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50화 (50/127)

#50

“어떻게 여기서 뵙네요.”

“응, 모임이 있어서요. 아, 이쪽은 그 친구 맞죠? 대법원장님 아드님.”

“한지석입니다.”

“그쪽이 한지석인 건 잘 알죠. 작년부터 내가 점찍어 놓은 인재인데.”

최문영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한지석을 위아래로 훑었다.

참 보면 볼수록 탐나는 재목이다. 마스크는 물론이고 피지컬까지 훌륭한 게 로펌의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기 딱 좋았다.

“같이 술 한잔하고 있었습니다.”

“둘이 선후배지간이라고 했었죠? 역시 우리 태광이랑 인연이 깊네. 내가 한지석 씨 포섭하려고 한국대 교수들한테 얼마나 부탁했는지 알아요? 인턴한테 이런 식으로 구애한 적이 없었는데, 대체 몇 번을 퇴짜 맞았는지 몰라.”

“죄송합니다.”

“정 미안하다면 우리 오늘 술 한잔합시다. 마침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아… 그런데 대표님, 모임 있으시다고.”

박상혁이 조심스럽게 난색을 표했다.

대표와의 술자리라니, 딱 봐도 한지석에겐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상관없어요, 기업가들 모임이긴 한데 저쪽도 다 젊은 사람들이거든. 지인이나 파트너 동반하는 건 흔한 일이라 별로 신경도 안 쓸 겁니다. 설마 오늘도 거절할 건 아니겠죠?”

“…….”

“오래 안 잡을 테니 한 잔만 합시다. 아, 물론 박 변도 같이.”

안쪽에 따로 마련된 별실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넓게 트인 공간 안에 ㄷ자 배열로 가죽 소파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은은한 빛을 뿌렸고, 음악 소리는 좀 더 템포가 느렸다. 바깥보다 더 조용하고 은밀한 분위기였다.

대략 7~9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알파, 오메가, 베타까지 모든 형질이 고루 섞여 있었다. 독한 향수 냄새와 페로몬 향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최 대표님, 제일 늦었네요? 역시 주인공이야.”

“어머, 박 사장님은 대체 몇 시부터 와 계셨던 거예요? 세상에, 벌써 술병이 몇 개야.”

국내 굴지의 스타트업 대표이사가 최문영을 보고 가장 먼저 알은척했다.

젊은 청년 사업가는 최문영보다 한참 어렸다. 올해 29살. 모임에선 가장 어린 편에 속했지만 친밀한 사이를 증명하듯 최 대표와 함께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눴다.

베타인 그의 곁엔 예쁘장한 오메가가 새끼 캥거루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최 변호사님, 오늘은 파트너를 두 명이나 데리고 오셨습니까?”

“우리 로펌 변호사니까 오해는 말아 주세요. 아, 물론 한 명은 내가 요즘 공들이고 있는 사람이고.”

“이야, 오늘 공들이는 분들이 왜 이렇게 많아?”

왁자한 웃음이 번졌다. 늦게 와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최문영은 자리에 앉자마자 술잔을 챙기며 묻는다.

“저 말고 누가 또 계시나 보죠?”

“저기 장 대표님 좀 보세요. 귀한 도련님 모셔 와서 절절매시는데 이런 구경이 또 없습니다.”

누군가 안쪽을 가리켰다. 최문영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그 드세고 자만심 가득한 장 대표가 웬일로 어린 오메가 남자애와 함께 있었다.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자 장 대표는 기꺼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예 왼쪽으로 몸을 돌린 상태다. 그의 관심은 아까부터 오직 옆자리에 앉은 오메가한테 쏠려 있었다.

“그럼, 당연히 받들어 모셔야지. 공들이다 보면 누가 알아? 나 좀 예쁘게 봐줄지.”

“…….”

우선경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저만 쳐다보는 장건주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좌로 돌리며 무심하게 턱을 괴고 있었다.

“아,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서화 그룹 도련님이시구나, 작년 창립기념일 파티 때 잠깐 뵀었는데… 잠깐, 고등학생 아니에요?”

“최 변호사님,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세요. 나 그렇게 파렴치한 사람 아닙니다. 올해 성인 됐다고요.”

“아아, 그렇다면 뭐. 반가워요! 태광 법무법인 파트너 변호사 최문영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 술 한 잔 받으세요.”

내내 바닥으로 내리깔았던 눈동자가 천천히 위로 떠올랐다.

정면에선 최문영이 술병을 들며 기다리고 있었다. 내공이 깊어 보이는 여성 변호사 옆엔 정장을 입은 한지석이 우선경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너무 진득하고 따가웠다. 마치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고, 나무라는 것처럼.

우선경은 모른 척 잔을 들었다. 최문영과 인사를 나누고, 그녀가 따라 주는 술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직 나이가 어리시니 우리 모임에 들어오는 건 아닐 테고, 그러면 장 대표님 파트너로 오신 건가?”

“…….”

차마 그렇다는 대답이 안 나왔다. 머뭇거리는 우선경을 대신해 장 대표가 말을 얹었다.

“데이트 찬스를 썼어요.”

“아우. 징그럽게 왜 저래, 정말. 장건주 씨. 평소 하던 대로 하세요!”

까닭을 모르는 최문영은 장건주의 로맨틱한 화법에 질색했다. 솔직한 반응에 사람들이 또 야단스레 따라 웃는다.

“서화 그룹 도련님이 우리 장 대표님한테 빚진 게 있대요, 그 뭐였더라? 그거 요즘 기사 나는 거 있잖아요, 아 천사보육원! 거기 후원 도와주는 조건으로 세 번 만나 주기로 했다던데.”

술이 조금 많이 들어간 박 사장이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불었다.

정말? 와, 딜 한번 짜릿하네. 주변에선 호응과 웃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한지석은 말없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럼 장 대표님은 기회가 세 번밖에 없는 거네요?”

“지금이 벌써 두 번째야. 내가 얼마나 초조한지 알겠죠?”

“포기해, 액면가만 봐도 너무 차이나. 그냥 놀던 물에서 놀아야죠. 늙어서 어린애들한테 추태 부리지 말고.”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 왜! 우리 장 대표 액면가로는 박 사장이랑 또래로 보여. 원래 알파들은 나이가 잘 가늠이 안 되잖아. 부럽다, 혹시 뭐 따로 먹는 거 있어요?”

술자리답게 여러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오갔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한 자리 차치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술자리에서 풀어지는 건 남들과 똑같았다.

장건주가 선경의 옆으로 슬쩍 몸을 붙여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너무 나이가 많나?”

“뭘 새삼스럽게 물어요?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까칠한 대답에도 장 대표는 좋다고 웃었다.

우선경의 빈손을 슬쩍 가져가 잡더니 억지로 제 손가락을 얽어 넣는다. 벌써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가만히 내버려 뒀더니 이번엔 잡은 손을 코 밑에 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오늘은 그 알파 안 만났어? 선경이 네 냄새만 난다.”

장 대표가 약지를 잘근 씹으며 입에 담았다. 뜨뜻하고 축축하게 젖은 혀가 우선경의 연분홍빛 손톱과 손끝을 청소하듯 정성스레 훑는다. 마치 꼭 개가 핥는 것 같았다.

물씬 풍겨오는 페로몬과 불쾌한 감촉에 선경은 질색하며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 마요.”

“손도 안 돼? 그럼 어디가 괜찮아?”

덜커덩!

맞은편 테이블에서 술병이 엎어졌다. 최문영과 대화를 나누던 한지석이 테이블 다리를 걷어찬 것이다.

요란한 소리가 난 것과 달리 다행히 깨진 것은 없었다. 다만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새 양주병에서 아까운 술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스모키한 알코올 향이 사방에 퍼졌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다리가 길어서 그런 거지 뭐. 아니면 나랑 마셔서 긴장한 건가?”

최문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덧붙이는 농담에 주변인들이 웃는다. 단순한 실수라고 생각했는지 다행히 분위기는 유하게 흘러갔다.

한지석은 급히 일어나 휴지를 집어 들었다. 술병을 세우고 테이블을 적신 위스키를 닦아 내는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최문영은 사람이 와서 치울 거니 놔두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의 말처럼 곧바로 가게 직원이 들어와 엉망이 된 테이블을 깨끗이 수습하고, 새롭게 세팅했다.

소란 덕분에 우선경은 장 대표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주의가 흐트러진 틈을 타 어깨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황급히 룸 안을 빠져나왔다.

세면대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봤다. 정신을 차리고 싶어 찬물로 세수를 했는데, 머리가 되레 멍해진다.

하얀 세면대를 양손으로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선경의 턱 끝에 물방울들이 맺혔다. 뚝뚝, 떨어지는 물에 셔츠 윗부분이 진하게 젖어갔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답 없는 한숨이 길게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한지석은 여전히 잘난 모습이었다. 단 한 번도 괴로운 적 없었던 사람처럼 멀끔했다.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가슴이 철렁대는 자신과 달리, 한지석은 시선이 마주쳐도, 한 공간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굴었다.

로펌인지 뭔지는 잘 다니고 있는 모양인지,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도 눈부시게 잘 어울렸다.

참 속도 없지, 그딴 껍데기가 뭐가 좋다고.

이 와중에도 잘난 모습을 눈에 담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페이퍼 타월을 몇 장 뽑았다. 선경은 젖은 얼굴을 아무렇게나 닦았다. 뭉쳐진 종이 타월은 금세 축축해져 쓰레기통 안으로 던져졌다.

그때 화장실 안으로 한지석이 들어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우선경 옆에 나란히 섰다. 물비누를 짜내고 거품을 내 손을 씻는다. 쏴아- 세면대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조용한 화장실을 메웠다.

그는 물기 묻은 손을 탁탁 털어 내고, 팔을 뻗어 페이퍼 타월을 집었다. 얼굴 앞으로 불쑥 침범하는 재킷 소매에선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볼일을 끝낸 한지석은 몸을 반쯤 돌려 우선경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여기서 뭐 하는데.”

“뭐라고요?”

“우선경 씨 여기서 뭐 하냐고. 내가 밖에서 술 먹지 말라고 했죠.”

우선경은 기가 막혀 헛숨을 들이켰다.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지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눈을 바짝 치켜뜨고 따지듯이 되물었다.

“한지석 씨 취했어요? 지금 술 냄새 진동하는 거 알아요?”

미안하지만 술은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술 냄새가 나는 건 옷이 양주에 젖어서 그런 것일 뿐이다. 하지만 한지석은 취한 사람처럼 무작정 지시를 내렸다.

“집으로 가, 강 비서님 근처에 계시지? 전화해서 당장 불러.”

“뭐라는 거야, 내가 왜 가.”

“그러면 여기 계속 있겠다고?”

“내가 있든 말든…, 아니 왜 반말이야?!”

황당해하는 우선경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밀쳤다. 등 뒤는 꽉 막힌 벽이었다. 선경이 빠져나가려 하자 양손으로 벽을 짚어 퇴로를 막았다.

“우리 그 정도 사이는 돼. 고작 반말 가지고 트집 잡지 마.”

“비켜.”

“그동안 계속 이렇게 막 다녔어? 알파 페로몬 겁난다며, 뭘 믿고 이러는데? 옆에서 페로몬 흘려대는 것도 못 느껴?”

“나도 알아, 내가 무슨 머저린 줄 알아?”

선경은 욱하며 가슴을 밀쳤다. 한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 옆에서 희롱하는 거 다 받아 줄 만큼 비위 좋은 편 아니잖아. 뭐? 세 번을 만나 줘? 그딴 쓰레기 같은 조건을 걸어야 했으면 차라리 하질 말았어야지!”

“당신 잡을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는데 그러면 어떡해!”

우선경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상황이 온통 속상하고 답답했다. 무엇보다 한지석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게 가장 부끄러웠다. 선경은 눈을 피하며 일부러 뾰족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제 와서 물리기라도 하려고? 됐어, 내가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잖아. 당신이랑 이제 상관없다고! 지금처럼 그냥 무시하고 지내.”

“그러면 그렇게 괴로운 얼굴로 앉아 있지나 말든가.”

한지석 역시 괴로워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내 페로몬으로 덮어 달라고 했던 날. 그때 만나기 싫다던 알파가 저 사람이지?”

“비켜.”

화장실을 나가려는 선경의 어깨가 붙들렸다. 한지석은 재차 강조했다.

“집으로 가.”

“신경 끄라고 했어. 집을 가든 장건주를 따라가든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상관하지 마.”

“강 비서한테 지금 전화해. 전화하면 보내 줄게.”

한지석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정말로 집에 가지 않으면 안 놔줄 태세였다.

“알파들이 네 근처도 못 오게 페로몬 부어 놓을 수도 있어. 선택해.”

“미쳤어?”

정말로 미친 게 아닐까? 한지석의 번뜩거리는 눈빛을 보니 은은하게 돌아 있는 것도 같다. 우선경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고, 입술을 씹었다. 저 역시 화를 참는 데 한계가 있었다.

“적당히 해, 한 대 치고 싶은 거 겨우 참고 있으니까.”

“전화해. 집에 간다고 강 비서 불러.”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저를 집에 보내는 것에 환장한 사람 같았다.

선경은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양변기 칸으로 들어가 보란 듯 핸드폰을 꺼냈다.

한지석 눈앞에서 핸드폰을 변기 안에 던졌다. 아래로 깊숙이 가라앉는 걸 확인한 뒤 고개를 치켜들었다. 선경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됐어? 한 번만 더 전화하라 마라 시키기만 해 봐.”

“이게 네 선택이야?”

“뭐?”

어느새 한지석도 같은 칸 안에 들어와 있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는 채 한 뼘이 되지 않았다. 선경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비좁은 구석으로 몰렸다. 등 뒤에 단단한 벽이 닿았을 때, 불쑥 고개를 숙인 한지석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스며들어왔다.

“원한다니 해 줄게.”

“뭐를, 뭘.”

“페로몬 샤워.”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놀란 숨을 들이켜는 순간 입술 새를 가르고 뜨거운 혀가 밀려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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