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응.”
“예산은 얼마까지… 아니에요. 그냥 제가 아는 곳에 연락해 볼게요.”
비용이 문제가 아니다. 우선경은 결심이 섰는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열었다. 연락처 속에서 손가락이 잠시 갈팡질팡했다. 그러다 결국 이름 하나를 눌렀다.
잠깐의 신호 연결음이 울리고, 밝은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애기 안녕? 웬일이야 전화를 다 주고?
“누나, 요즘 바빠?”
-아니, 나 요즘 작품 끝나서 완전 한가하지. 왜 누나랑 놀아 주게?
“도움이 좀 필요한데.”
-으흠, 뭔데 그럴까? 일단 들어 보고.
큰형 우선우의 전 여자 친구인 박목화는 미술 감독이자 의상 디자이너였다.
요즘 이 분야에선 가히 톱이라 불릴 정도의 실력자였다. 최근 국제 영화제에서 미술상을 받은 이후로 충무로에서 가장 핫한 영화인이 됐다.
고등학교 때 만나 3년을 사귀고 나서 둘은 헤어졌지만, 박목화는 이후에도 계속 우선우와 친구처럼 지내 오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자주 봐 온 사이라 우선경과도 친분이 남달랐다.
퍼스널 쇼퍼를 섭외하려다 박목화 쪽으로 노선을 튼 것은 그녀가 의상 제작 쪽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바쁠 것이 분명했지만 혹시나 싶어 연락을 해 본 거였는데 마침 휴식기였던 목화는 선경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통화 후 1시간 뒤, 그녀는 미궁 속에 갇혀 진전이 없는 과방으로 직접 행차해 주셨다.
상황을 전해 들은 박목화는 허리를 젖혀 가며 깔깔 웃었다. 옆 책상에 똑같이 걸터앉은 채 선경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증말 귀엽다. 우선경 나한테 지금 오퍼 넣은 거야? 고오급 인력을 이런 식으로 써먹네?”
“…해 준다면서. 그래서 온 거 아니야?”
“아니, 해 줄게. 해 줘야지. 누구 부탁인데 거절해. 대신 나중에 제대로 청구할 거야. 나 몸값 비싼 거 알지?”
사실은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하겠다고 했다. 매일 콧대 높은 감독들 비위 맞추랴, 참견하기 좋아하는 제작사들과 기 싸움 하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대학교 축제라니. 너무 깜찍하고 귀여운 작업이 될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기성복에서 변형하는 방식으로 하자. 디자인이 다 같을 필요는 없어. 오히려 똑같이 맞춰 입으면 촌스러울 테니까 비슷한 라인으로 최대한 물량 구해 줘.”
“좋아, 일단 원하는 걸 말해 봐.”
박목화는 어느새 노트를 펼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진지해진 얼굴로 둔갑해 의뢰인의 요구를 받아 적을 준비를 끝냈다.
“남자는 클래식 슈트로 하고, 칼라에만 공단을 덧대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왕이면 좀 더 고전적인 분위기를 살리고 싶은데.”
“기본 턱시도 스타일에서 무게만 좀 빼면 어떨까. 셔츠를 윙 칼라로 하고, 넥타이 대신 얇은 리본으로 가자. 셔츠만 빼고 컬러는 전부 블랙으로 통일하고.”
“좋아.”
“너도 입을 거니?”
“…….”
아이디어 노트에 스케치를 그려 넣던 박목화는 대답 없는 우선경을 흘낏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입을 모델이 눈앞에 있으니 영감이 절로 떠오르는지 연필을 쥔 오른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여자 쪽 의상은 엠파이어 스타일의 드레스로 부탁했다.
전체적으로 밝은 상아색에 짙은 와인 컬러를 포인트로 넣고, 움직임이 편하도록 모슬린 같은 가벼운 원단을 써 달라 주문했다.
“젠장… 도산공원 웨딩숍 다 털어야겠네. 미니멈이 어떻게 되는데?”
“드레스는 최소 18벌. 그런데 사이즈가 다 달라.”
“사이즈는 걱정 마. 지퍼 대신 코르셋 끈으로 바꾸면 두 치수까지는 대충 커버할 수 있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네크라인은 스퀘어로 해 주고, 소매는 팔꿈치 바로 위까지 왔으면 좋겠어. 팔뚝은 살짝 비쳐 보여도 상관없을 것 같아.”
“시폰, 프릴, 비즈 다 내 맘대로 해도 돼? 나 비싼 거 많이 쓰고 싶은데.”
“치렁치렁하지만 않게만 해 줘.”
“오케이.”
18벌을 손봐야 하는데도 작업이 기대되는지 박목화는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우선경은 살짝 불안한 눈초리로 목화를 쳐다봤다.
“누나, 화요일까지 가능하겠어?”
“나 혼자서는 무리고 직원들한테도 부탁해야지. 우리 작업실 이모들 손 진짜 빨라.”
“늦으면 안 돼.”
“걱정하지 마세요, 고객님. 주말 페이 넉넉하게 쳐 주신다면 일정은 어떻게든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 세트장은? 아, 세트가 아니지. 그, 부스는? 부스 제작은 어떻게 한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직업병이 도졌는지, 박목화는 부탁하지도 않은 부스 디자인까지 관심을 가졌다.
“여기까지 온 김에 내가 좀 봐 주면 안 될까? 의상이랑 어울리는지 확인을 해야지, 그게 기본이야!”
박목화는 내내 졸라 댔다.
결국, 성화에 못 이겨 윤봄의 연락처를 알려 줬다. 그녀는 끝끝내 부스 디자인을 담당하는 학생들과 면담을 가진 모양이다.
그날 저녁 회사로 돌아간 박목화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회의하던 중에 직원들이 갑자기 열정에 타올랐단다.
프로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겠다며 느닷없는 선전포고를 보내왔다.
그리고 축제 날이 되었다.
캠퍼스는 확실히 평소와 달리 들떠 있었다. 어딜 가든 사람이 많았고,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틀어 대는 음악 소리와 수시로 나오는 안내 방송이 겹쳐져 정신이 없었다.
차들이 오가는 도로엔 주점들이 들어섰다. 저마다 과 컨셉에 맞춰 화려하게 꾸민 부스들이 눈길을 끌었다.
확실히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첫날이라 그런지 홍보 경쟁도 치열했다.
이 와중에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술사학과 부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뭐라 뭐라 쑥덕댔다.
자연스럽게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게 만드는, 가히 독보적인 비주얼의 부스였다.
평범한 대학교 축제에 자본과 고급 인력이 투입되었을 때의 결과는 대단했다.
남들이 접이식 천막을 펼치고 플라스틱 테이블을 세팅할 때, 미술사학과에선 누가 봐도 전문가로 보이는 사람들이 새벽부터 나와 망치를 두들겨 댔다.
그들은 목재로 기둥과 지붕의 뼈대를 세웠다. 그 위로 파란 천막 대신 새하얗고 부드러운 천과 알전구가 걸렸다. 은은하게 바깥이 비치는 리넨 천은 바람이 불 때마다 나비가 날갯짓하듯 살랑살랑 나부꼈다.
기둥 곳곳엔 깃발 모양의 가림막이 웅장하게 걸려 있었다. 검붉은 바탕에 금색 자수가 놓인 것이 마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문장처럼 보였다.
가벼운 플라스틱 테이블 대신 그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빈티지한 원목 테이블과 의자가 칼각으로 놓였다. 그 주변으론 19세기 영국 귀족처럼 차려입은 미사과 학생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 기획했던 것처럼 화려함을 내세우진 못했지만, 고전적이고 로맨틱한 매력이 돋보였다.
특히 하나하나 공들여 리폼한 드레스는 저절로 눈길이 갔다. 보는 사람마다 예쁘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수준이었다.
미술사학과 주점 컨셉이 단단히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
“학교에 소문났던데요.”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오피스텔에서 만난 한지석이 뜬금없이 축제 이야기를 꺼냈다. 소파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우선경이 그게 대체 뭔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정작 말을 꺼낸 사람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한지석은 옆에 앉아 페로몬을 뿌리면서도 검토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바빴다.
무릎 위에 올려 둔 노트북 자판을 쉴 새 없이 두드리며,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술사학과 주점 대박 났다면서요. 줄 서서 들어가는 데만 한 시간이라던데.”
“그런 얘기는 대체 어디서 들어요? 한지석 씨 바빠서 축제에 관심도 못 준다면서요.”
“옆에서 얘기해 주는 건 듣죠. 그래서 대박이 났다는 건 맞아요?”
“글쎄요, 난 준비하는 것만 도와서 잘 모르겠던데.”
우선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꾸했지만, 자신이 들어도 목소리에 어색한 티가 나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가면 예쁘고 잘생긴 오메가가 있다던데. 과에 남자 오메가가 또 있습니까?”
“…안석현이라고 있어요.”
“아, 진짜 있었네.”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수상했다.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걸까. 우선경은 삐딱한 시선을 들고 한지석의 의도를 살폈다.
그제야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던 남자가 웃으며 눈을 마주쳐 왔다.
“걱정 마요, 난 안 갈 거니까. 그렇게 싫어하는 티를 내는데 어떻게 보러 갑니까?”
“나 일하는 거 알고 있었죠!”
“모르는 게 더 어려운 일 아닌가? 끝까지 말 안 하길래 계속 모르는 척해 주려 했는데…. 어렵네요. 참기 힘들었어요.”
“진짜 성격 나쁜 거 알아요? 다 알면서 사람 놀리면 재밌어요?”
재차 미안하다 사과하면서도 한지석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우선경은 속은 게 억울했는지 애꿎은 쿠션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절대로 오지 마요.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
우선경은 지난 이틀 동안 주점 일을 도왔다.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보니 첫날부터 실수의 연속이었다. 접객이 서투른 건 둘째치고, 주문을 받거나 음식을 나르는 것조차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첫날 미술사학과 주점에 놀러 온 권무열은 우선경이 서빙하는 모습을 보며 배가 찢어지게 웃고 갔다.
비주얼은 귀족인데 오뎅탕과 소주병을 나르고 있는 게 말이나 되냐며 일침을 가했다.
안주가 뭐 대수랴. 사실 어딜 가나 대학교 주점에서 파는 요리 수준은 비슷했고 종류도 거기서 거기였다. 한지석의 말대로 대학교 축제는 그저 술 먹고 즐겁게 노는 게 전부였다.
컨셉을 잘 잡은 미술사학과 주점은 첫날부터 입소문을 탔다.
사진이 잘 나오는 곳, 눈이 호강하는 곳이라는 간증급 후기가 퍼지면서 순식간에 인기가 치솟았다.
이곳에 유독 여자 손님이 많다는 소문까지 퍼져, 덩달아 기웃대다 헛물을 켜는 남자 손님까지 늘었다.
마지막 날이 되자 축제의 분위기는 정점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