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놀란 선경은 어깨를 움칠거리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허물고 다가온 한지석의 손이 동그란 뒤통수를 단단히 붙들었다.
“읍, 읏!”
눈앞에 보이는 단단한 어깨를 힘주어 밀었다.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지만 물러나기는커녕 손만 아팠다.
하지 마, 손 다쳐.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한지석이 입술에다 대고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우선경의 주먹을 제 손으로 감쌌다.
그의 말에 반항하듯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양 손목이 잡혔다. 한지석은 선경의 손목을 벽에 짓누르고, 고개를 내려 다시 입술을 찾아 물었다.
부딪힌 입술은 엉망으로 찌부러졌다.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키스에 이가 부딪히고, 혀가 얼얼해질 정도였다. 농밀한 타액에 섞여 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페로몬이 목구멍으로 울컥 넘어왔다.
심장이 조여왔다. 선경은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손목을 잡고 고정하던 한지석의 왼팔이 허리에 내려와 감겼다. 몸을 옥죄듯 단단하게 껴안자 신기하게도 깊은 안정감이 느껴졌다.
선경은 자유로워진 오른손을 뻗어 지석의 목을 끌어당겼다. 나머지 한쪽 손까지 합세하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맞붙은 입술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단단한 무릎이 선경의 허벅지 사이를 가르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오히려 뒤엉켜 서로를 갈급하게 끌어당겼다. 질척해진 입술이 뒤엉킬 때마다 젖은 소리와 앓는 소리가 동시에 새어 나왔다.
선경이 고개를 비껴들며 급하게 숨을 내쉬자 지석의 입술이 따라와 헐떡거리는 입술을 삼켰다. 아끼는 사탕을 굴려먹듯 선경의 혀끝을 달콤하게 빨아당겼다.
격정적인 키스로 금세 진이 빠져 버렸다. 선경은 벅찬 숨을 헐떡거렸다. 무릎에 힘이 풀려 몸이 아래로 흘러내리자 지석이 다리를 깊이 밀어 넣으며 몸을 붙잡았다.
거의 안아 들듯이 추켜세운 뒤 선경의 뺨과 목에 코를 박았다. 흥분으로 달아올라 뜨거워진 살결엔 온통 한지석의 페로몬이 배어 있었다.
확인하듯 냄새를 맡은 뒤 고개를 드는 한지석에게도 삭이지 못한 흥분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놔줄 테니까 돌아갈 수 있으면 가 봐.”
“하아… 너 진짜 나쁜 새끼야.”
“반말할 거면 이름이라도 제대로 붙여.”
“개자식아.”
눈에 불을 켜고 욕설을 뱉는데도 한지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 강 비서에게 직접 전화를 걸고, 현재 위치를 알렸다. 5분 내로 도착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
“…….”
기다리는 시간 동안 다정히 나눌 이야기는 없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서로 눈싸움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지석은 팔짱을 낀 채 칸막이에 삐뚤게 어깨를 기댔다.
강 비서가 나타날 때까지 감시자 역할을 할 생각인지 그의 시선은 오직 우선경에게만 고정돼 있었다.
우선경도 고개를 치켜들었다. 도대체 뜻을 가늠할 수 없는 깊은 눈동자를 한참 쳐다보다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뭐가.”
“나 건드린 거 실수라며, 러트 때문에 분간 못 했다며. 그런데 지금은 뭔데. 당신 또 러트 왔어? 사시사철 발정 나는 개새끼, 뭐 그런 건가?”
“비꼬지 마. 페로몬 덮어씌우려고 그런 거니까.”
“날 무슨 등신 머저리로 보냐고. 키스 안 해도 충분히 할 수 있잖아!”
때마침 바깥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강 비서의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이어지더니 가까운 곳에서 도련님, 하고 선경을 찾는 게 들렸다.
“맞아, 내가 하고 싶어서 했어.”
한지석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뻔뻔스러운 대답에 우선경은 가슴이 들썩이게 숨을 삼켰다. 이를 꽉 물었다.
“역시, 한 대 쳐야겠어.”
예고와 함께 꽉 쥔 주먹을 쳐올렸다.
“어머머! 너 얼굴이 왜 이러니?!”
현관 앞까지 마중을 나왔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아들내미의 얼굴엔 불그스름한 피멍이 맺혀 있었다. 지석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아래턱을 문질렀다. 아릿한 둔통이 느껴졌다.
“부딪혔어요.”
“누구한테 맞은 거 아니고? 싸웠니?”
“제가 누구랑 싸워요. 아버지는요?”
“시간이 벌써 몇 신데. 벌써 주무시지. 지석아, 밥은? 아주머니한테 뭐 좀 차려 달라고 할까?”
“괜찮아요, 늦었는데 어서 쉬세요. 저도 들어가 볼게요.”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지석은 모른 척 제 방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당겼다.
말끔하게 정리된 침대 위로 재킷과 넥타이가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한지석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고 침대 위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깊은 탈력감과 함께 팔다리가 절로 늘어졌다. 지석은 고개를 젖혀 하얀 벽지가 발린 천장을 의미 없이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손등으로 뻑뻑한 눈가를 덮었다. 이를 꽉 물자 턱이 욱신거린다. 불현듯 아까의 일이 떠올라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솜주먹인 줄 알았더니, 꽤 아프잖아.
굳은살 하나 없는 깨끗한 손은 의외로 타격감이 셌다. 물론 때린 사람도 같이 아파했지만.
처음 해 본 주먹질에 우선경은 눈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자존심상 아픈 티는 내기 싫었는지 주먹을 부여잡은 채 곧장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강 비서가 그 뒤를 바짝 붙어 따라갔으니 아마 집으로 잘 모셔 갔으리라.
침대를 짚고 늘어진 상체를 주섬주섬 일으켜 세웠다. 침대 프레임에 등을 기댄 채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몇 건의 부재중 연락이 와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가장 기대하는 사람에게서 온 것은 없었다.
우선경이 과거에 보냈던 문자를 다시 꺼내 보았다. 괜찮나요, 고작 한 줄짜리 메시지는 하도 여러 번 들여다봐서 머릿속에 깊게 새겨진 지 오래다. 종이에 쓴 글씨였다면 진작에 닳고 헤졌을 것이다.
번호, 바꾸려나.
핸드폰을 미련 없이 변기에 처박는 성질머리로 봐선 다신 안 보겠다고 번호까지 바꿔 버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머릿속에선 그의 생각이 도통 끊어지지가 않는다.
눈에 안 보이면 괜찮아질까 싶었다.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우선경은 그렇게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서나 존재감이 뚜렷했다. 아마도 군중 속에 섞여 있어도 단번에 찾아낼 수 있으리라. 특유의 고상한 아름다움으로, 우선경은 누구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 앉아 있을 때면 살짝 눈을 내리깔곤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몰래 훔쳐본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한 쌍의 눈썹 아래 길게 뻗은 눈꼬리, 또 그 아래 매달린 가느다랗고 촘촘한 속눈썹까지. 우선경을 보고 있으면 섬세한 그림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상처 하나 없는 투명한 피부에선 그와 꼭 닮은 깨끗한 냄새가 난다.
버릇처럼 머리를 넘기는 손은 제법 뼈대가 있으면서 선이 고왔다. 둥그스름하게 깎인 손톱마저 늘 건강한 선홍빛이 돌았다.
남에게 무관심한 특유의 시선은 눈이 마주치면 절대 먼저 피하는 법이 없다. 꼭 작살에 꿰인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게 만든다. 표정 관리엔 서툴러도 늘 무표정을 고수하곤 했는데, 가끔 둘이 있을 때면 종종 편하게 웃곤 했다. 무심했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게 참 좋았다.
우선경이 언제나 밝게 웃었으면 좋겠다가도, 남들 앞에서는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양가적인 감정에 자꾸만 마음이 복잡해진다.
지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비볐다.
“어렵네.”
헤어나기는커녕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깊게 빠져들고 있었다. 이미 지금도 제어가 잘 안 되는데 과연 나중이라고 달라질까.
주먹으로 답답한 가슴 언저리를 퉁퉁, 두들겼다.
한지석은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가정해 봤다. 제 욕심껏 우선경에게 마음을 줘도 되는 타당한 이유가 생기길 바랐다. 아침녘이 될 때까지 고민해 봤지만 어차피 결론은 똑같았다.
***
우재경의 미국 출국이 내일로 잡혔다.
그동안 준비를 한답시고 2, 3일씩 짧게 오가긴 했지만 이번에 나가면 오랫동안 머물며 자리를 잡을 예정이다.
떠나기 전, 남매끼리 모여 오붓한 식사 자리를 가졌다. 최근 들어선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 마주하고 밥 한 끼 먹어 본 게 손에 꼽았다. 앞으로 한동안은 만나기 힘들어질 테니 다들 군소리 없이 우재경의 부름에 응했다.
서울 근교의 조용한 레스토랑은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이탈리아 시골 마을의 가정집을 옮겨놓은 것처럼 이국적이면서 안락함이 느껴졌다. 물론 맛 또한 보장되어 있어 우재경이 자주 찾는 단골집이었다.
실내까지 하얀 햇살이 들이찼다.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엔 갓 구운 화덕피자와 올리브오일을 끼얹은 신선한 토마토 샐러드, 그릴 자국이 선명한 안심 스테이크와 펜네 파스타가 올라와 있었다.
남매는 각자의 접시를 채워 주며 다정하게 음식을 나눠 먹었다.
“한지석 씨랑은 완전히 헤어졌어?”
재경의 질문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접시 위에 놓인 스테이크를 잘게 자르던 선경은 칼질을 멈췄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그건 마치 ‘요즘 어때? 어제는 재밌게 놀았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안부를 묻는 말 같았다. 선경은 양손에 든 식기를 접시 위에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나가 한지석을 어떻게 알아.”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선우 오빠도 알고 할아버지도 알고 계시는데.”
“…….”
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던 우선우는 동생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