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46화 (46/127)

#46

“어!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오셨습니까! 들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부러 뒤편으로 조용히 들어갔는데, 그를 알아본 후배들은 목청껏 인사했다. 박진상 때와는 반응이 완전 달랐다. 활짝 핀 표정만 봐도 정말로 반긴다는 게 느껴졌다.

“경환아, 나 병맥주 두 개만 줄래? 시원한 거로.”

“네엡! 제일 시원한 놈으로 대령하겠습니다!”

기운 넘치는 대답과 함께 후배는 양동이에 담가 둔 맥주병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얼음물에 담가 둔 거라 시원하다 못해 병을 잡은 손이 시릴 정도였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병을 마른 수건으로 정성껏 닦았다. 선배님, 여기요! 경환은 손에 받쳐 든 맥주병을 자랑스레 건넸다.

“고맙다. 고생하고.”

한지석은 맥줏값으로 노란 지폐 한 장을 건넸다. 거스름돈을 받는 대신 후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뒤 주점을 나왔다. 밖에선 우선경이 어울리지도 않는 주전부리를 양손 가득 들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 걸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그가 선경이 신은 구두를 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좋아요, 괜찮은 곳으로 안내할게요.”

한지석을 따라 걸었다. 학교 지리를 잘 아는지 지석은 어두운 교정을 거침없이 누볐다.

그가 향한 곳은 로스쿨 쪽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대학원 건물 옆으로 이어지는 작은 샛길이었는데, 밝을 때 와도 찾기 어려울 만큼 꼭꼭 숨겨진 곳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을 밟고 작은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얼마 안 가 잔디로 뒤덮인 언덕이 나왔다.

그곳에선 학교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숨겨진 명당이 맞는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후미진 곳에서 몇몇 커플이 돗자리를 깔고 조용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한지석은 그나마 평평한 바닥을 찾아 맨땅에 주저앉았다. 눈짓을 보내자 우선경은 그 옆에 조심스럽게 따라 앉았다. 잔디가 깔려 있어서 딱딱하진 않았다.

앉아 보니 공연장이 정면에 있었다. 물론 거리가 워낙 멀어 가수의 형체는커녕 전광판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쿵쿵 공기를 두들기는 음악 소리와 수천 명의 학생이 떼창을 지르는 목소리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언덕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한지석이 재주 좋게 맥주병을 땄다. 퐁! 마치 샴페인 터지듯 통쾌한 소리와 함께 약간의 거품이 흘러넘쳤다. 그는 젖은 손을 털어 내며 차가운 맥주를 병째 건넸다.

“이걸 어떻게 마셔요? 잔도 없이?”

“병나발 분다는 말, 못 들어 봤어요?”

우선경이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보고만 있자, 한지석은 행동으로 대신 설명했다. 병목을 가볍게 부딪치더니 그대로 입술을 대고 마셨다.

꿀꺽꿀꺽, 툭 불거진 목울대가 생동감 넘치게 움직였다. 쳐다보고 있던 우선경은 그를 따라 입술을 붙이고 병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맥주가 흘러 들어오며 까끌까끌한 입 안을 적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어찌나 시원한지 답답한 갈증이 단숨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맥주를 꿀떡 삼키고 입을 뗀 선경은 푸하, 하고 작게 숨을 뱉었다. 그러자 벌린 입 앞으로 한 입 크기의 스테이크가 다가왔다. 저도 모르게 입을 와앙, 벌렸다.

“어때요?”

선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고기가 질기긴 했지만 불 맛이 제대로 났고, 무엇보다 잡내가 안 났다. 만 원이 조금 넘는 부챗살스테이크에 어차피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오히려 가격에 비하면 훌륭할 정도다.

“감자도 먹어 봐요.”

한지석은 회오리 감자를 내밀었다. 이걸 어떻게 먹어…. 차마 작품을 망칠 수 없어 가만히 보고만 있자, 한지석은 보란 듯 중간 부분을 깨물어 먹었다.

완벽한 나선형의 모양이 망가져 버렸다. 선경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아깝다….”

“별게 다.”

그가 재차 꼬치를 내밀었다. 이번엔 거절하지 않고 맨 윗부분을 살짝 뜯어먹었다.

짭조름하면서도 달콤하고, 바삭했다. 씹을수록 감자 특유의 담백하고 고소한 맛까지 입 안에 퍼진다.

뭐지? 뭔데 이렇게 맛있어? 입을 오물거리던 선경은 새롭게 경험하는 맛의 신세계에 조용히 감탄했다.

“자, 이제 맥주 한 모금 마셔 봐요.”

한지석이 시키는 대로 맥주를 마셨다. 온갖 자극적인 맛이 다 느껴졌던 입 속이 단숨에 정리됐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지석은 추로스와 마약 토스트까지 야무지게 먹였다. 우선경의 볼이 빵빵하게 차오르는 것을 보며 어미 새라도 된 듯이 뿌듯해했다.

“입도 짧으면서 이런 건 또 잘 먹네요.”

“…배고팠나 봐요.”

어느새 주전부리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한지석은 얼마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선경은 입술을 닦으며 머쓱하게 눈치를 봤다. 정작 한지석은 별 상관없는 듯 맥주만 마셔 대고 있었다.

가수가 바뀌었는지 노래 분위기도 달라졌다. 맑은 목소리를 가진 여가수가 나와 서정적인 발라드를 부르기 시작했다. 유명한 노래인지 도입부가 시작되자마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나왔다.

잠시 뒤 객석은 핸드폰 조명으로 뒤덮였다. 반딧불처럼 반짝거리는 빛이 허공에 너울거렸다.

“좋네요,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있는 것도.”

한지석은 나른하게 자세를 풀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앞머리도 덩달아 넘어가며 훤칠한 이마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달빛이 내려앉자 그의 얼굴이 도드라졌다. 깊은 눈매엔 그윽한 음영이 생기고, 곧게 뻗은 콧날 옆으론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입술은 웃음기 없이 굳게 다물려 있었는데, 한지석은 무표정할수록 차가운 인상이 됐다. 아마도 모르는 사이였다면, 쉬이 말을 걸지 못했으리라.

가만히 얼굴을 보고 있자, 시선을 느낀 한지석이 살짝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눈매가 부드럽게 풀리며 다정한 웃음을 흘렸다.

“오늘은 별일 없었어요? 또 그 진상 선배가 와서 괴롭히진 않았고?”

“사건이 좀 있긴 했는데. 나 오늘 남들 앞에서 우리 집 오픈했어요.”

난데없는 고백에 서글서글하던 눈매가 바짝 날카로워졌다.

“어쩌다가?”

“그냥, 더 이상 휘둘리는 게 짜증 나서요. 뭐가 됐든 스트레스는 덜 받겠죠.”

“괜찮겠어요?”

“당장 주위 사람 반응은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 또 모르죠. 일단 내일은 주말이니까 어떻게 넘어간다 쳐도 돌아오는 월요일은 좀 걱정이네요.”

“별일 없을 겁니다. 우선경 씨가 잘못한 건 없잖아요.”

특별할 것 없는 위로였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누그러진다. 신뢰가 가는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정말로 모든 게 괜찮아지는 듯했다. 선경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축 가라앉았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환기됐다.

우선경의 얼굴이 조금씩 피어나는 걸 보던 한지석은 조심스럽게 제 사정을 털어놓았다.

“곧 실무 실습 기간이에요. 아마 많이 바빠질 거 같아요.”

“실무 실습? 그 인턴 같은 거요?”

그가 외삼촌과 나눴던 이야기가 얼핏 떠올랐다. 법률 사무소인지 어딘지를 나간다고 했었던 것 같다.

“얼마나 하는 건데요?”

“4주요. 주말 빼고 매일 출근이니까, 시작하게 되면 당분간은 그 시간에 못 들를 것 같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아.”

퇴근 후 만나자고 하기엔, 괜히 미안했다.

주말을 반납하라고 하기엔 너무 염치가 없었고.

“그러면 잠시 쉬었다가….”

“한 달이나 못 보게 되는데 괜찮아요?”

선경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모르겠다. 사실은 안 괜찮다. 어느새 한지석을 만나 그와 페로몬을 나누는 일은 당연한 일과가 되어 버렸다.

마음 놓고 가장 편히 휴식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그를 못 본다고 생각하니 예상보다 많이 아쉬웠다.

톡, 정수리에 물이 떨어졌다.

뭐지 싶어 머리를 만지는데 이번엔 좀 더 묵직한 게 선경의 손등 위를 툭툭 때린다. 아차 하는 순간 빗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비 와요!”

“여긴 내가 정리할 테니까, 우선경 씨 먼저 내려가요.”

빗방울은 금세 소나기로 변했다. 굵은 빗줄기가 시야를 가리며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머리가 흠뻑 젖고, 얼굴엔 미처 닦지 못한 물기가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주변에 있던 커플들도 정신없이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비가 오자 땅이 질퍽해졌다. 구두에 닿는 모든 곳이 미끄러웠다. 조심조심 내려가고 있는데 어느새 먼저 내려간 한지석이 오른손을 뻗어왔다. 그의 손을 붙잡고 겨우 둔덕길을 내려왔다.

빗물이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쳤다. 하지만 무의미하게 다시 얼굴이 젖는다. 우선경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래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많이 와서요. 이렇게 비 맞아 본 건 처음이라.”

선경은 비에 흥건해진 재킷을 슬쩍 들어 보였다. 안에 입은 셔츠와 바지, 속옷까지 몽땅 젖었다. 이제 와서 새삼 비를 피하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흠뻑 젖은 한지석은 손바닥으로 머리 위를 가리며 주위를 살폈다. 마침 법전원 도서관이 바로 옆에 있었다.

“스터디 룸으로 가죠. 거기 수건이랑 갈아입을 옷 있으니까 일단 몸이라도 닦읍시다.”

전기가 나갔다는 도서관은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발전기가 돌아가는지 1층엔 은은한 간접 등이 켜져 있었다. 아마 최소한의 전기는 들어오는 것 같았다.

비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조용히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지나가는 곳마다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지며 흔적이 남았다.

우선경은 한지석이 이끄는 대로 계단을 올랐다. 불이 꺼져 깜깜해진 3층 복도를 지나 스터디 룸 앞까지 다다랐다.

띠리릭.

도어 록이 열렸다. 텅 빈 스터디 룸은 지난번에 왔을 때와 달리 깜깜하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스위치를 눌러 봤지만, 딸깍딸깍 소리만 날 뿐 형광등은 들어오지 않았다.

우선경은 재킷부터 벗었다. 아까부터 바닥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신경이 쓰였다.

앉을 자리는 많았으나 홀딱 젖은 채로 남의 의자에 앉는 건 민폐였고, 그렇다고 맨바닥에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이 젖은 몸을 어디 둬야 하나 두리번거리는데, 허리쯤 되는 높이에 큰 창문이 있었다. 선경은 창문을 붙잡고 좁은 난간에 걸터앉았다. 마침 엉덩이가 딱 들어맞았다.

그사이 한지석은 캐비닛을 열고 그 안에서 마른 수건을 꺼냈다.

오래 놔둔 건 아닌데, 그래도 혹시나 싶어 수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다행히 멀쩡했다. 굽혔던 무릎을 펴고 뒤를 도는데 잠시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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