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42화 (42/127)

#42

“부스 운영은 수, 목, 금 삼 일이구요. 장소는 본관 앞입니다. 아쉽게도 가위바위보에서 졌어요.”

주점의 성공 여부는 부스 위치가 반을 차지한다는 말이 있다.

넓은 잔디 구장은 온갖 축제 부스를 한곳에서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당연히 사람이 많이 몰렸고, 가장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가위바위보에서 패한 과 대표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본관 앞자리를 배정받았다. 이렇게 된 이상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홍보와 컨셉에 사활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2학년 과대는 비장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컨셉은 중세 시대 유럽으로 잡아 봤습니다. 화려함으로 승부하는 거죠.”

“요즘 뭐 로맨스 판타지 읽어요?”

“우리 옆 부스 중문과던데, 걔네 무조건 객잔일 거라고. 치파오 이길 수 있겠냐?”

“난 좋은데? 로코코 스타일 같은 거 화려하고 예쁘잖아!”

“드레스 입었으면 좋겠다!”

싫다는 사람, 좋다는 사람으로 나뉘어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어차피 과 특성을 살려 특별한 이벤트를 여는 것도 아니고 그저 술과 음식을 파는 것뿐이니 시선만 잘 끌면 됐다.

“이견 없으시면 컨셉은 이걸로 확정할게요. 아, 그리고 아시다시피 우리 과는 사람 수가 적어서 일손이 좀 많이 모자라요. 다들 적극적인 협조 좀 부탁드릴게요. 일단 각자 파트부터 나누도록 할 건데요. 오늘 회의에 참석하신 학우님들께 선택 우선권을 드리겠습니다. 다들 생각해 보시고 본인이 잘할 수 있겠다 싶은 파트에 이름 적어 주시면 됩니다.”

클립보드가 앞줄부터 순서대로 돌기 시작했다.

부스 제작, 물류 관리, 의상 및 소품 준비, 회계, 요리, 홀 서빙, 호객 등 영역은 나름 세분화되어 있었다.

신입생들은 처음 경험하는 축제 준비가 재밌는지 그저 들떠 있었고, 눈치 빠르고 짬 좀 찬 2학년들은 꿀 보직에 먼저 이름을 올렸다.

“선경아, 너 뭐 할 거야?”

“으음….”

명단은 돌고 돌아 선경의 차례까지 왔다.

우선경은 볼펜을 손가락에 끼워 넣고 한참 동안 고민했다. 한지석이 만들어 준 하이볼을 마신 탓인지 기분은 적당히 풀어진 상태였다. 덕분에 내키지 않았던 회의에도 불평불만 없이 참여하는 중이다.

“힘쓰는 일엔 자신 없는데.”

그렇다면 부스 디자인 팀이나 물류 팀은 탈락.

요리? 그건 좀 해 보고 싶긴 한데 한지석과 강 비서가 자꾸 소질 없다고 기를 죽여 놓은 탓에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원할 수 있는 게….

“오, 의상 팀? 나도 그거 할래. 옆에 내 이름도 적어 줘!”

빈칸에 이름을 적자 옆에서 구경하던 석현이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졸랐다. 선경은 자신의 이름 옆에 안석현, 세 글자도 적어 넣었다.

뒷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클립보드를 넘겼다. 이것만 끝내면 집에 갈 수 있는 건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기다리고 있는데, 안석현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선경.”

“아, 깜짝이야.”

“너 한지석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

깊게 내리깐 목소리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또렷이 치켜뜬 두 눈에선 반드시 자백을 듣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마저 보였다.

“뭐.”

“모른 척 시치미 뗄 생각 하지 마.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는데. 대체 언제부터 둘이….”

“그런 거 아니야.”

“뭐가.”

“뭐가 됐든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딱 잘라 선을 긋는데도 안석현의 묘한 눈초리는 쉽게 거둬지지 않았다.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인가. 누가 봐도 남다른 사이인 거 같던데.

일단 본인이 아니라고 발뺌하니 오늘은 이만 추궁을 멈추기로 했다. 석현은 허리를 곧게 폈다.

“좋아, 일단 오늘은 넘어가 준다. 하지만 알아 둬. 내가 계속 지켜볼 거야. 나 촉 되게 좋아.”

안석현은 확신했다.

단언컨대, 둘은 뭔 일이 날 것이 분명했다.

축제 준비는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경과 안석현이 속한 의상 소품 팀은 따로 단톡방을 만들어 행사를 준비했다.

주점 당일에 입을 의상과 메뉴판, 홍보물 등을 준비해야 했는데, 마침 같은 파트에 속한 2학년 선배 하나가 본인이 아는 지인이 극단 대표라 의상을 빌려 올 수 있다고 했다.

덕분에 가장 큰 일을 수월하게 끝낼 수 있겠다 싶었다.

분명 그랬는데.

“아니, 이게 옷이 대체….”

“많이 이상해? 이거 힘들게 구한 건데?”

“…화려한 중세 시대 스타일이라며. 이거 고증을 너무 심하게 따른 거 아니에요?”

의상 모델을 자처한 안석현은 남자 귀족의 옷을 입고 있었다. 키가 좀 작을 뿐이지 몸 선이 가늘고 예뻐서 웬만한 옷은 다 잘 어울리는 편이었는데, 예외는 있었나 보다.

하얀 레이스가 달린 퍼프 소매 셔츠에, 뽕이 두둑하게 들어간 호박 바지. 다리 전체를 감싸는 하얀 스타킹 조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지켜보는 이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너도나도 한마디씩 평을 던졌다.

“그래, 이왕 광대가 될 거라면 최고의 광대가 되는 게 낫지.”

“이거 입고 있으면 그날 주점은 우리가 다 씹어 먹겠다.”

“나 저거 버물뤼 광고에서 본 것 같아. 정확히 정체가 뭐야, 요정이야, 왕자야?”

“자꾸 보니까 귀엽네. 어차피 시간도 없어서 다른 옷 못 구하잖아. 그냥 이걸로 하자. 알아서들 입겠지.”

어차피 이 옷을 입는 건 축제 당일 주점을 맡은 애들의 몫이다.

내가 안 입으니까 상관없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극한의 이기주의는 결국 이 광대 옷을 메인 의상으로 결정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고 있던 안석현은 손가락 사이를 빼꼼 벌려 눈을 내밀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앉아 있던 우선경을 찾아 불렀다.

“선경아, 네가 보기엔 어때?”

“완전 최악이야.”

우선경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말해 뭐 하는가, 저건 벌칙 의상이지 옷이 아니었다. 자신까지 말을 얹을 필요가 없어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윤봄이었다. 선경은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곤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기, 선경아. 통화 괜찮아?

“응, 말해.”

-정말 미안한데 그 진상 선배가…, 너 주점에도 나와서 일하라고 해서. 하아, 내가 진짜 내 선에서 막아 보려고 했거든? 그런데 도대체가 말을 들어 처먹질 않는다. 자꾸 너 밟아 주겠다고 대자보니 인터넷이니 헛소리하는데, 미칠 노릇이야.

진상 선배가 누구지? 낯선 이름에 의아해하던 찰나, 윤봄이 설명해 주는 이야기를 듣자 머릿속에 흐리멍덩한 얼굴이 떠올랐다.

하아, 진짜 가지가지 하네.

짜증이 섞인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핸드폰 너머로 윤봄이 “미안해….” 하고 중얼거렸다. 축 가라앉은 목소리에 선경은 애써 기분을 풀었다.

“됐어, 네가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래서 뭘 하면 되는데?”

-서빙. 3교대로 돌아갈 거라 온종일 할 필요는 없고, 오후에만 잠깐 시간 내주면 돼.

“알겠어. 자세한 건 나중에 따로…!”

아, 젠장.

그제야 광대 같은 옷이 생각났다.

“선배, 이 드레스 너무 심한데요?”

마침 여자 쪽 의상을 갈아입으러 나갔던 신입생이 과방으로 들어오며 심각하게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아아, 목구멍에선 탄식이 밀려 나왔다.

싸구려 공단은 눈이 시릴 만큼 번쩍거렸다.

원단이 어찌나 빳빳하고 억센지 속치마인 페티코트를 챙겨 입지 않아도 벨 라인 드레스는 봉긋하게 퍼진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름이 잔뜩 들어간 드레스엔 반짝이는 구슬과 프릴이 치렁치렁 달려 있었고 밑단은 바닥에 줄줄 끌렸다. 이걸 입고 서빙을 했다간 손님과 테이블을 다 밀치고 다닐지 모른다.

“이게 옷을… 대체 어디서 빌려 온 거예요?”

“말했잖아, 나 아는 형이 극단 한다고.”

“아동극 하시는 분이에요?”

심지어 빌려 온 것도 몇 벌 안 됐다. 남자 것이 4벌, 공주 드레스는 7벌이 전부였다. 일하는 사람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옷도 너무 적은데…, 그날 하루에 일 돕는 인원만 해도 20명은 넘지 않아요?”

“어떻게 사람 수대로 맞추냐. 먼저 입고 일한 애가 다음 순번한테 넘겨주고 그래야지.”

돌려 입는다고? 세탁도 안 하고 저걸 삼 일 내내?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조금만 움직여도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 비닐 의상은 땀 배출이 안 될 게 분명했다.

저런 걸 하루에도 몇 명이서 돌려 입는다니.

선경은 남의 땀과 체취로 흠뻑 젖은 옷을 죽어도 입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조용히 경청하며 일을 도왔지만,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이 입을 옷이라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적극적으로 의견을 보탰다.

“옷은 그냥 반납하죠. 확실히 눈에 띄긴 하겠지만… 저건 너무 움직이기 불편할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해? 벌써 금요일이라 의상 대여해 주는 곳 알아보는 것도 빠듯할 텐데…. 여러 벌 단체로 구할 만한 곳도 없어. 그럴 예산도 없구.”

의상을 빌려 온 2학년 선배는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인도 망한 것을 인지했는지 반납하는 것엔 빠르게 수긍했다. 다만 이후 대안이 없어 걱정이었다.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고민하던 선경은 이마를 짚은 채 짧게 한숨 쉬었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옷은 늦어도 화요일까지 준비하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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