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49화 (49/127)

#49

한 공간에 있는 게 곤혹스러울 만큼 거실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이 와중에도 한지석은 꿋꿋이 페로몬을 내보냈다. 맞은편에 앉아 창밖만 내다보고 있는 우선경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하지만 선경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한지석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싫은지 삐딱한 자세로 앉아 고개를 틀었다.

“실무 실습이 다음 달 3일부터 시작돼요. 그 전에 미리 준비할 것도 있고, 로펌에 나갈 동안엔 아무래도 시간 내기 힘들 테니까… 두 달 정도만 쉬었다가 만났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지금은 서로가 필요 이상으로 의식됐다. 시간을 갖고 좀 떨어져 있다 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 제안한 방법이었다.

두 달이면 충분할 거다. 한지석은 한지석대로 바쁘게 살 테고, 우선경은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머리를 식히다 보면 다시 마음을 가라앉힐 여유를 찾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한지석의 제안에 내내 창밖을 내다보던 우선경이 드디어 고개를 바로 돌렸다. 마주한 얼굴은 오만 정이 다 떨어진 사람처럼 냉랭했다.

“꼭 무서워서 도망가는 사람 같네요.”

“…….”

“분위기에 휩쓸려 잠깐 건드려 봤는데, 감당이 안 될 것 같았어요? 아니면 남자 오메가라 싫었나? 생각해 보니 새삼 역겨웠나 보죠?”

“그런 게 아니란 거 알잖아요.”

“걱정할 거 없어요. 앞으로 더 이상 볼 일 없을 테니까. 피차 불편할 텐데 여기서 이만 끝내죠.”

강 비서님, 선경이 목소리를 낮춰 부르자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던 강 비서가 그 앞으로 다가왔다.

“서재에 놔둔 계약서 좀 가져다주세요.”

“앗, 네.”

서재에 들어갔던 강 비서가 찾아온 봉투를 선경에게 건넸다.

그 안에 든 여러 장의 서류를 확인하더니, 양 손가락으로 종이 끄트머리를 잡는다. 선경은 다시 한번 통보하듯 말했다.

“계약 파기할게요.”

찌이익.

한지석의 눈앞에서 계약서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보육원 건은 약속 지키겠습니다. 어차피 내가 한 일도 아니고, 서화 건설에서 사회 복지 차원으로 후원한 거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신경 쓸 것 없어요.”

“…….”

“그동안 나랑 어울려 주느라 수고했어요.”

찢어진 종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우선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문으로 나서는 그를 따라 강 비서가 황급히 뒤를 쫓았다. 잠금장치가 열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마지막 인사라고 하기엔 너무 매몰찼다. 계약서를 쉽게 찢어 버렸던 것처럼, 우선경은 한지석을 그 자리에서 잘라 냈다.

이토록 쉽게 끝날 거였다.

한지석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

“좋은 아침.”

“오빠, 안녕하세요.”

“왔냐? 커피 사 왔는데 마실래?”

“응, 고마워.”

학교에 오자마자 스터디 룸에 들렀다.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한지석이 나타나자 동기들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각자 책상을 정비하며 가벼운 잡담을 나눴다. 주말에 무엇을 했는지, 아침에 뭘 먹었는지 같은, 별로 중요치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와, 날씨 너무 좋다. 이런 날은 좀 나가서 놀고 그래야 하는데 맨날 처박혀서 공부만 하네.”

동기 중 하나가 바깥을 구경하겠다며 창문을 활짝 열고 몸을 기댔다. 생각보다 날씨가 더 쾌청했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까지 살랑대자 아예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고 감상하기 시작했다.

“…….”

한지석은 말없이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그의 시선이 난간에 닿아 떨어질 줄 몰랐다.

“다들 지원서 보냈어요? 마감 내일까지인 거 알죠?”

“뭐? 수요일까진 줄 알았는데?! 나 아직 안 보냈단 말이야!”

“정훈 오빠, 학관에 우체국 있어요. 빠른 등기로 보내면 내일까지 무조건 도착할걸요?”

“아이 씨, 거기 몇 시까지 하지? 오전엔 도저히 갈 시간이 없는데…. 오후에 보내도 빠른 등기 받아 주나?”

혼자 날짜를 착각한 최정훈이 급하게 가방을 뒤졌다. 다행히 서류는 준비해 뒀다. 보내기만 하면 되는데 지금부터 강의 스케줄이 빡빡하게 잡혀 있어 도무지 짬을 낼 수 없었다.

“이리 줘, 내가 대신 다녀올게.”

곤란함에 절절매는 최정훈에게 한지석이 손을 뻗었다. 우편물을 대신 가져가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일으킨다. 당장 나갈 준비를 하자 최정훈이 감격스러운 듯 두 손을 모았다.

“한지석 님, 감사합니다!”

“밥이나 사든가.”

“물론이지! 내가 오늘 점심 살게. 땡큐, 땡큐! 자, 계산은 이거, 내 카드로 하고.”

카드와 우편물을 챙긴 지석은 부담스러운 인사를 뒤로 하고 스터디룸을 빠져나갔다.

학관까지 느릿하게 걸었다. 어차피 기분이 계속 어수선하던 차였다. 바람이라도 쐬고 올 요량으로 심부름을 자처했다.

과연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다. 길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밟다 보니 어느새 인문대 앞을 지나고 있었다.

“…….”

그곳에서 우선경을 발견했다. 그는 한지석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은 여전히 변한 곳 하나 없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축제가 끝난 이후로 학교는 문제없이 잘 다니고 있는지, 혹시 주변에서 누가 뭐라 하진 않는지, 부당한 일을 겪진 않았는지.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만났을 때조차 안부를 묻지 못했다.

마침 고개를 틀던 우선경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까만 눈동자가 놀라 커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고 곧바로 모르는 사람 보듯이 눈길을 돌린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안 해.”

“아 좀!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 보고 거절을 하든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우선경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팔을 두르고, 뭐라 보채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척 친해 보였다. 우선경은 남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도 피식,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어느새 거리가 한 치 앞까지 가까워졌다. 마주 걸어오던 우선경은 살짝 어깨를 틀어 제자리에 서 있던 한지석을 비껴 지나갔다.

길거리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행인을 대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 지나가는 걸 보자 이제서야 비로소 그가 완전히 등을 돌렸구나, 하고 체감이 됐다.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정답게 안부를 묻는 사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쩌면 눈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했었던 것 같다.

손에 쥔 하얀 봉투는 어느새 눅눅하게 구겨졌다. 한지석은 손바닥에 배어 난 땀을 문질러 닦았다.

***

서초동 라운지 바에선 묵직한 재즈가 흘러나왔다. 평일임에도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님이 가득했다.

호텔 라운지처럼 화려한 맛은 부족했지만, 대신 고급스러운 매력이 그 자리를 채웠다.

검붉은 마호가니 테이블 위엔 인테리어처럼 진열된 빈티지 와인과 싱글 몰트 위스키가 가득했고 와인 랙엔 투명한 와인 잔 수십 개가 걸려 있었다. 안개처럼 낮게 깔리는 콘트라베이스 연주는 적당한 대화 소리와 어우러져 분위기를 돋웠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프라이빗 바가 대부분 그러하듯 테이블 간 거리가 넉넉히 떨어져 있어 편안하고 은밀한 대화를 보장했다.

하지만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갈 일 없었던 두 남자 손님은 탁 트인 바 자리에 앉아 당당히 술잔을 부딪쳤다.

구김이 간 셔츠에 살짝 풀어 헤친 넥타이, 얼굴에 짙게 깔린 피로감은 누가 보더라도 이제 막 퇴근한 직장인의 민낯이었다.

“겪어 보니까 어떠냐? 로펌도 괜찮지 않아? 그래도 태광 정도면 일하기 깔끔하잖아. 나도 있고.”

“별로야. 나랑 안 맞아.”

“어련하시겠어. 그 결벽증 같은 한지석 성격에. 너 그러면 곧 임용 준비하겠네?”

“어, 겨울에 검찰 심화 지원하려고.”

“검사 좋지. 그래, 넌 그쪽이 찰떡일 거다. 아주 그려진다, 그려져.”

박상혁은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술과 함께 삼켰다.

판사 임용 자격을 얻기 위해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물론이고 5년 이상의 법조계 경력이 필요했다. 변호사로서의 경력도 물론 가능했지만, 한지석 본인이 로펌에서 일하는 걸 썩 내켜 하지 않으니 검사에 임용되는 수밖에 없었다.

지석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태광 법무법인에서 근무하는 3년 차 변호사 박상혁은 요즘 들어 부쩍 한지석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인연이 깊은지 멘토로 배정이 된 것이다.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척박한 실무 과정은 조금 할 만해지기 마련이다. 물론 일이 편하다는 건 아니었지만. 사실 요즘 야근하느라 매번 자정을 넘기며 집에 들어갔다.

오늘은 오랜만에 정시 퇴근을 하고, 제대로 된 저녁도 먹었다. 이후엔 한지석을 데리고 근처 라운지 바에 들렀다.

그동안 일에 치이다 보니 서로의 근황에 관해 자세히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안 어울리게 부쩍 어두워 보이는 표정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넌 얼굴이 왜 그렇게 죽상인 건데? 얼굴이 제일 볼만한 애가 요즘 영 때깔이 별로네?”

“그런가?”

“일이 그렇게 힘드냐?”

“아니, 오히려 바빠서 좋아.”

정신없이 일에 치이다 보면 몸은 고될지언정 딴생각이 나지 않아 편했다.

“형은 어때? 형수랑 주헌이는 잘 지내지?”

“독박 육아라 힘들어 죽겠다고 그러지. 집에 장모님 와 계신 지 오래야. 그러는 너는? 누구 만나는 사람 없어? 안 그래도 우리 와이프가 너한테 오메가 소개해 주고 싶다고 난리던데.”

박상혁은 한지석이 있는 쪽으로 눈을 힐끔거렸다.

옆자리에 앉은 알파는 저와 마찬가지로 피로에 쩔어 있었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되레 고혹적으로 보였다. 앞머리는 헝클어졌고 눈 아래엔 다크서클이 짙었지만 그 자체로 음울하고 외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한지석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술잔을 둥글렸다. 얼음이 잔 속에서 쩔걱거리며 부딪혔다. 손에 쥔 유리잔이 차갑게 식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연애는 무슨. 나 살기도 바쁜데.”

“하긴 네 연애 사정 걱정만큼 세상 쓸모없는 걱정이 없지.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

부잣집 배곯는 사정 걱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가뜩이나 눈에 띄는 바 자리라 그런지, 아까부터 곳곳에서 관심 어린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정작 한지석은 무덤덤한데, 괜히 제 뺨이 다 간지러웠다. 이런 관심을 처음 받아 보는 상혁은 손바닥으로 근질거리는 왼뺨을 문질렀다.

그때, 누군가가 상혁을 불렀다.

“어? 이게 누구야. 박 변!”

“앗, 대표님!”

출입문에서 지하 라운지 바로 이어지는 곡선의 계단에서 40대 중반의 여성이 그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태광 법무법인 대표가 막 라운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필이면 바가 직격으로 보이는 곳이라 박상혁은 숨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일어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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