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54화 (54/127)

#54

“접시 치워드리겠습니다.”

직원이 정중하게 손을 뻗어 디너 접시를 거둬갔다. 이제 남은 건 디저트뿐이다.

선경은 손등으로 살짝 달아오른 뺨을 식혔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에어컨 바람은 약간 서늘할 정도였는데 이상하게도 몸엔 열이 올랐다. 갈증으로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물잔을 들려다 비어 있어서 와인을 마저 마셨다. 벌써 한 잔을 다 비웠다. 장 대표가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더 마실래?”

“아니요,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취하는 것 같다며 거절했다. 장 대표는 코끝을 으쓱거리며 제 잔에 와인을 더 채웠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광대를 크게 부풀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잠시 후 디저트가 나왔다. 접시에 담긴 건 실제 과일 모양과 흡사한 복숭아 케이크였다.

“…….”

살구색과 진분홍빛이 뒤섞인 케이크는 언젠가 봤었던 과일과 똑 닮아 있었다. 잠시 회상에 젖어 있던 선경은 나이프로 조심스럽게 복숭아를 갈랐다.

한 입 떠먹어 본 케이크는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았다. 생크림과 직접 졸여 만든 복숭아잼이 입 안에서 뭉그러졌다. 모래알을 씹는 표정으로 케이크를 삼키던 선경은 더 이상 먹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후로 장 대표가 다 먹을 때까지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창밖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쉽게 보낼 수 있었다.

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선경은 늘어지듯 테이블에 엎드렸다.

졸린 것도 아닌데 눈꺼풀이 무거웠고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취했다고 하기엔 이상하게도 정신은 멀쩡했다. 가장 큰 문제는 페로몬을 주체하기가 힘들다는 거였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몸이 좀 안 좋은 거 같아요.”

“저런, 이만 일어나야겠다. 괜찮겠어?”

장건주가 걱정된다는 듯 선경을 부축했다. 가증스럽게도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숨기고 있었다.

우선경은 장 대표의 얼굴을 제대로 볼 겨를이 없었다. 입을 틀어막고 숨을 참았다. 혹시나 제 페로몬을 장 대표가 맡을까 우려돼 정신이 없었다.

입술을 아득바득 씹으며 겨우 말을 쥐어짜 냈다.

“…잠깐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천천히 갔다 와. 계산하고 있을게.”

장 대표가 캐셔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빠르게 몸을 돌렸다. 화장실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아직 레스토랑 안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선경은 자꾸만 풀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최대한 똑바로 걸으려 애썼다.

입으로 내쉬는 숨에선 온통 상큼한 냄새가 풍겼다. 분명 마지막으로 먹은 건 다디단 복숭아 케이크였는데 온통 선경의 페로몬 향만 올라오고 있었다.

설마 히트가 오려는 건가? 그럴 리 없다. 아직 주기가 돌아오려면 한 달이나 더 남았다.

“꺅!”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우선경은 화장실로 꺾어 들어가는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세게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페로몬에 신경 쓰느라 앞을 살피지 못한 제 잘못이었다.

“아우, 아파! 이봐요!”

“죄송합니다. 괜찮, 으세요?”

“조심 좀 하세요! 앞을 제대로 보고 다녀야 될 것 아니에요!”

바닥에 넘어진 여성은 우선경을 향해 짜증스럽게 항의를 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제게 괜찮냐고 묻는 남자는 되레 괜찮지 않아 보였다. 얼굴은 온통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호흡이 가빴다. 그녀 역시 오메가라 남자의 증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급해서.”

남자는 재빨리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도마뱀 꼬리처럼 페로몬이 길게 흔적을 남겼다. 와… 심한데? 여자는 부딪힌 어깨를 문지르면서 남자 화장실을 돌아봤다.

눈에 띄는 얼굴이라 한눈에 알아봤다. 분명 아까 최 대표와 인사를 나누던 커플 중 한 명이었다.

직원에게 알릴까, 생각했다가 말았다. 남사스러운 일인데 시끄럽게 소문낼 필요 있겠는가.

뭐, 알아서 하겠지. 아까 알파랑 같이 왔던데 그 사람이 책임져 주지 않겠어?

여자는 괜한 걱정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가 다시 룸으로 돌아왔을 때도 테이블엔 여전히 대화가 한창이었다. 식사는 이미 예전에 마무리됐음에도 이야기는 끝이 날 줄 몰랐다.

떠들기 좋아하는 변호사가 넷에, 경청하는 것이 습관이 된 인턴이 열 명이니 당연했다.

제자리로 돌아온 변호사는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앉았다. 곧바로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동료 어쏘 변호사에게 은밀히 말을 걸었다.

“나 방금 화장실에서 남자 오메가랑 부딪혔는데, 페로몬 장난 아니더라. 곧 히트 올 것 같던데?”

“뭐?”

“누군지 알면 더 깜짝 놀랄걸? 그 아까 대표님이랑 인사하던 오메가 기억나? 그 예쁘게 생겼던 남자애.”

“웬일이야, 멀쩡해 보이던데 갑자기 그래? 화장실에서 일 치르는 거 아냐?”

“설마 그러겠어? 위에 널리고 널린 게 호텔방인데. 그리고 요즘 같을 때 밖에서 그랬다간 잡혀가요. 1년 이하의 징역, 500만 원 이하의 벌금 및 구류! 변호사가 그걸 몰라?”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한지석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담한 표정과 달리 의자는 다급하게 뒤로 밀렸다.

철제 다리가 바닥을 세게 긁자 신나게 남의 이야기를 떠들던 변호사들의 이목이 순간 집중됐다.

“한지석 씨, 어디 가요? 지금 남자 화장실은 안 가는 게 좋을 텐데? 자기 알파잖아.”

“잠깐 연락할 곳이 있어서요.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습니다.”

“화장실로는 가지 마! 난 분명히 말했어요!”

등 뒤로 까르르 웃는 소리가 쏟아졌다. 지석은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 밖으로 나왔다.

앞뒤를 따질 겨를도 없이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부터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가 진하게 남아 있었다.

이 정도라면 거의 발정에 다다랐을지도 모른다. 한지석은 화장실 앞에서 수군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의외로 화장실 안은 조용했다. 괴로워하는 신음은커녕 사소한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연주곡만 화장실을 떠돌 뿐이었다.

그 와중에 칙- 시간마다 자동으로 분사되는 디퓨저가 공기를 뒤덮었다. 인공적인 비누 향이 그나마 남아 있던 우선경의 흔적까지 지워 버렸다.

혹시나 싶어 칸칸마다 열어 봤지만, 우선경은 찾을 수 없었다.

화장실을 쥐 잡듯 뒤지던 한지석은 잘 정돈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허무하게 웃어 버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긴장했는지 두피가 흠뻑 젖어 있었다.

“몸은 좀 괜찮아?”

우선경은 장 대표와 함께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태를 묻는 질문에 힘없이 고개만 저었다. 멋대로 터져 나오는 페로몬만 겨우 진정시켰다 뿐이지 컨디션은 여전히 엉망이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장 대표는 얼굴을 바로 돌리고 손목에 찬 시계를 살폈다. 그의 눈동자가 시간을 계산하는 듯 바쁘게 움직였다.

슬슬 때가 됐는데,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내가 데려다주면 좋은데 나도 술을 마셔서, 힘들면 택시라도 부르든가.”

“강 비서 오는 거 기다리면 돼요.”

“그렇게 해. 오는 데 시간 좀 걸리지? 잠깐 커피라도 마실까?”

거듭되는 제안에 선경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예의를 차리기도 힘들었다.

“싫어요.”

“저런 많이 안 좋은가 보네. 하긴 나도 상황이 좀 그래. 곧 러트가 올 것 같아서 말이지.”

뭐라고?

지금 무슨 소릴 한 건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린 장건주가 우선경을 내려다보며 진하게 웃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위기를 감지한 선경이 계단으로 피하려 하자 그가 팔뚝을 강하게 움켜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장건우는 페로몬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성적인 의도가 노골적으로 담겨 있는 페로몬이 선경을 찍어 눌렀다.

곧 러트가 다가온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평소보다 더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안간힘을 다해 참고 있던 우선경에게 그 페로몬은 기폭제나 다름없었다. 직접적인 자극에 간신히 억누르던 본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흐읏!”

무릎이 훅 꺾이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제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선경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죽을힘을 다해 참아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장건주는 그 안으로 우선경을 밀어 넣었다.

그가 카드키를 태그하자 객실 층 버튼에 모두 불이 들어왔다. 손님의 선택을 기다리며 엘리베이터는 잠시 멈춘 채 대기했다.

“객실로 올라갈래?”

“하아… 하…. 안 돼.”

“이걸 혼자 참아 보겠다고? 버틸 수는 있겠어? 여기 보는 눈도 많은데, 발정 난 거 보여 주면 다들 난리 나겠다. 그치?”

장건주가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코너에 몰린 우선경에게 하반신을 들이밀었다. 단단해진 성기가 앞섶을 뚫고 나올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아, 제발 그런 얼굴로 노려보지 마. 아저씨 흥분해서 벌써 쌀 것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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