤봄을 손가락으로 불렀다.

‘야, 과대. 너가 쟤 책임지고 맡아. 준비하는 것부터 주점 운영까지 싹 다 참여시키고 나한테 매일 보고해. 혹시라도 농땡이 치면 그땐 연대 책임 물을 거니까 각오해라.’

‘…….’

‘대답 안 하냐?!’

윤봄은 차마 그러겠다 말하지 못하고 슬슬 눈치만 봤다. 선배가 무서워서라기보다 이 상황이 자칫 잘못돼 큰 논란으로 번질까 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이를 본 선경이 짧게 숨을 내쉬며 윤봄에게 다가갔다.

‘내 번호 갖고 있지?’

‘어? 어….’

‘필요할 때 불러.’

‘고마워.’

윤봄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하필이면 개 같은 선배에게 걸린 우선경에게 못내 미안했고 또 눈치껏 숙여 줘서 다행스러웠다.

이어 박진상은 축제와 관련된 전달 사항과 듣기 싫은 잔소리를 몇 번 더 퍼붓고 나갔다. 그가 머문 건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는데, 강의실 분위기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나온 뒤 한지석을 만난 것이다.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자신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데, 한지석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간 눌러 왔던 분한 마음이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아직도 그렇게 군기 잡는 과가 있나? 그 자식 이름 기억나요?”

“몰라요, 얼굴도 처음 봤는데 이름은 알 게 뭐야. 내가 진짜 화가 나는 건 그 의기양양한 얼굴이 너무 재수 없었다는 거예요. 자기가 이긴 줄 알잖아요.”

“화날 만했네.”

동의하듯 맞장구까지 쳐 주자, 이게 뭐라고 분했던 마음이 좀 풀어진다. 한바탕 화를 쏟아 낸 선경은 지친 몸을 소파에 파묻었다.

게으르게 늘어져 있는 걸 보며 한지석이 물었다.

“그래서, 주점을 하기로 했어요? 앞으로 행사 준비하느라 바빠지겠네?”

“안 그래도 다시 가 봐야 돼요. 모여서 무슨 회의인지 뭔지 한다던데.”

띠링띠링, 쉴 새 없이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윤봄이 보내는 메시지가 연달아 들어오고 있었다.

문자를 확인한 선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학교 안에서 요리를 만들어 판다는데요? 아니, 그걸 뭘 믿고 먹지?”

“사 먹는 사람들도 대단한 기대를 하는 게 아니니까. 어차피 술 마시고 노는 게 주목적이에요.”

역시 경험자라 그런가. 한지석은 주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선경은 핸드폰을 잠시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다소 궁금한 것들이 생겼다.

“한지석 씨는 뭐 했었는데요?”

한지석 역시 편안하게 자세를 바꿨다. 우선경을 따라 소파에 등을 기대고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경영학과도 비슷했죠. 대학생들이 여는 주점이야 다 거기서 거기니까. 가끔 과 특성 살려서 하는 곳도 있었고. 아, 2학년 때 했었던 건 꽤 특이했었던 거 같네요. 위스키 바.”

“경영학과랑 위스키 바가 무슨 상관인데요?”

“성공한 직장인의 상징이라던데.”

가져다 붙이면 다 되는 줄 아나. 선경은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안주도 간단했고, 술도 한두 종류밖에 없어서 어려울 건 없었어요. 고급 라운지 바 컨셉을 잡아서 옷도 블랙으로 깔끔하게 갖춰 입고. 나름 인기 좋았던 거 같은데? 준비는 간단했는데도 매출 많이 올렸을걸요?”

비싼 술은 조금 넣고 달달한 시럽과 탄산수로 채운 탓에 여성들에게 특히나 인기가 좋았다고 했다.

우선경은 까만 셔츠와 바지를 차려입고 긴 바 테이블 너머에서 술을 팔았을 한지석을 떠올려 봤다.

보나 마나 멋있었겠지. 인기가 좋았던 건 위스키가 아니라 틀림없이 이쪽일 거다.

“다들 술이 목적이 아니라 한지석 씨 보러 온 거 아니고요?”

“왜 술이 아니라고 생각하죠? 내가 만든 하이볼 꽤 맛있는데.”

“…….”

“못 믿나 보네.”

한지석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와 봐요, 하고 말을 건넨 그는 우선경을 데리고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찬장을 열어 재료를 꺼내더니 능숙하게 하이볼을 한 잔 만들기 시작했다. 선경은 스툴에 앉아 신기한 듯 구경했다. 어느새 화가 났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

그날 오후. 미술사학과 학생들이 전체 소집됐다.

회의를 위해 모인 인원은 대부분 신입생과 2학년이었다. 3, 4학년은 취업 준비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대부분 불참이었고, 그나마 할 일 없는 이들 몇 명이 구경 삼아 찾아왔다.

2학년 과대가 대표로 앞에 나섰다.

그냥 시작하긴 머쓱한지 마커를 집어 화이트보드에 <미술사학과 대동제 아이디어 회의>라고 큼지막하게 적는다.

글씨체는 크기에 비해 힘이 없고 가늘었다. 영 폼은 안 났지만 그래도 구색을 맞추기엔 나쁘지 않았다.

사람이 얼추 찬 것을 확인한 과대는 회의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중요한 공지 사항부터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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