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강 비서에게 부탁해 오피스텔은 알아서 처분해 달라고 했다. 온갖 기억이 떠올라 그 집엔 발조차 디딜 수 없었다.
한지석이 사 준 옷도 모두 버렸다. 이런다고 해서 생각이 안 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다 해 봐야 했다.
쉽게 잊기는 힘들겠지만, 몇 달 조금 시달리다 말면 될 거라 생각했다.
우선경은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멈춰 섰다. 인문대 복도에서 한지석을 만날 줄 몰랐다.
한지석은 길쭉한 몸을 회색 벽에 느긋하게 기대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바로 옆엔 우선경이 들어가야 할 강의실 문이 있었다. 드나들던 사람들은 곁눈질하며 남자를 쳐다보기 바빴다. 대체 왜 저 사람이 여기 와 있나,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우선경이 제 자리에 얼어붙은 사이, 바닥을 내려다보던 한지석이 고개를 들었다.
잔잔하던 눈동자에 번뜩 이채가 돌았다. 비스듬히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운 그가 선경이 서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헉!”
죄지은 것도 없는데 본능적으로 다리가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한지석은 넓은 보폭으로 몇 걸음 만에 거리를 좁혀왔다. 도망가야겠다 결심하고 뒤돌았을 땐 이미 그에게 어깨를 잡힌 뒤였다.
“으악!”
“어딜 가는데.”
단단한 팔이 뻗어와 상체를 끌어안았다. 앞으로 나가려고 버둥거리는 우선경을 제압하는 모습은 마치 범인을 잡은 형사와 다를 게 없다.
그는 우선경의 바지 주머니에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기겁하는 우선경을 가볍게 누르며 핸드폰을 빼앗아가더니 연락처로 들어가 자신의 번호를 찾는다. 손가락을 놀리는 게 너무도 쉬워 보였다.
앞에서 비밀번호가 풀리는 걸 목격한 선경이 눈을 동그랗게 부릅떴다.
“뭐야, 내 비밀번호 어떻게 아는데!”
“2580 푸는 게 뭐 어렵다고. 그리고 나 차단하지 마. 연락 안 되니까 답답해. 너희 집 찾아갈 뻔했어.”
한지석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얘기했다.
비밀번호를 푼 것처럼 손쉽게 차단을 풀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 준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선경은 어찌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막을 새도 없이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금 뭐 하는 건데? 아니 그보다 당신 지금 방학 아니야? 학교는 왜 왔어?”
“너 기다렸고, 로스쿨은 방학 같은 거 의미 없어.”
한지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뻔뻔하게 굴었다.
“언제 끝나. 점심 같이 먹자.”
우선경은 큰 눈을 여러 번 깜빡이다 한참 만에 말했다.
“실성했어?”
한지석은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마침 강의실로 들어가는 학생을 붙잡고 물었다.
“여기 수업 언제 끝나요?”
“예? 어, 저희 11시 50분이요.”
“감사합니다.”
더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우선경은 주먹을 움켜쥐고 다급하게 외쳤다.
“이봐요. 한지석 씨.”
“반말해. 이제 와서 존대하는 것도 웃기잖아.”
참고 참았던 성질이 기어코 치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선 멱살을 틀어쥐고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이 우선경을 뜯어말렸다.
선경은 최대한 감정을 눌러 담고, 조용히 윽박질렀다.
“내가 문자 보낸 거 못 봤어요?”
“봤어. 없던 일로 하자는 거. 그런 말 들었을 때 기분 더럽다는 건 확실히 알겠더라. 미안해. 다시 한번 사과할게.”
“이해가 안 되네. 도대체 왜 이러는데요?”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이따가 데리러 오면 되지?”
11시 50분에 봐. 한지석은 핸드폰을 쥔 손을 흔들었다.
멋대로 약속까지 잡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못해 혼이 쏙 빠질 지경이다.
강의가 끝날 시간이 다가올수록 선경은 바짝바짝 피가 말랐다.
대체 왜 저러는지 이유라도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가 하면, 상대하면 할수록 제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현실적인 생각이 머릿속에서 격렬히 충돌했다.
결국 불안감을 못 이기고 11시 30분쯤 몰래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한지석의 연락처는 다시 차단한 뒤 냅다 건물을 벗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이번에는 그를 주차장에서 만났다.
운전석을 등진 채 차 앞을 지키고 선 모습에 한숨이 턱, 밀려 나왔다.
우선경은 놀란 얼굴을 애써 갈무리하고 뒤돌아섰다. 서둘러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환청처럼 따라붙었다.
코너를 돌아 비상구 계단 쪽으로 향했다. 주차장을 통하는 입구는 이곳뿐이라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마침 누군가가 안쪽에서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순서를 기다리느라 잠시 멈춰 있는데 등 뒤로 익숙한 체취와 온기가 닿았다. 긴 팔이 뻗어 나와 대신 문을 잡아 주었다.
선경은 티 나지 않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지석은 허락도 없이 자꾸만 제 영역을 침범했다. 이래선 매우 곤란하다.
비상구 안으로 들어온 우선경은 결국 뒤돌아 그를 마주했다. 한지석은 놀라는 내색도 없이 대뜸 오른손을 내밀었다.
“뭐.”
“핸드폰 줘 봐.”
순순히 핸드폰을 넘겨줬다. 그는 이번에도 당당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2580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번호가 안 맞자 한지석은 곤란한 듯 눈썹 앞머리를 찡그렸다.
내가 바보냐, 그걸 그냥 놔두게. 우선경은 의기양양해져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하지만 한지석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선경의 턱을 움켜잡더니 핸드폰을 얼굴에 들이밀었다. 카메라가 주인의 얼굴을 인식하고 잠금을 풀어버린다.
아이 씨, 또다시 눈앞에서 당하자 선경은 애꿎은 핸드폰을 노려봤다.
한지석은 차단을 풀었다. 반복되는 과정이 약간은 지겨운지 엄지로 주름진 이마를 긁었다.
“나도 바빠. 자꾸 도망 다닐래?”
“왜 자꾸 그러는데.”
“얘기 좀 하자니까.”
“지금 해, 하고 빨리 가 버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비상구 계단은 낡고 허름했다. 게다가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린다. 대화하기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여기서 해도 괜찮겠어?”
“안 될 건 뭐야. 우리가 장소 따져 가며 할 얘기가 뭐 있다고. 막말로 그쪽이랑 서로 못 볼 꼴 다 봤는데 이제 와서 예의 차리고 떠들….”
“나랑 연애하자.”
“뭐?”
예상치 못한 말에 우선경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라고? 잘못 들은 줄 알고 한 번 더 되물었다.
“연애하자고, 나랑.”
한지석은 웃음기가 지워진 얼굴로 한 걸음 다가섰다. 반작용처럼 우선경은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왜….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뭔데, 한 번 잤다고 책임감이라도 생겼어? 그냥 잊어버리라고 했잖아. 이딴 거에 신경 쓰지 말고 가서 공부나 해. 변호사 시험 떨어지면 내 탓 하지 말고.”
“책이 눈에 안 들어와.”
그의 목소리엔 음울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먹물을 입힌 것처럼 어두워진 눈동자 속엔 심란함과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네가 눈에 밟혀서 공부도 안 되고, 글자도 안 읽혀. 밥은 먹었나, 잠은 잘 자나,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해. 어디서 또 수작질이나 당하는 건 아닌가 걱정돼. 매번 쓰레기 같은 새끼만 들러붙을까 봐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
“…….”
“그럴 거면 그냥 나랑 만나.”
심장이 지끈거렸다. 남은 애써 정리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이러면 어쩌자고.
선경은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섰다.
“내가 아직도 당신 좋아하는 줄 알아? 다 끝났어.”
“안 믿어.”
“진짜 마음 접었다고.”
“거짓말하지 마.”
한지석은 거리를 좁혀왔다. 어느새 등 뒤로 차가운 벽이 닿았고, 우선경은 퇴로도 막힌 채 구석으로 몰렸다. 양팔이 뻗어오며 그를 가뒀다.
우선경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금 눈이 마주치면 속마음을 남김없이 들킬 것만 같았다.
고작 몇 주의 시간은 마음을 정리하기엔 빠듯했다. 다 잊었다, 괜찮아졌다 생각했지만 귓가에 스며드는 목소리 하나에도 감정이 술렁거린다.
가까이서 물씬 맡아지는 한지석의 체취 같은 것들이 마음속 깊이 눌러 두었던 기억들을 자꾸만 끄집어냈다.
소란스러운 마음을 억지로 가다듬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났다. 선경은 입술을 깨물며 몰아치는 감정을 힘껏 삭였다.
“그쪽 완전 제멋대로인 거 알아? 이러면 내가 무조건 좋다고 할 줄 알았어?”
“얼굴 좀 들어 봐….”
애타는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속삭인다. 숨을 내쉴 때마다 호흡이 뒤엉켰다. 너무 가까웠다. 우선경은 양손으로 한지석의 단단한 어깨를 잡았다.
이대로 힘을 주고 밀어내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차마 끌어당기지도 못하고 애꿎은 옷자락만 거머쥐었다.
한지석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잇자국이 진하게 난 아랫입술을 엄지로 가만가만 쓰다듬다가 참지 못하고 품 안에 가득 끌어안았다. 마른 몸에서 시작되는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미안해. 네가 나 한 번만 봐줘.”
“…….”
“응?”
품 안에서 조용히 숨을 삼키던 우선경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기다려, 생각 좀 해 볼게.”
***
“그러면 오늘부터 1일인가요?”
강 비서가 운전대를 붙잡은 채 물었다. 그는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연신 룸미러만 훔쳐봤다.
흥분이 최고조로 치솟은 강준일의 얼굴은 만취한 사람처럼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신남을 주체할 수 없는지 콧구멍이 연신 들썩거렸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선경이 앞을 향해 흘낏 시선을 던졌다. 그 꼴이 영 못마땅한지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접힌다.
“왜 강 비서님이 호들갑이에요?”
“히힛, 저는 두 분이 만나신다고 하니까 너무 좋습니다!”
“그렇다고 눈치 없이 낄 생각은 마요. 제가 부를 때까지 그냥 차에 계세요.”
암요, 암요. 저도 그 정도 센스는 있습니다! 강 비서는 대답에 음률을 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실없이 웃던 선경은 문득 잊고 있던 것을 떠올랐다. 강 비서를 향해 슬쩍 질문을 던졌다.
“오피스텔은 혹시 나갔나요?”
“아직입니다. 거기 시세가 워낙 높아서 찾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혹시 급하신 거면 가격을 더 낮춰 볼까요?”
“아니요, 그냥 매물 내놓은 거 취소해 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다시 차 안은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한 달에 한 번 있는 가족 식사 모임에 가는 중이었다.
별로 달갑지 않은 약속이라 선경은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오늘 가면 또 무슨 잔소리를 들으려나,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그때, 차 안에서 미약한 진동음이 울렸다.
“도련님, 전화 들어오는데요.”
이를 가장 먼저 알아챈 강 비서가 우선경에게 언질을 주었다. 선경은 접어놓은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덤덤하게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어, 선경아.
‘선경아’라고 발음하는 한지석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둥글게 흘러들어왔다. 창밖을 내다보던 우선경은 손등을 들어 입술 옆에 붙였다.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가 그 아래로 감춰졌다.
강 비서가 또 한 번 룸미러를 훔쳐보더니 씨익 웃는다. 그는 부드럽게 핸들을 꺾어 코너를 돌았다.
우리는 기어코, 연애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