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45화 (45/127)

#45

“야, 청강! 당장 이쪽으로 튀어와 봐!”

진상이 손가락을 딱, 부딪히며 우선경을 불렀다.

구석에서 조용히 술병을 정리하던 선경은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 얼굴도 안 보였을 텐데 귀신같이 저를 찾아내는 게 그저 신기했다.

“뭘 멀뚱히 보고만 있어. 선배한테 인사 안 하냐?”

“…….”

인사는 무슨, 불러서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겨야 할 판에 아직도 저런 소리를 하고 있다. 우선경은 고개를 꼿꼿이 치켜든 채 박진상을 내려다봤다.

“무슨 일이신데요.”

“OB랑 사진 한 번 찍어 드려.”

“전 사진 안 찍습니다.”

“왜 안 찍어. 넌 뭐 면상에 금을 둘렀냐? 비싼 척하지 말고 그냥 한 장만 찍어.”

박진상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윽박질렀다. 오형주 대리를 의식해서인지 차마 크게 화를 낼 순 없었다. 다행히 오 대리는 주점 내부를 카메라로 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석현이 불러 드릴게요. 아직 학교에 있을 거예요.”

“네가 찍으라고, 좀!”

자리를 뜨려 하자 박진상은 다급하게 우선경을 붙잡았다. 급한 마음에 순간 힘 조절을 못 했다. 잘못 잡은 손목이 세게 비틀렸다.

“아!”

“당장 손 안 놔?”

순간적인 악력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우선경이 아픈 티를 내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양복을 입은 덩치가 튀어나와 박진상을 제압했다. 안주를 덜어 먹던 종이 접시 위에 얼굴이 처박혔다.

꺄악! 주변에선 당연히 비명이 터져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강 비서는 숨을 씩씩거리며 물었다. 여전히 박진상의 팔을 꺾어 제압한 채 번뜩거리는 눈으로 우선경의 몸 상태를 살폈다.

“…….”

우선경은 대답 대신 주위를 살폈다.

강 비서의 거친 대응으로 테이블은 이미 쑥대밭이 돼 버렸고, 주점에 있던 모든 이들이 소란을 목격한 상태다.

아, 망했네.

손목을 주무르던 선경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다, 결국 포기했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본인 역시 참을성에 한계를 느끼던 참이었다.

“괜찮아요. 강 비서, 이만 놔줘요.”

허락이 떨어지자 강 비서는 박진상을 테이블에 바로 앉혔다. 성인 남자를 종이 인형 다루듯 거침없이 휘두른다.

손을 탈탈 털더니 삐뚤어진 안경도 바로 씌워 주고 양념이 묻은 머리 가르마도 정리해 줬다. 박진상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보살핌을 당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 당신 뭐야! 야, 청강생, 네가 시켰어?! 이거 폭행이야! 여기 목격자 많다고!”

“말조심하세요, 더 맞기 싫으면. 혹시 문제 삼고 싶다면 이쪽으로 연락 주고요.”

강 비서는 지갑 속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박진상에게 건넸다. 명함엔 서화 그룹 로고와 함께 법무 팀 대표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명함을 확인한 박진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와 서화 그룹이 잘 매칭되지 않는지 번갈아 쳐다봤다. 사고 회로가 버퍼링을 일으켰다.

그사이 우선경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확인했다. 박진상의 지인들이라 모두 초면이었지만 그중 한 명은 유독 낯이 익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니나 다를까, 우선경을 알아본 오형주는 고개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저희 구면인가요?”

“전시 팀 오형주 대리입니다. 지난번 송 대표님과 함께 성북동에 찾아뵌 적 있습니다.”

“아, 기억나네요. 그런데 여기엔 어쩐 일로 오신 거죠? 사적으로 아는 사이인가 봐요?”

오형주는 지레 놀라 손사래 쳤다.

“아, 아니요! 박진상 씨 초대로 왔습니다. 이번에 우리 갤러리 신입으로 채용되었거든요. 제가 사수를 맡고 있는데….”

“신입?”

선경의 눈이 반짝거렸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입꼬리가 절로 호선을 그렸다. 눈치 보던 오형주는 여전히 넋을 놓고 앉아 있는 박진상을 툭툭 때렸다.

“박진상 씨, 뭐 해요. 빨리 인사드려요.”

“예? 대리님, 제가 인사를 왜….”

“서화 그룹 막내 도련님이시잖아요. 사원 교육할 때 안 배웠어요?”

배웠다.

하지만 외워야 할 것들이 수두룩 빽빽해서 오너가 자제들 이름까지는 대충 훑고 넘어가다 보니 우씨라는 것밖에 기억 못 했다. 하다못해 사진이라도 봤었다면 이런 대참사는 없었을 텐데.

박진상은 두 손으로 제 머리를 한 움큼 쥐어 잡았다. 허옇게 질린 채로 입만 뻥긋거렸다.

“어, 그, 그러니까 청강생이….”

“세상이 참 좁네요, 선배님.”

우선경은 처음으로 선배라고 호칭하며 박진상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유 있게 웃으며 먼저 악수를 청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윗사람의 몸가짐이었다.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 다음엔 라움 갤러리에서 뵙죠.”

저녁 8시가 넘어가자 그 많던 손님들이 어느 순간 증발했다. 줄어들 줄 모르던 대기 줄도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곧 아이돌이 공연할 순서라고 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라 그런지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중앙 무대 쪽으로 옮겨갔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온 선배 하나가 먼지 묻은 손을 탁탁 털었다. 얼추 정리된 내부를 둘러보다가 난간에 기대서 있는 우선경을 보며 씨익 웃었다.

“많이 힘들어?”

“오늘이 끝이라 다행이에요.”

“시끄러운 일 있어서 더 그랬지. 사흘 동안 고생 많았다. 나머지는 이제 우리가 맡을 테니 먼저 들어가.”

“아직 시간 남았잖아요. 괜히 특별 취급 해 주실 필요 없어요.”

“무슨 특별 취급이야. 걱정 마. 너 말고도 신입생은 다 보낼 거야. 어차피 올 사람은 거의 다 왔는데 우리도 슬슬 눈치 봐서 쉬어야지. 정말 고생했다. 연락할 테니까 다음 주에 제대로 뒤풀이하자!”

선배의 닦달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떠밀려 나왔다. 바깥은 언제 사람으로 붐볐냐는 듯 썰렁해져 있었다. 벌써 다들 공연장 쪽으로 몰려갔나 보다.

우선경은 도로 경계석에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누적된 피로로 천근만근 무거워진 다리를 도로 위로 길게 뻗고 한산해진 주점들을 둘러봤다.

사흘 내내 발 도장을 찍으면서도 정작 주변을 제대로 구경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손님이 빠지고 관심이 시들해진 축제 부스는 폐장 직전의 놀이공원을 보는 것만 같았다. 끝나서 속이 후련한 것과 동시에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선경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꿉꿉한 습기와 희미하게 젖은 흙냄새가 콧속으로 가득 스며들었다.

하늘은 온통 깜깜해 구름 상태를 알 순 없었지만 어쩐지 곧 비가 올 것만 같았다. 그만 집에 가자. 선경은 뻐근한 목을 문지르며 슬슬 일어날 채비를 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우선경은 설마, 하고 고개를 들었다. 제 앞에 서 있는 훤칠한 사내를 보고,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한지석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으며 우선경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기엔 너무 근사한데.”

“네?”

“옷 잘 어울린다고요.”

한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칭찬을 뱉었다. 선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빈말인 걸 알면서도 괜스레 마음이 수선스러워졌다.

“여긴 웬일이에요. 늦게까지 공부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려고 했는데, 도서관 전기가 나갔어요. 지금 1층만 겨우 돌아가고 있는데, 어차피 바깥도 시끄러워서 겸사겸사 끝내고 나오는 길입니다.”

하긴 벌써 8시가 넘었으니 더 남아서 공부하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뻘쭘해진 선경은 일어나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벌써 끝난 겁니까?”

“조기 퇴근 시켜 줘서 집에 가려고요. 주점은 아직 하고 있을 거예요. 궁금하면 가서 구경해도….”

“내가 궁금했던 건 우선경 씨라서. 이제 봤으니 괜찮아요.”

“오늘 되게 뻔뻔스러운 거 알아요?”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채웠다. 한지석은 손에 든 책 꾸러미를 가방에 모두 집어넣으며 물었다.

“저녁 안 먹었죠?”

우선경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거리 음식 먹어 본 적 있어요?”

이번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면서 한지석이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그가 손을 뻗으며 선경의 옷깃을 부드럽게 잡았다.

“가죠, 늦게나마 축제 즐겨야죠.”

분수대 근처엔 푸드 트럭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곳도 열기가 한풀 꺾였는지 제법 한산해 보였다.

우선경은 신기한 듯 푸드 트럭을 하나하나 구경했다.

차 안에서 직접 요리를 하는 것도 놀라운데, 그 종류는 상상을 초월했다. 선경은 한지석의 팔을 잡아끌며 어느 한 집을 가리켰다.

“저기 봐요! 차 안에서 스테이크를 구워 준대요!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먹어 보고 싶어요?”

“네.”

트럭 앞으로 다가가 큐브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우렁차게 인사를 건넨 스테이크집 사장은 철판에 기름을 두르고 고기와 숙주, 양파를 달달 볶기 시작했다.

토치로 불을 지르자 철판 위에 시뻘건 불길이 솟구쳤다. 바짝 붙어서 구경하던 우선경은 헉, 소리를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큰 손이 다가와 넘어가는 그의 등허리를 단단히 받쳤다.

이후로도 추로스와 마약 토스트, 회오리 감자를 샀다. 우선경은 오른손에 든 회오리 감자를 기상천외한 물건 보듯 대했다.

사람이 이 정도로 칼을 다루는 게 가능한 거냐고 물어와서 한지석은 또 한 번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이번엔 경영대 쪽으로 넘어갔다. 그 앞에도 비슷한 주점이 늘어서 있었다. 한지석은 경영학과 부스를 찾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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