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53화 (53/127)

#53

천장 위엔 특이하게 열대 식물들이 매달려 있었다. 곳곳에 등불처럼 빛나는 펜던트 조명도 보였다. 이것도 하나의 컨셉인지 도처가 온통 초록 잎과 조명 빛의 향연이었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커다란 통창에 새하얀 벽, 나무 목재로 마감된 바닥까지. 마치 거대한 유리 온실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최문영은 천군만마를 거느린 장군처럼 턱을 치켜들고 걸었다. 10명의 인턴들과 4명의 변호사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최문영 변호사님.”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선두에서 걷던 최문영이 발길을 세웠다. 옆을 돌아본 그녀는 아는 사람을 발견했는지 화사하게 웃으며 방향을 틀었다.

덕분에 뒤따르던 직원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대표의 행보를 지켜봐야 했다.

“웬일이야, 장건주 씨가 이런 곳엘 다 와요?”

“왜요, 안 어울립니까?”

“네, 완전.”

솔직한 말에 장건주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감 넘치는 알파는 상대의 말을 조금도 불쾌하게 듣지 않고 오히려 능숙하게 웃어넘긴다. 최문영의 시선이 장건주 옆에 서 있는 상대에게 옮겨갔다.

“또 보네요. 오늘도 데이트?”

“…….”

우선경은 대답 없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자 장건주는 내심 기쁜 듯 허리에 손을 둘렀다. 우선경은 옆구리를 파고드는 손을 잠시 지켜볼 뿐 딱히 손을 내치지 않았다.

“최 변호사님은 어디 단체로 미팅 가는 길입니까?”

“회식이에요.”

“역시 스케일이 남다르네요.”

“나도 공들이는 중이거든요. 여기 있는 인턴들한테 잘 보여야 나중에 우리 로펌으로 올 테니까.”

인턴들, 이란 말에 선경은 내리깐 눈을 들어 올렸다. 최문영을 뒤따르는 무리 속에 눈에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혼자 우뚝 솟아 있는 이는 보지 않으려 해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시선이 잠시 얽혔지만 그리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무관심하게 쳐다보고 말 뿐이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다음에 또 뵙죠.”

잠시 만난 일행은 엇갈리듯 방향을 달리했다.

“와인 한잔할까? 여기 좋은 거 들어왔던데.”

메뉴판을 훑어보던 장 대표가 여상하게 물었다. 오늘따라 고분고분한 우선경의 반응에 그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차 가져왔어요.”

“기사 불러. 아니면 네 경호원인지, 비서인지 부르든가.”

“둘 다 휴가 보냈어요.”

“아니면 마시고 자고 가든가, 방 잡을까?”

“이제 막 나가기로 한 거예요?”

“농담이야, 어차피 나한테 관심 없다는 거 알고 있어. 너랑 약속한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고. 그러니까 서로 기분 좋게 좋은 술 한잔 마시면서 마무리하자는 것뿐이야. 다른 의도 같은 거 없어.”

장 대표는 눈썹을 으쓱 들어 올리며 장난스레 웃었다. 불순한 의도가 없다는 건 사실인 듯 우선경을 쳐다보는 눈길은 지금껏 중에 가장 담백했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괜히 신경 쓰였다. 여태 퉁명스럽게 굴었던 게 못내 미안하기도 했고. 우선경은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 고마워요.”

“고마우면 아저씨 말고 건주 씨라고 한 번만 불러 주면 안 될까?”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세요.”

“역시 안 통하네.”

장건주는 통 크게 웃으며 손에 쥔 메뉴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위로 드러난 시원한 눈매가 반달 형태로 휘어졌다.

사실 장 대표는 누가 보더라도 괜찮은 알파였다.

젊은 나이에 서화 건설 CEO 자리에 오를 만큼 능력이 넘쳤고,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훤하고 준수한 외모를 가졌다.

마흔이 되도록 여태 혼자인 이유는 본인이 결혼을 원하지 않아서였지, 절대 그가 못나서가 아니었다. 선경은 물끄러미 그를 지켜보다 말했다.

“아저씨는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잔인하다. 그런 말은 밥 먹고 해. 나 가슴 아프니까.”

장건주가 손을 심장께에 가져다 대고 셔츠를 움켜잡았다. 잘생긴 눈썹이 금세 시무룩하게 쳐졌다. 우선경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제 앞에 놓은 메뉴판을 검지로 두드렸다.

“싸구려는 안 마실 거예요.”

“그럼, 누구 입에 들어가는 건데.”

허락이 떨어지자 장 대표는 신바람 난 듯 고개를 들썩였다. 이미 와인은 마음속에 정해 놓은 게 있었는지 직원을 불러 곧바로 주문했다.

“말씀하신 와인은 테이블당 1병만 주문 가능하신데 괜찮으실까요?”

“오히려 좋아요.”

“네, 그럼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전채 요리가 막 나왔을 무렵이었다. 직원이 쟁반에 받치고 온 와인 잔을 물잔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이윽고 큼지막한 라벨이 붙은 와인병을 들어 보이며 직접 확인시켜 주었다.

“주문하신 2001년산 빈티지입니다. 테이스팅하시겠습니까?”

“바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직원은 깨끗하게 와인 포일을 벗겼다. 이어 능숙한 솜씨로 코르크 마개를 뽑아 올렸다.

뚱뚱한 와인병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기울이자 투명한 잔에 짙은 적포도주가 적당히 채워졌다. 고혹적인 색감이 선경의 관심을 끌었다.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입술을 살짝 축였다. 달콤하게 무르익은 과일 맛과 부드러운 꽃향기가 섬세하게 어우러져 입 안을 적신다.

약간 묵직했지만 그 끝맛은 딱 기분 좋게 씁쓸했다. 마음에 들어 와인병의 라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정도였다.

이후 식사는 계속 이어졌다. 적당한 대화 속에 접시는 계속 바뀌어 갔다.

생각보다 음식은 맛있었고, 장 대표는 불편한 추파를 던지지 않았다. 어느새 옆에 놓인 와인은 한 잔을 모두 비웠다.

“한 잔 더 마실래?”

“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장건주는 입매를 진하게 끌어올리며 직접 와인병을 잡았다. 그가 선경의 잔에 적당히 술을 채웠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선경은 핸드폰을 눌러 착신을 거절했다.

하지만 재차 같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왠지 무시할 수가 없어 전화벨이 울리는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눈치 빠른 장 대표가 고갯짓을 했다.

“괜찮아, 나가서 받고 와.”

“실례할게요.”

우선경은 짧게 고개를 숙인 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밖으로 모습을 감추자 기다렸다는 듯 쟁반을 든 직원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와인 잔을 교체했다. 새롭게 바뀐 잔 역시 마신 흔적이 남아 있었고, 와인도 적당히 담겨 있었다.

장 대표는 모른 척 창밖을 내다보며 물을 마셨다.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떠 있었다. 그는 작업을 마친 직원이 자리를 유유히 떠날 때까지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잠시 후 선경이 돌아왔다. 장건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범하게 물었다.

“급한 일 생겼어?”

“아니요, 학교에서 온 전화였어요. 별건 아닌데 본인 확인 할 게 있다고 해서.”

선경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를 빠르게 훑었다.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그의 시선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본 장건주가 잽싸게 잔을 들었다.

“곧 개강하겠네. 공부하는 거 꽤 힘들지?”

“재밌어요, 생각보다 배울 것도 많고.”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지난번 같은 스케일만 아니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제 앞에선 자신만만하시더니 아니었나 보네요.”

“솔직히 힘들었어.”

선경은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입술을 붙이고 와인을 삼킨다. 그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장건주는 입가에 번진 웃음을 와인 잔으로 가리며 자신 역시 한 모금 머금었다. 러트 촉진제를 넣은 와인은 감쪽같을 정도로 맛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벌써 마지막 만남이다. 세 번이나 기회가 있었지만 별 진전은 없었다.

그동안 제 매력이 통하지 않는 오메가는 없다고 자만하며 살았다. 하지만 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우선경은 장건주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이 차가 많이 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놓치기엔 너무 아까웠다. 어떻게 해서든 그 고고한 심지를 부러트리고, 제 배꼽 아래에 깔아 눕히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지만, 시간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은 점점 초조해져 갔다.

러트 촉진제를 구한 건 우연이었다. 히트를 유발하진 않았지만 오메가에게도 제법 비슷한 영향을 준다고 들었다.

조금 쓴맛이 났지만 비슷한 끝맛을 가진 와인에 섞으면 티가 거의 안 났다. 이미 며칠 전에도 오메가를 상대로 시음 테스트를 해 본 상태였다.

우선경의 예민함이 조금 걱정됐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많이 먹어, 선경아.”

장 대표는 시꺼먼 속내를 멀끔한 민낯 아래 감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