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오피스텔은 계속 비어 있는 것 같고, 요 몇 주는 만나는 것 같지도 않아서 묻는 거야. 확실히 정리한 건가 싶어서.”
“정리했다니, 아니 우리 그런 사이 아니거든?”
“그런 사이가 되기 전에 한지석 씨가 멈춘 거지.”
우재경은 말을 제대로 정정해 줬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이프를 움직이며 평가를 이어 갔다.
“똑똑한 사람이야. 감정에 치우치지도 않고 사리 판단 확실해. 무엇보다 이해가 빨라서 좋아. 대충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더라.”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무슨 말을 했는데.”
“너 끝까지 책임질 거 아니라면 애초부터 마음 가져가지 말라고 했어.”
“뭐?”
“어차피 오래 못 갈 사이라고 알려 줬어. 서로 몸과 마음까지 다 준 상황에 끝내느니, 애초에 시작하지도 말라고.”
예상치도 못한 말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혀가 굳어 버린 듯 잠시 말문이 막혔다.
“누나가 뭔데 그런 소릴 해.”
“우선경. 나는 네 보호자야. 오빠와 나는 너를 보살필 의무가 있어.”
“그게 보호하는 거야? 통제하는 게 아니고?”
선경은 분한 마음을 억눌렀다. 화가 나 뜨거워진 이마를 짚으며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나 이제 애 아니야. 내 결정 내가 책임지는 성인이라고.”
“너는 감당 못 해.”
“그걸 어떻게 아는데! 뭐 미래라도 보고 왔어?”
“내가 해 봤으니까!”
재경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하얗게 질린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내가 다 해 본 거야. 억지로 헤어지는 게 얼마나 끔찍한 기분인지 아니까 그래. 그런데 너한테도 똑같은 짓을 시킨다고? 힘들 게 뻔한데?”
우재경 역시 마음이 착잡한 듯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제 뜻을 알아주지 못하는 동생이 야속하고 안타까웠다.
이미 식사 자리는 엉망이 됐다. 차게 식은 분위기 속에 다들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우선경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게 한숨을 뱉었다.
“누나.”
“…….”
“나도 좀 살자. 내 인생인데 제발 좀…. 조금만 내 마음 편하게 살면 안 돼?”
먹먹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시키는 대로 결혼도 할 거야. 언제든 정리하라고 하면 그것도 할게. 누구 좋아하는 것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
“그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건지 몰라서 그래.”
“미안한데, 지금도 그렇게 행복하진 않아.”
“선경아!”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재경의 차로 다 같이 왔던 터라 맨몸으로 식당을 떠나야 했다. 뒤따라 나오는 큰형을 무시하고, 선경은 길가에 보이는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서초동 법조타운으로 가 주세요.”
택시 기사에게 로펌 주소를 말하며 선경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창문 밖을 내다보는 표정에선 제법 비장한 각오가 느껴졌다.
***
패기 좋게 태광까지 찾아오긴 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선경은 새로 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열받아서 번호까지 바꾸고, 연락처도 초기화했건만 우습게도 제 머리는 한지석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이 숫자 열한 자리를 꾹꾹 눌렀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주먹을 꾹 쥐었다 폈다. 손바닥이 온통 땀으로 미끌거렸다.
모르는 번호라 전화를 받을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연결이 끊어지기 전 한지석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지금 일 층에 와 있어.”
-…….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도 한지석은 목소리만으로 통화 상대가 누군지 알아챈 듯싶었다.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스피커로 넘어왔다. 대답을 기다리던 선경은 핸드폰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일 층 어디.
“로비 앞 안내 데스크.”
-기다려. 바로 내려갈게.
통화가 끝나고 몇 분쯤 기다렸을까, 무수히 열렸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중 한 곳에서 한지석이 나타났다.
회색 정장을 입은 모습이 제법 직장인스럽다. 그 잘난 모습을 보자 애써 눌러놨던 서러운 마음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출입증을 찍고 안내 데스크 앞까지 걸어 나온 한지석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우선경을 보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 선경의 손을 잡고 대뜸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언제 챙겨 나왔는지 쥐고 있던 차 키를 눌렀고, 직접 차 문을 열어 조수석에 우선경을 태웠다.
뒤이어 운전석에 올라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딱히 운전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시동도 걸지 않은 채 조용히 우선경만 쳐다보았다. 참다못한 선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누나 언제 만났어?”
“뭐?”
“우재경 언제 만났냐고.”
아아, 한지석은 그제야 탄식 같은 웃음을 뱉었다.
“다짜고짜 찾아왔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대답해, 언제 만나서 무슨 얘기 했어.”
“다 듣고 온 거 아냐?”
조금 풀어진 목소리에도 우선경은 날 선 태도를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반드시 한지석 입을 통해 들어야겠다는 무언의 의지가 느껴졌다.
결국 고집을 꺾지 못하고 한지석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러트 끝나고 너 만나기로 한 날 아침에. 잠깐 얘기했어.”
“나 책임지지 못할 것 같으면 애초부터 시작도 하지 말라고 했다며.”
“잘 아네.”
“그래서 그딴 식으로 말했던 거야?”
한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긍정이란 걸 알았다. 선경은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조수석 창문에 옆머리를 쿵 박았다.
“당신 바보 아니야? 우리가 뭘 하기나 했어? 왜 겁부터 먹고 도망가?”
“했어, 너랑 나 꽤 많이 했어.”
“…….”
“이미 우리가 남들보다 조금 더 특별하단 거 잘 알고 있잖아.”
한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정한 말을 내뱉었다. 우선경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눈가가 촉촉해진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말했던 거 진심이었어.”
“알아.”
“누구 좋아해 본 거 처음이야.”
선경은 참고 참았던 마음을 꺼내놓았다.
“한지석 씨. 나랑 만나, 조건 따지지 말고 우리 그냥 1년만 만나자.”
“우선경.”
“그때쯤 되면 질리겠지, 어떻게 사람이 몇 년씩 사귀어. 원래 백 일 지나면 흥미 떨어지고 식는다면서. 그리고 나 원래 금방 싫증 내.”
“나는 안 그래. 특히 너는, 쉽게 못 놔줄 것 같아.”
한지석은 제안을 완곡히 거절했다. 우선경을 바라보는 눈이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1년 뒤에 다른 알파한테 보내 주라고? 그 꼴을 보느니 시작도 안 하는 게 맞지.”
“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지금도 이렇게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은데.”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 말에 짙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 역시 마음을 참아 내듯 양손으로 운전대를 움켜잡았다. 비스듬히 기울인 고개를 팔 위에 얹고 우선경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조금만 덜 예쁘지 그랬어.”
“…….”
한지석의 태도는 완강했다. 우선경은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선경은 깊게 숨을 내쉬고 떨리는 호흡을 최대한 가다듬었다. 차마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은 없어 시선은 내내 무릎에 둔 채 말했다.
“다음 주에 장 대표 만날 거야.”
“그래.”
“계속 만날지도 몰라.”
“그렇게 해.”
한지석이 따뜻한 손으로 선경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작게 주름진 미간을 엄지로 살살 문지른다. 하지 마, 선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손길을 떨쳐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창피했다.
“당신하고는 다신 말도 안 섞을 거야. 쳐다도 안 볼 거야. 지나가다 발에 채이는 돌멩이보다도 하찮게 여길 거라고.”
“못 데려다줘서 미안해.”
그의 다정한 말에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선경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감쌌다.
자신의 첫사랑이 시작도 못 하고 끝나 버렸다는 게 속상하고, 분하고, 아까웠다.
***
“그동안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인턴 여러분들 나중에 꼭 다시 태광에서 만나 뵙길 기원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최문영 대표의 인사말이 끝나자 짧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드디어 4주간의 실무 실습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기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대표가 직접 예약했다는 호텔 레스토랑으로 이동해 회식 겸 간단한 뒤풀이를 진행하기로 했다.
띵-
맑은 차임벨 소리와 함께 승강기 문이 열렸다.
호텔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설마 하고 기대를 품었던 인턴이 눈앞에 나타난 레스토랑을 보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작게 소리쳤다.
“와! 여기 최근에 3스타 받아서 인기 엄청 많은 곳이잖아요! 예약하기 엄청 빡세다던데.”
이를 귀신같이 들은 최문영이 자랑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인턴을 향해 찡긋 눈인사를 건넨 뒤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맞아요, 엄~청 힘들었어. 그러니까 다들 체면 내려놓고 많이 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