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47화 (47/127)

#47

창가에 앉아 있는 우선경은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였다.

호기심 가득한 눈은 악천후 속에도 여전히 공연을 이어 가고 있는 바깥을 내다보느라 바빴다.

창문을 조금 열어 놨더니 그 틈새로 빗방울들이 튀기며 들어왔다. 하지만 선경은 이미 흠뻑 젖은 탓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턱선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들이 목과 가슴을 적셨다.

하얀 셔츠가 푹 젖어 맨살에 들러붙었다. 몸의 굴곡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어깨선은 둥글었고 곧게 편 등과 오목하게 마른 허리가 선명했다. 보고 싶지 않아도 가슴 쪽엔 선홍빛이 언뜻 비쳤다.

한지석의 긴 팔이 뻗어 왔다. 그는 열려 있는 창문을 닫았다.

덕분에 바깥 구경에 넋이 나가 있던 선경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심하게 던진 수건이 선경의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비가 좀 잦아들면 가야겠네요. 강 비서님 근처에 계시죠?”

“아마 그럴 거예요.”

거센 빗줄기가 타닥타닥, 창문을 때렸다.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머리카락의 물기를 꾹꾹 눌렀다. 뽀송뽀송했던 수건이 금세 축축해졌다.

“옷 갈아입을래요? 내 거라 좀 크긴 할 텐데.”

“괜찮아요.”

“갈아입죠? 몸 다 비치는데.”

누가 그런 소리를 한다면 남자끼리 그게 뭐 대수냐고 무던하게 대꾸했겠지만, 지금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어쩐지 손바닥이 근질거렸다. 선경은 주먹을 쥐고 손톱 끝으로 안쪽 살을 꾹꾹 눌렀다.

“옷 줘요.”

대수롭지 않은 척 목에 매인 넥타이를 끌러 냈다.

매듭에 손가락을 걸고 쭉 당기는데, 물에 젖은 데다가 얇은 리본 타이라 쉽게 풀리지 않았다. 힘을 줄수록 오히려 매듭이 꽉 묶이며 어중간한 위치에서 엉켜 버렸다.

지켜보던 한지석이 다가왔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끄르는 손가락을 거둬 냈다. 코앞에서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대신 엉킨 매듭을 풀기 시작한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섬세하게 매듭을 해체했다. 옷깃 사이와 목울대에 손가락이 스친다. 우선경은 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인데도, 되레 목이 조이는 것 같았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줘요?”

“이게 잘해 주는 건가?”

“아니라는 거예요?”

“사실 맞아요. …내가 아무래도 우선경 씨한테 많이 약한가 보네.”

넥타이를 풀어낸 한지석은 우선경의 이마에 가닥가닥 달라붙은 앞머리를 손수 넘겨 주었다. 매끈한 이마가 온전히 드러나자 마음에 들었는지 입꼬리가 빙긋 올라갔다.

“잘했으면 칭찬이라도 해 주든가요.”

“…….”

선경은 그제야 입 안에 고여 있던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일종의 충동이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멱살을 붙잡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예측하지 못했는지 한지석은 맥없이 끌려갔다. 난간을 급히 붙잡고 버티는데 입가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우선경은 칭찬 도장을 찍는 것처럼 입술을 붙이고 잠시 머물렀다.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맞닿은 입술까지 그 긴장감이 전해졌다.

천천히 입술을 뗀 선경은 차마 한지석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패기 있게 저지를 땐 언제고 이제 와 눈치를 봤다.

“…….”

놀라든가, 놀리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화를 내든가. 뭐라도 반응이 있어야 할 텐데 이상하리만큼 상대는 조용했다.

그렇게 별로였나?

참지 못하고 내리깐 눈을 들어 올린 우선경은 한지석을 보고 놀라 헛숨을 삼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우선경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선경이 젖은 눈을 깜박이거나,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무는 것까지 빠트리지 않고 지켜봤다.

그가 불쑥 왼손을 들어 올렸다. 선경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뒤통수가 붙잡히고 그대로 당겨졌다.

한지석은 잡아먹을 듯 선경의 입술을 삼켰다. 불쑥 들어오는 혓바닥에 놀라 우선경은 지석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목덜미에 짜릿한 소름이 끼친다. 뜨거운 살덩이가 얽혀 오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입술이 쭉쭉 빨렸다. 그 와중에 혀는 사탕을 녹여 먹듯 선경의 입 안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혀뿌리가 아릴 정도로 옭아매다가도 예민한 입천장과 점막을 노긋하게 핥아 대며 사람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가슴은 폭발할 듯 뛰었고,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았다.

하으…. 선경은 신음과 답답함 그 사이쯤 되는 소리를 힘겹게 뱉었다. 한지석은 그 애달픈 호흡마저 샅샅이 먹어 치웠다. 버티고 버티다 참기 힘들었는지 우선경이 지석의 어깨를 주먹으로 콱, 내리쳤다.

입술이 떨어지자 선경은 참았던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허억허억, 코와 입이 동시에 격한 호흡을 뱉었다.

“하아, 하, 숨을, 숨은 쉬게, 해 줘야지.”

“내가 입을 막았지, 코를 막았어요?”

“하. 처음 해, 봤단 말이에요.”

우선경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기 힘든지 고개를 저었다. 힘없이 뒤로 젖힌 머리가 창문에 닿았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의 뺨과 길게 뻗은 목, 둥그스름하게 잘생긴 귓바퀴까지 모두 시뻘겋게 물들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창피함 때문인지 호흡 곤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인 것도 모르고, 내가 너무 격하게 했구나.”

“…….”

한지석의 엄지손가락이 느리게 입술 사이를 쓸었다.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목소리와 달리 그의 손가락은 입술 사이를 희롱하듯 문질렀다. 도톰한 아랫입술이 뭉개지고, 촉촉한 안쪽 점막이 엄지 끝에 달라붙는다.

우선경의 단정한 얼굴이 긴장한 듯 경직됐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둔탁하고 젖은 숨이 새어 나왔다.

“숨도 못 쉬게 하고, 나빴네.”

한지석은 작은 턱을 붙잡고 그대로 얼굴을 숙였다. 우선경은 순순히 입을 벌렸다. 두 입술이 다시 한번 깊숙하게 겹쳐졌다.

격렬했던 첫 키스와 달리 두 번째 입맞춤은 깊고, 느리고, 진했다.

한지석은 우선경을 배려해 주듯 천천히 움직였다. 입술을 포근하게 베어 물면서 혀는 진하게 엉켰다.

뜨거운 살덩어리가 입 안에서 뒤엉키며 농밀한 타액을 만들어 냈다. 서툰 우선경을 대신해 그 다디단 흔적을 빠짐없이 삼켰다. 그때마다 우선경은 떨리는 손으로 옷소매를 꽉 움켜잡았다.

“하아, 으응.”

우선경은 저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울림이 제 귓가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온몸을 감싸는 쾌락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내리쳤다. 페로몬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키스하는 방법도 모르고 멍청하게 얼어 있다가, 그새 한지석이 하는 걸 배워 고스란히 따라 했다. 어설프게 혀를 문지르고 얇은 입술을 빨아당겼다.

한지석의 목에 두 팔을 휘감고 매달렸다. 한껏 밀착돼 있으면서도 더 가깝게 닿고 싶어 그를 바짝 끌어당겼다.

벌려진 다리 사이로 단단한 허벅지가 불쑥 들어왔다. 뒤로 밀린 상체가 창문에 닿는다. 얼굴을 움켜잡던 손가락이 느릿하게 미끄러지며 젖은 셔츠 위를 긁었다.

엄지가 작게 도드라진 젖꼭지를 문질렀다. 가뜩이나 예민한 부위는 축축해진 옷감에 들러붙어 윤곽이 또렷했다.

손톱으로 살점을 짓누르고 힘주어 비비자 우선경은 등을 둥그렇게 말며 몸을 뒤로 뺐다. 그래 봤자 창문에 막혀 도망갈 곳은 없었다.

한지석은 끙끙 신음을 참아 내는 예쁜 입술을 잘근 물고, 쭉 뻗은 목덜미를 야금야금 갉아 먹었다.

선경은 고개를 젖히고 가쁜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조여 올 정도로 벅찼고 아랫배가 들썩거렸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자극에 강렬한 충동질이 몰아쳤다.

이대로 뒤섞이고 싶다는 욕망으로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우선경은 저의 맨살을 헤집고 다니는 한지석의 얼굴을 붙잡고 다시 한번 입술을 겹쳤다. 몽롱하게 풀린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당신 눈이….”

“…….”

“눈동자 색이 변했어.”

농축된 호박석 같은 짙은 황금빛이 동공에 어려 있었다.

한지석의 눈은 원래도 색이 옅어 갈색빛을 띠고 있었는데 지금은 확실하게 금안으로 보였다. 처음 보는 아름다운 색감에 선경은 홀린 듯 그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한지석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더듬는 우선경의 손목을 붙잡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가 내쉬는 숨과 피부 모두 델 듯이 뜨거웠다. 한지석은 바닥까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우선경을 불렀다.

“아마도 러트가 오는 것 같아요.”

“러트?”

“예정일보다 조금 빠르긴 한데, 아무래도 우선경 씨 페로몬에 자극받은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야 돼요.”

손목을 붙잡은 손에 부쩍 힘이 들어갔다. 한지석은 안간힘을 다해서 이성을 붙들고 있었다. 선경이 계속 굳어 있자 그는 노랗게 변한 눈을 번뜩이며 경고했다.

“여기서 나랑 계속 있다간 큰일 나요. 우선경 씨, 당장 나가서 강 비서님한테 연락해요.”

“하지만….”

“제발. 나 참기 힘들어.”

한지석은 재차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재촉하는 말과 달리 몸은 여전히 가깝게 붙어 있었다. 그가 뜨거운 이마를 선경의 어깨에 뉘었다.

오뚝한 콧날이 목덜미에 비벼지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한지석이 크게 숨을 들이쉴 때마다 우선경의 몸이 발작하듯 뛰었다. 그가 마치 저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했다. 강 비서의 전화번호를 찾는 손가락이 벌벌 떨려 왔다.

전화를 한 지 오 분도 되지 않아 강 비서가 나타났다.

스터디 룸의 문을 거의 부술 듯 발로 차고 들어온 남자는 두 사람의 흐트러진 차림새와 묘하게 들뜬 얼굴만 보고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늠한 듯했다.

한지석은 형형하게 눈을 부라리는 강 비서에게 우선경을 맡겼다. 아직 버틸 만한지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몇 가지 당부를 전했다.

“나흘 정도, 연락 안 될 겁니다.”

“…….”

“비 많이 맞았으니까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한지석 씨.”

“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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