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48화 (48/127)

#48

***

나흘은 너무 길다.

예고대로 한지석은 나흘 내내 연락이 두절됐다. 아마도 러트 때문일 것이다.

그날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러트는 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궁금했지만, 소식을 전해 들을 방법이 없었다.

네 번의 낮과 네 번의 밤이 지나가는 동안 우선경은 혼자서 모든 걱정을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눈만 감으면 키스를 나눴던 순간으로 회귀했고, 부르튼 입술을 만지면 감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중에 가서는 이게 현실인지 망상인지 기억이 모호해졌다. 페로몬에 홀렸던 게 분명하다며 현실 도피를 하기도 했다.

순간을 참지 못하고 저질렀던 첫 키스는 후폭풍이 거셌다.

선경은 한지석의 젖은 입술, 뜨거웠던 체온, 제 얼굴을 감싸 쥐고 훑었던 길고 굴곡진 손가락 따위를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온종일 그의 얼굴만 떠올랐다. 미친 게 분명했다.

그리고 화요일 오전,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약속된 시간에 만나자는 간결한 메시지였다.

러트 기간이 힘들었던 걸까, 오피스텔에서 다시 만난 남자는 조금 수척해 보였다.

먼저 와 있던 한지석은 뒤늦게 도착한 우선경을 보며 평소처럼 옅게 웃었다. 내내 머릿속으로 그리던 얼굴을 실제로 마주하자 주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선경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가갔다.

“몸은 좀 괜찮아요?”

“매번 겪는 건데요, 뭐.”

한지석은 러트 이야기를 꺼내는 게 민망했는지 고개를 떨어뜨리며 시선을 피했다.

우선경은 그의 앞으로 다가가 직접 얼굴을 살폈다.

이마를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천천히 뒤로 넘기며 체온을 확인하고, 푹 꺼진 눈 밑도 손끝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아까운 것을 만지듯 손길이 살갑고 부드러웠다.

한지석은 눈을 감고 가만히 얼굴을 내맡겼다. 우선경의 손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코끝에 그의 체취가 닿았다. 페로몬 같은 건 섞여 있지 않은, 그저 깨끗하고 단정한 살냄새였다. 그조차도 주인을 닮았다.

선경은 한지석의 이마를 쓰다듬다가 손을 멈췄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참고 있던 말을 뱉었다.

“나 아무래도 한지석 씨 좋아하나 봐요.”

“…….”

갑작스러운 고백을 들은 한지석은 감고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지 말지. 안타까운 마음에 지석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눈이 닮았네.’

문득 오피스텔에 오기 전 만났던 우재경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눈매가 비슷하다. 남매니까 당연한 건가?

한지석은 제 얼굴을 만지는 손목을 붙잡고 끌어 내렸다. 우선경은 순순히 따라왔다. 한지석만 내리 바라보는 얼굴은 오늘따라 참 해사하고 맑게 빛났다.

“우선경 씨.”

“네.”

“지난번 있었던 일은 내 실수였습니다.”

한지석은 붙든 손을 내려놓았다. 상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얘기했다.

“사과할게요.”

그 순간, 한지석은 자신을 내려다보던 따뜻한 눈동자에서 온기가 사악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

화요일 새벽, 러트가 막 끝나 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수면제의 도움으로 거의 동면하다시피 잠들었던 한지석은 슬슬 약 기운을 물리치며 몸을 움직였다.

몽롱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로 목욕을 하고, 마지막 분량의 억제제를 털어 먹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젖은 머리를 말리며 그동안 챙기지 못했던 연락들을 훑어봤다. 보고 넘겨도 될 정도의 사소한 메시지들부터 꼼꼼히 확인해야 하는 중요한 연락까지 골고루 살폈다. 그중에는 우선경이 보내온 문자도 있었다.

[괜찮아요?]

고작 한 문장이었지만 문자를 보낸 시간이 이틀 전 새벽 두 시다. 그 성격에 이 짧은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괴로워했을지.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서 온 문자도 있었다.

[우재경입니다. 만나 뵙고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언제라도 상관없으니 편하실 때 전화 주세요.]

지석은 핸드폰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얼굴을 세수하듯 문질렀다. 무슨 일인인지는 몰라도 그리 좋은 만남이 되지 않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우재경과 다음 날 아침 일찍 약속을 잡았다.

카페에 먼저 도착한 한지석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기다렸다. 우재경은 칼같이 정각에 맞춰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부탁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급하게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으시겠죠.”

“러트가 직전에 끝났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제가 곧 한국을 떠나게 돼서 마음이 급했네요. 한지석 씨에게 꼭 전할 말이 있어 만나 뵙길 청했습니다.”

큰 키에 수려한 외모는 한눈에 봐도 알파다웠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오랜 기간 재벌가에서 교육을 받아 온 사람답게 표정과 몸짓에선 기품이 흘렀다.

그녀는 사람을 대하는 게 능숙했고, 당연하다는 듯 우위를 선점했다. 꼿꼿한 시선이 한지석을 훑었다. 그것은 같은 알파라도 예외는 없었다.

우재경은 단숨에 본론을 꺼냈다.

“선경이랑 계약한 내용 알고 있습니다. 건물을 임대해 주는 조건으로 페로몬을 제공해 주기로 했다죠.”

“그렇게 말하니 제가 꼭 대가성 접대라도 하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두 사람이 오피스텔에서 뭘 하고 있는지,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알고 있어요. 벌써 몇 번 사고가 있었더군요.”

“다 큰 성인끼리인데 문제가 됩니까.”

“문제 될 건 없죠. 둘이 만나서 연애를 하든 소꿉놀이를 하든 상관없어요. 다만 그게 진심이 될까 봐 걱정하는 겁니다.”

“…….”

더 이상 만나지 말라, 종용할 줄 알았는데 그녀의 말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잠시 침묵하던 한지석은 굳어 버린 입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너무 섣부른 걱정 아닌가요. 재벌들은 다 그렇게 사서 걱정을 하는 겁니까.”

“아니란 말은 못 하겠네요. 하지만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데 저는 당신을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에 드는 편이죠. 솔직히 흠잡을 곳 없잖아요.”

재경은 차분한 시선으로 한지석을 응시했다. 꼰 다리 위에 가지런히 얹은 손가락이 무릎을 두드렸다. 이어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한지석 씨,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우성 알파에 번듯한 집안 출신이고, 무엇보다 미래도 확실하죠. 이러한 조건을 가진 알파는 찾기 힘들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라면 저희 할아버지도 좋아하시겠죠. 하지만 선경이는, 아시다시피 오메가예요.”

“우선경 씨가 오메가인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말은, 선경이와 짝이 된다는 건 서화 그룹 사람이 돼서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

“당신이 이루고 싶은 꿈은 포기하고, 선경이 편에 서서 그 아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줘야 해요. 그렇게 하실 수 있겠어요?”

팽팽한 시선이 오갔다. 먼저 눈을 내리깐 건 우재경이었다. 애초부터 기 싸움 할 생각은 없었다. 우재경은 그저 경고를 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둘이 만나는 것까지 억지로 막을 생각은 없어요. 사람 마음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다만 그 연애가 생각보다 짧을 거란 걸 꼭 기억해 줬으면 합니다.”

“…….”

“아마도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결혼 상대를 찾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지시하시는 거니 선경이도 반대할 순 없겠죠. 만약에 한지석 씨가 선경이와 미래를 약속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애초부터 깊은 관계까지 가지 말아 줬으면 하는 마음에 부탁드리는 겁니다.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선경이 마음 많이 가져가지 마세요.”

“우리가 사랑할 거라 예상하시나 봅니다.”

우재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주치는 시선은 확고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우선경이 남들보다 유독 신경 쓰인 건 사실이다. 보지 않으려 해도 눈길이 갔다. 그건 아마도 본능이었을 것이다.

너무도 쉽게 경계선을 허물고 들어와 저 자신을 흔들어 대는 게 두려워 우선경을 피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결국은 제자리였다. 마치 모든 것이 정해진 순리인 것처럼 그와 엮이게 됐다.

인정한다. 우린 서로에게 분명히 빠져들겠지. 끝이 정해져 있다면 애초부터 시작하지 않는 게 맞다.

차라리 지금이라면,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쉽게 끊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경 씨.”

“네.”

“지난번 있었던 일은 내 실수였습니다. 사과할게요.”

선경은 제가 들은 말이 잘 이해가 안 됐는지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백의 대답으로 나올 말은 아니었다.

“사과를 한다는 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러트 직전이라 내가 선을 넘은 것 같아요. 큰 의미 두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무심하게 늘어놓는 변명에 작게 신음하던 선경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랫입술이 하얀 앞니에 질끈 물어뜯겼다.

“그러니까, 지금 없었던 일로 하자는… 얘기죠.”

“미안해요. 이건 다 내 잘못이니까, 우선경 씨는 신경 쓰지 말고.”

“무슨 뜻인지 알겠으니 그만 좀 말해요. 그 잘못이니 사과니 하는 소리도 집어치우고.”

선경은 지석의 어깨를 밀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떨리는 손 아래로 후끈 달아오른 얼굴을 숨겼다. 말하지 말 걸 그랬다. 눈치도 없이 고백했다는 생각에 일순간 후회가 덮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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