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62화 (62/127)

#62

결심을 내린 이유는 단순했다. 고민할 시간조차 아까웠기 때문이다.

이미 서로 원하는 바가 같았고 각자의 상황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데, 새삼 따지고 잴 필요가 있겠는가.

한지석은 우선경의 집안 사정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우선경 역시 한지석의 1순위는 본인 자신이라는 걸 잘 파악하고 있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는 시한부 연애라면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두 사람 모두 손해 보는 것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아낌없이 마음을 열기로. 짧은 기간 동안 후회 없이 사랑해 보자, 굳게 약속했다.

“한지석 씨는, 그동안 연애 많이 해봤어?”

TV를 보고 있던 선경이 물었다.

별생각 없이 틀어놨던 화면에선 요즘 유행하는 연애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일반인 출연자들을 모아놓고 풋풋한 연애 감정을 키워나가는 내용인 것 같은데, 마침 화면에선 각자의 과거 연애사를 털어놓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귀로만 듣고 있던 한지석은 읽고 있던 책을 잠시 소파 팔걸이에 걸쳐 놓았다.

가늘게 내리뜬 시선이 제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는 동그란 머리통으로 향했다.

“그런 건 사귀는 사이에서 묻는 게 아니야.”

“왜?”

“듣고 기분 좋을 리 없으니까.”

모로 누워 있던 우선경이 고개를 돌렸다. 뭔 소리냐는 듯이 큰 눈을 깜박거린다.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난 상관없어. 궁금해. 말해 봐.”

연이은 재촉에 지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책을 완전히 덮고 소파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다. 아랫입술을 슬슬 문지르며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세 번 해 봤어.”

“언제?”

“고등학생 때 한 번. 대학교 와서 두 번.”

“전부 여자?”

응, 한지석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곤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며 입을 꾹 다문다.

그는 책을 보는 대신 선경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게 꼭 토라진 어린애를 달래는 것 같기도 해 선경은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이 이랬으면 분명 짜증이 났을 텐데, 한지석이 만지는 손길은 너무 따뜻해서 오히려 기분이 풀린다. 선경은 약간 나른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내가 남자에게 진심이 될 줄 몰랐어.”

“알파한테 끌리는데 남, 여 성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나는 당신이 알파라서 좋아한 게 아닌데?”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들자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지석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한결같이 무표정을 고수하던 입가엔 묘한 미소가 걸렸다.

“방금 좀 설렜어.”

“뭐야.”

선경은 하, 바람이 새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얼굴을 TV로 돌렸다.

오른쪽으로 꺾인 하얀 목덜미에 쭉 뻗은 목빗근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미끈한 모습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귓바퀴를 훑고 목선을 따라 내려왔다. 마사지해 주듯 느릿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은 티셔츠 속을 스스럼없이 침범했다.

“그런데 어떡하지?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알파라서 시도 때도 없이 너한테 발정하는데.”

“짐승 새끼야?”

선경이 듣고도 어이없다며 눈을 샐쭉 흘겼다. 옷 속을 들쑤시는 손이 귀찮아 일어나 앉으려는데 한지석의 손이 허리를 붙들고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자세가 바뀌고 단단한 허벅지 위에 올라앉게 돼버렸다.

또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막 번쩍번쩍 들어 올린다며 선경은 못마땅한 듯 한지석의 뒷머리를 틀어잡았다.

한지석은 아픈 내색도 하지 않고 선경이 입고 있는 티셔츠를 살살 말아 올렸다. 턱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눈빛은 굶주린 짐승처럼 사납게 빛났다.

“맞아, 진화가 좀 덜 된 것 같아.”

“사람 만들어 놓으려면 한참 걸리겠네.”

어느새 옷은 가슴 위까지 들춰졌다. 뽀얗게 드러난 맨살을 한지석이 혀로 진하게 핥았다. 이상하게도 우선경의 몸을 보면 자꾸만 허기가 진다. 없던 식욕마저 돌았다.

티셔츠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는 지석은 눈앞에 보이는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더니 잡아 비틀었다.

간지러운 듯 웃음을 참던 선경은 가슴에서 번지는 저릿한 통증에 등을 웅크리고 작게 신음을 터트렸다.

살짝 피가 몰린 유두를 한입에 삼켰다. 혀끝으로 살살 굴리자 말랑하던 살점이 꼿꼿하게 튀어 오른다. 먹기 좋게 도드라진 것을 입안에 넣고 일부러 젖은 소리 내가며 빨았다.

“하아, 읏.”

선경이 가슴에 들러붙은 머리를 붙잡았다.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 손톱 밑이 하얗게 질렸다. 아픔과 쾌감이 선을 넘나들며 동시에 덮쳐오고 있었다.

지석의 입술이 목을 타고 턱 끝까지 올라오자 허겁지겁 그의 뺨을 붙잡고 입술을 삼켰다. 맞닿은 혀가 타액과 함께 농밀하게 뒤섞인다. 저절로 끙끙 앓는 소리가 나오고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밑에서 우선경의 몸을 붙잡고 있던 한지석이 잠시 입술을 떼더니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이 한 줌 같은 허리를 걱정스럽게 주물렀다.

“너무 말랐어. 틈날 때마다 먹이는데 왜 살이 안 붙지.”

“원래 그런 체질이야.”

“체력도 바닥이고. 한 번만 해도 뻗어버리잖아. 평소에 운동 같은 거 전혀 안 하지?”

“그 정도는 아니….”

우선경은 말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 정도는 맞는 소리라 차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도 체력이 저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만큼 허약한 건 아니었다. 다만 섹스를 할 때 빨리 나가떨어지는 것뿐이다.

한번 할 때마다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밀어붙이니 받아 주는 입장에선 진이 빠질 법도 했다. 사정까지 가는 데 최소 한 시간은 걸리는 편인데, 그동안 선경은 서너 번은 절정에 다다랐다.

한지석은 늘 아쉽다는 듯, 지친 우선경을 끌어안고 놔주질 않았다. 흉악한 성기는 씨물을 잔뜩 뿌리고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러트가 아님에도 그랬다.

“그쪽이 너무 정력적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혹시라도 나한테 운동 권할 생각하지 마. 시간 낭비야.”

“그럼 내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잡아먹더라도 몸보신은 시켜놓고 먹어야지 죄책감 들어서 안 되겠어.”

“…….”

응? 한지석이 부드럽게 목을 울리며 되물었다. 이유가 참 못돼먹었지만 거절할 재간이 없다.

선경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체력 운운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평소보다 편한 복장에 교외로 나간다고 했을 때부터 약간 싸한 기분이 들긴 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도 찍지 않고 국도를 달리던 차가 기어코 산자락이 보이는 곳에 진입했을 땐 정말로 도망가고 싶었다.

도착한 곳은 청계산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참 많았다.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인 산속에 알록달록 총천연색 옷을 입은 등산객들이 득실거렸다.

내리쬐는 햇볕마저 어찌나 따가운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를 가린 우선경은 짜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여기가 맛집이야?”

“맛집 가기 전에 들러야 할 필수 코스. 산을 타야 그 맛이 제대로 나거든.”

“개소리를 참 정성스럽게 하네.”

날이 선 대답이 돌아왔지만 한지석은 그저 웃고 넘겼다.

우선경에게 준비해 온 트래킹화를 신기고 손수 끈을 묶어 주며 너는 운동을 좀 해야 한다고 어른스럽게 달랬다.

선경은 냉소를 지으며 그를 외면했다. 얼굴을 비스듬히 돌린 채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날이 좋아서 그런가, 사람이 많다. 게다가 등산은 나이 든 사람이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젊은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이 와중에 검은 반팔 티와 반바지를 입고 캡 모자까지 눌러 쓴 한지석은 성의 없는 복장임에도 누구보다 빛났다.

잘생겼으니까 봐준다.

입술을 삐쭉 내밀며, 선경은 나머지 발 한쪽도 내밀었다. 헐거워진 신발 끈이 허공에 나풀거렸다.

“그렇게 힘들진 않지?”

“계단이, 헉, 너무… 많.”

“어, 뒤에 잠깐 비켜 주자.”

앞서 걷던 한지석이 손을 뻗어 우선경을 옆으로 끌어당겼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뒤따라 올라오던 중년의 남자가 햇볕에 까맣게 탄 얼굴을 꾸벅 숙였다.

산을 타는 남자의 발걸음은 마치 뒷동산에 오르듯 가뿐했고, 지게를 멘 그의 등 위엔 냉장고만 한 아이스박스가 올라가 있었다.

저게 뭐야?! 선경은 헉헉대던 숨을 삼키고 눈을 둥그렇게 부릅떴다.

“방금 지나간 거 뭐야? 저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아니면 뭐 휴머노이드 로봇, 뭐 그런 건가?”

“정신 차려, 여기 애들도 올라가는 코스야.”

농담이 아닌 듯 마침 옆으로 가족 등산객이 지나갔다.

끽해 봐야 유치원생 정도 됐을 법한 어린 남매가 엄마 아빠를 제치고 다람쥐처럼 뛰어 올라간다. 아이들은 힘들어하기는커녕 소리까지 질러가며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우선경은 얼이 빠진 채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정말로 나만 이렇게 쓰레기인 건가, 회의감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후들거리는 무릎에 단단히 힘을 주고 한지석의 손을 붙잡았다.

“가자, 나도 정상 찍을 수 있어.”

“마음가짐이 좋네.”

***

한지석이 등산을 끝낸 후 데려간 곳은 근처에 있는 오리백숙 집이었다.

황토를 바른 가옥은 낡고 허름했다. 평소라면 이런 곳에서 어떻게 밥을 먹냐며 질색했겠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만큼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를 뻗고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선경은 맥없이 벽에 머리를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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