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강의는 대부분 휴강이 됐고,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대동제를 즐겼다.
저녁엔 유명 가수들의 공연까지 예고된 상황이라 타 학교 학생들과 졸업생, 일반인까지 놀러 와 어디를 가든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여기 찬이슬 한 병이랑 잔 하나만 더 주세요!”
“네, 잠시만요!”
추가 주문에 테이블을 정리하던 미란이 대답했다.
이것만 치워 놓고 가야지, 서두르는 미란의 양손은 빈 술병을 챙기고 쓰레기를 주워 담느라 바빴다. 아침에 정성껏 세팅했던 앞머리는 어느새 땀에 젖어 뭉텅이 졌다.
하 씨, 정신없어! 밀려드는 일거리에 허덕이고 있는데 마침 주점 안으로 들어온 우선경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느덧 교대 시간이었다.
“3번 테이블 내가 갈게.”
“어, 고마워! 땡큐!”
미란은 발을 동동 구르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과장된 인사에 선경은 조용히 웃으며 제 할 일을 시작했다. 어느새 도움을 주고받는 것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주점 일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 서로 집 나간 멘탈을 챙겨 주다 보니 이틀 동안 과 사람들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과연 전우애라는 게 그냥 있는 말이 아니었다.
우선경은 궤짝만 한 아이스박스를 열고 그 안에서 초록색 소주병을 꺼냈다. 이제는 브랜드는 물론이고 뚜껑 색만 보고도 오리지널인지, 프레시인지 구분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작은 종이컵까지 챙겨 3번 테이블로 가져갔다. 베타 여성들만 모인 곳이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아 저기…, 혹시 같이 인증샷 한 장 찍을 수 있을까요?”
“네. 잠시만요. 석현아!”
우선경은 손을 까딱이며 안석현을 불렀다.
마침 한쪽 구석에서 재료 손질을 돕고 있던 석현이 부름을 듣고 포르르 뛰어왔다. 앳된 얼굴에 클래식 슈트를 입은 모습은 마치 콩쿠르에 참가하는 음대생처럼 귀엽고 풋풋했다.
사진 요청이 빈번해 아예 따로 담당을 정해 뒀다. 손님이 요청하면 언제든지 같이 인증샷을 찍어 주는 게 주 임무였는데 안석현은 이 일에 찰떡이었다. 어쩌면 천직은 이쪽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안석현이 손님들 사이에 섞여 포즈를 취했다. 귀여운 얼굴을 연신 방긋방긋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브이 자를 그린다. 적극적인 행동에 당연히 손님들의 반응도 좋았다.
“쟤는 연예인을 해도 먹고살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란이 혀를 내둘렀다. 동의하는 바다. 선경 역시 가볍게 웃으며 미란을 도와 자리를 마저 치웠다. 물티슈로 테이블을 닦으며 오늘의 근황을 물었다.
“몇 시부터 일했어?”
“12시. 오늘 진짜 역대급이야. 오픈부터 웨이팅 있었대. 마지막 날이라고 다들 작정했나 봐. 낮부터 개같이 퍼마신다.”
시간은 이제 고작 4시 반을 지나가고 있었다. 피크 타임이 오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로 바쁘다면 아마도 저녁때쯤엔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다.
“나도 낮술 좋아하는데….”
명색이 대학교 첫 축제인데 즐기기는커녕 노동만 하다 끝났다며 미란이 우는소리를 했다.
“이제부터라도 놀면 되지. 너 끝났잖아. 놔두고 빨리 가 봐.”
“이것까지만 하고. 바쁜데 더 못 도와줘서 미안해. 아, 그런데 선경아, 우리 옷 언제까지 반납해야 돼? 나 이거 입고 제대로 사진도 못 찍었는데…. 혹시 저녁까지 입고 돌려줘도 돼?”
언제 이런 걸 또 입어 보겠는가. 미란은 제가 입은 드레스와 작별하는 게 못내 아쉬운지 양팔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시폰이 만져졌다. 곱디고운 드레스는 손에 닿는 촉감마저 예술이었다.
선경은 미란이 들고 온 트레이를 대신 챙겨 들었다. 그게 뭐 큰일이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반납 안 해도 되는데. 그냥 가져가. 너랑 잘 어울려.”
“진짜…?”
쿨한 대답에 미란은 약간 감동을 먹은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 지독한 남자. 오메가만 아니었다면 벌써 다섯 번은 반하고도 남았다.
우선경은 냉랭한 첫인상과 달리 알면 알수록 배려가 깊고, 남을 잘 챙기는 성격이었다.
물론 까칠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예의 발랐고, 상스러운 욕 한번 입에 담은 적 없었다. 특히 매너가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하필이면 입고 있는 테일러 정장이 본인과 찰떡같이 어울렸다. 가뜩이나 눈에 띄는 얼굴에 의상까지 받쳐 주니 빡센 주점 일을 하면서도 눈만큼은 호강했다.
예쁘고 잘생겼는데 돈까지 많은 남자가 하필이면 오메가라니. 일생일대의 이상형을 만났는데 게이인 것과 마찬가지라, 미술사학과 여학생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의미 없는 설렘을 겪어야 했다.
이후 저녁 장사를 위해 본격적인 교대가 이뤄졌다. 주점을 돕던 얼굴들이 새롭게 바뀌고 조명과 촛불이 켜졌다.
부스에선 교대 시간마다 배경 음악을 바꿔 주곤 했는데, 오늘의 선택은 그윽한 목소리의 프랑스 여자 가수가 부르는 샹송이었다. 어스름한 초저녁과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우리 후배들, 고생하네. 많이 힘들지?”
박진상은 오늘도 주점에 기웃거렸다. 간식들 좀 먹고 해라! 손에 들고 온 편의점 비닐봉지를 흔들어 댔지만, 누구 하나 그를 반겨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삼 일째 얼굴도장을 찍고 있었다.
와서 일손이라도 도우면 말을 안 하겠는데, 늘 지인들을 끌고 와 술과 안주만 축냈다.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민폐도 저런 민폐가 없었다.
“왜 저래, 진상 또 왔어. 할 일 없대? 졸업반이면 가서 취업 준비나 하라 그래.”
“저 선배 벌써 취업했어. 이번에 운 좋게 라움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채용됐다잖아. 완전 계 탔지. 그러니까 저렇게 술 마시고 다니는 거 아냐.”
“헐, 저 선배 라움 들어갔어?! 무슨 재주로?”
뒤편에서 안주를 만들던 2학년들이 대놓고 뒷담화를 했다. 주된 화제는 박진상의 취직이었다.
보통 석사 이상만 뽑는 큐레이터 직종에 학사 졸업 예정자인 박진상이 붙은 건 상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올해부터 라움 갤러리에선 직원 채용 시 학력을 따지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박진상이 첫 선례가 되었다.
나름 경쟁률이 치열했다고 들었다. 학과장은 특히 기뻐했다고 한다. 앞으로도 라움 갤러리가 한국대와 긴밀한 교류를 이어 갈 것 같다며 공연히 자신감을 내비쳤다.
바빠 보이는 주점을 쓱, 훑어보던 진상은 지나가던 후배 하나를 붙잡아 세웠다. 친한 척 어깨에 손을 두르고 은밀하게 말했다.
“기태야, 빨리 여섯 명 자리 좀 만들어 봐.”
“아… 선배님, 오늘은 정말 안 돼요. 밖에 대기 줄 보셨잖아요.”
“응, 봤지. 봤는데, 내가 오늘 진짜 중요한 손님 모셔 왔단 말이야. 야, 너도 이따가 소개해 줄게. 우리 과 OB인데, 지금 라움 전시 팀 매니저야.”
박진상의 회유에 후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 업계는 워낙 좁아 인맥이 중요했다. 현직에서 일하는 같은 학교 졸업생이라니, 솔깃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안 되는데.”
“그냥 모른 척 내줘. 어, 저기 마침 자리 났네. 저기 치우면 되지?”
박진상의 시야에 막 손님이 빠져나간 단체석이 포착됐다.
그는 뻔뻔하게 치우지도 않은 테이블에 착석했다. 나무젓가락과 앞접시를 구석으로 대충 모으며 치우는 시늉을 냈다. 지켜보는 후배들의 시선은 당연히 좋을 리가 없었다.
“이름값 한다, 진짜.”
“야, 2번 테이블 담당 누구야?”
“아. 젠장, 우선경인데. 야, 누가 담당 좀 바꿔 줘라. 또 싸움 날라.”
하지만 어쩌겠는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후배들은 구시렁거리며 진상짓을 모른 척 외면했다.
삼십 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누가 봐도 사회인의 면모가 느껴지는 여성이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각 잡힌 투피스 정장에 턱밑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짧게 묶은 모습이 무척이나 까다롭고 지적으로 보였다.
손님을 발견한 박진상이 의자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당장 구십 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대리님! 안녕하세요! 먼 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대 너무 오랜만인데?”
라움 갤러리 전시 팀 소속 오형주 대리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 팀 막내로 들어온 수습 직원 박진상의 초대를 받아 오랜만에 모교에 방문했다.
오래간만에 느껴 보는 대학교 축제가 신선했는지 그녀는 주점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와, 여기 너무 괜찮네. 대학교 축제 수준이 아닌데요? 이거 진상 씨가 기획했어요?”
“하핫, 제가 주도하긴 했죠.”
“진짜 대단하다. 나중에 우리 기획 회의 때도 멋진 아이디어 기대할게요! 여기 사진 좀 찍어가도 돼요?”
“네! 그럼요! 얼마든지 찍으세요! 제가 찍어 드릴까요?”
“아, 그러면 학생들이랑도 같이 찍을 수 있을까요? 옷이 너무 예뻐서.”
“전부 대리님 후배들인걸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오형주의 칭찬에 기분이 들뜬 박진상은 주위를 둘러보며 촬영 모델을 물색했다.
오 대리는 미적인 요소를 중요시하니까 이왕이면 제일 예쁜 애를 찾아야 했다.
그의 눈이 예리하게 주점 안을 살폈다. 운 좋게도 마침 완벽한 피사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