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미리 주문해 둔 것인지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이 차려졌다. 머리를 빠글빠글하게 볶은 50대 식당 주인이 은색 쟁반 가득 접시를 담아왔다.
직접 만든 다양한 밑반찬들이 상 위에 깔렸다. 순식간에 준비를 마친 식당 주인이 지석을 향해 물었다.
“도토리묵에 백숙 시키셨죠? 백숙은 지금 뜸 들이는 중이라 5분 뒤에 나와요.”
“네, 저희 막걸리도 한 병 주세요. 사이다 하나랑요.”
“제일 시원한 거로 가져다드릴게. 아이구. 저 예쁜 총각은 완전히 뻗었네, 뻗었어.”
거의 바닥과 한 몸이 되어버린 우선경을 보며 식당 주인은 혀를 찼다.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왜 그래, 진심이 담긴 잔소리에 한지석도 따라 웃었다.
“힘들 거예요, 오늘 고생했거든요.”
“그러면 사이다는 서비스로 줘야겠네! 많이 먹고 기운 좀 차려요!”
한지석은 빈 컵에 차가운 물을 따라 우선경의 수저 옆에 놔줬다. 길게 뻗은 발로 거의 빈사 상태에 빠진 선경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들었죠? 예쁜 총각.”
“…맛없기만 해 봐.”
“배고프다, 빨리 와서 앉아 봐.”
선경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밥상 앞에 앉았는데 생각보다 상차림이 휘황찬란해 눈동자가 커졌다.
반찬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였고 그중 그릇 몇 개는 놓을 자리가 없어 그릇 사이에 겹쳐 올라가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냄새에 침이 절로 고였다.
수많은 반찬 중 뭘 먼저 먹어야 할지 몰라 손이 방황하고 있는데 한지석이 젓가락을 입 앞에 들이밀었다.
“아, 해.”
“…….”
달걀 물을 입힌 육전에선 침샘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잠시 눈치를 보던 선경은 입을 벌려 음식을 받아먹었다.
어차피 방 안엔 한지석과 자신뿐이라 점잔 떨 필요도 없었다.
“맛있지?”
“응.”
입속을 가득 채운 얇은 고기는 잡내도 안 나고 부드러웠다. 짭조름하면서 기름진 맛이 허기로 메말라 있던 입맛을 돋웠다.
“여기 막걸리요.”
잠시 문이 열리고, 식당 주인이 방 안으로 쟁반을 밀어 넣었다. 위에 올라간 은색 주전자는 제법 묵직해 보였다.
한지석은 찌그러진 양은그릇에 주전자를 기울였다.
살얼음 낀 하얀 막걸리가 주둥이에서 흘러나온다. 입을 오물거리며 구경하고 있던 선경에게 그가 가득 채운 잔을 내밀었다.
“이제 제일 맛있는 거.”
“왜 멀쩡한 잔 놔두고 다 찌그러진 그릇에 따라 주는데?”
“내가 못 먹을 거 준 적 있어? 의심은 나중에 하고 일단 마셔 봐.”
채근에 못 이겨 입술을 축였다. 목젖까지 얼려버릴 정도로 시원한 막걸리가 목구멍을 타고 식도로 넘어간다.
약간 쿰쿰한 맛이 나긴 했지만, 음료수처럼 달았고 톡톡 쏘는 맛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육전을 먹고 난 뒤라 입에 쫙쫙 붙었다.
양은그릇에 입술만 가져다 댔을 뿐인데, 꿀꺽꿀꺽 목울대가 쉼 없이 움직였다. 어느새 한 잔을 모두 비운 선경이 푸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잔을 내려놓게 무섭게 숟가락이 다가왔다. 이번엔 탱글하게 양념된 도토리묵이 담겨 있었다.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졌다. 잘게 자른 상추 조각과 김 가루가 붙은 도토리묵이 우선경의 입안으로 쑥 들어간다.
아기 새처럼 넙죽넙죽 받아먹는 모습에 한지석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잘 먹네, 우선경.”
“왜 자꾸 나만 줘.”
“걱정 마, 나도 먹을 거야. 운전해야 하니까 막걸리는 못 마시는데…. 더 마실 수 있겠어?”
“응.”
“이번엔 컵에 줘?”
우선경은 말없이 양은그릇을 내밀었다. 찌그러진 그릇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여기에다 마시면 더 맛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다.
막걸리 한 병과 빵빵하게 채워진 배, 등산으로 쌓인 고단함이 한데 어우러져 온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눈꺼풀이 반쯤 감기자 한지석은 다 먹은 밥상을 한쪽으로 밀었다. 편히 누우라며 바닥을 툭툭 두드린다. 그는 반나절 빌린 곳이라 잠깐 자고 가도 된다고 말했다.
우선경은 노란 장판 위에 주저앉았다.
양팔을 뒤로 뻗고 게으르게 상체를 젖혔다. 유유자적한 기분에 젖어 있는데, 마침 지석이 창가에 걸린 나무 발을 둘둘 말아 올렸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무릎 높이에서 시작되는 거대한 창문 너머로 청계산의 울창한 산림이 내다보였다.
산 공기가 늦여름의 더운 바람을 타고 방 안까지 솔솔 들이닥친다. 상쾌하고 진한 숲 냄새가 났다. 그건 꼭 한지석의 페로몬 같았다.
“여기 괜찮지?”
“응.”
한지석이 옆으로 다가오더니 그 역시 같은 자세로 앉았다. 느긋하게 바닥을 짚은 손가락들이 서로 조금씩 맞닿았다.
둘이서 나란히 앉아 있는 지금이 비현실적으로 한가롭고 풍요롭다 생각했다. 선경은 처마 밑에서 흔들리는 풍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음에 또 왔을 때는 이 느낌이 안 나려나?”
“처음과는 다르겠지.”
“맞아, 그래서 못 자겠어. 지금이 허투루 지나가는 게 너무 아까워.”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디 있을까.
눈앞의 풍경에 대한 감상도 언젠가는 퇴색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길게 여운이 남아 주었으면 했다.
선경은 뒤로 고개를 젖히며 다시없을 이 순간을 깊이 만끽했다.
***
서울 종로에 있는 컨벤션 센터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최근 유력한 대선후보로 언급되고 있는 중견 정치인의 출판 기념회를 축하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손님들로 대규모 연회장은 행사 시작 전부터 북적거렸다.
출판 기념회는 선거 자금을 합법적으로 모을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은 앞다투어 책을 써냈고, 후원자들을 초청했다.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손님들이 오느냐에 따라서 정치인들의 급을 나눈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이러한 이유로 재벌가 손님은 늘 초대 리스트에서 빠지질 않았다.
우선경이 출판 기념회를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아마 오늘 이곳을 방문한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후원자일 것이다. 그가 행사장에 등장하자 일순간 이목이 쏠렸다.
몸에 딱 맞춘 검은 정장에 신경 써서 세팅한 머리는 그 나이 또래와 어울리지 않게 점잖아 보인다. 그러면서도 원래부터 격식을 타고난 사람처럼 이상하게 잘 어울렸다.
수군거리는 소리와 끈덕진 시선이 꼬리처럼 따라붙었지만, 이 스무 살짜리 청년은 겁날 게 없다는 듯 고고한 자세를 유지한 채 당당한 행보를 이어 갔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다. 정직한 필체로 ‘우선경’ 이름 석 자를 적고 굽혔던 허리를 곧게 폈다.
공손히 손을 모은 채 대기하던 보좌관은 우선경이 서명을 마치는 걸 보자마자 펜을 대신 받아 들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출판 기념회니 당연했다. 흰색 바탕엔 오늘의 주인공이자 책의 저자께서 양 주먹을 불끈 쥐고 호탕하게 웃고 계셨다. 그 옆에 굵은 글씨로 ‘함께 가자, 대한민국!’이라고 적힌 제목도 적혀 있다.
당장 선거 포스터로 써도 무방할 만큼 뻔해 보였다. 아마 내용 또한 고루하고 보잘것없을 게 분명했다.
“책은 나중에 챙겨 주세요.”
심드렁한 속마음과 달리 선경은 눈을 곱게 접으며 사양했다. 대신 재킷 안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건넸다. 책값이었다.
다른 손님들의 봉투가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로 들어가는 것과 달리 우선경이 내민 봉투는 보좌관이 직접 따로 챙겼다.
두께는 평범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액수는 가볍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보좌관은 허리를 깊게 숙여 감사를 표했다. 봉투를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가슴 쪽을 든든하게 두드렸다.
“의원님께 잘 전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드리고 싶은데 지금 바쁘실까요?”
“안쪽에 계십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선경은 보좌관의 안내를 받으며 컨벤션 홀 안쪽 깊숙이 들어갔다.
“의원님. 우선경 씨 오셨습니다.”
“아아! 어서 오세요! 귀한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축하드립니다. 공 의원님. 회장님께서도 안부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뻔하고 의미 없는 인사치레가 오갔다.
나이 차이가 족히 30살은 나는 국회의원과 우선경은 아무리 봐도 그림이 맞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할아버지인 우 회장 쪽과 친분이 있는 편이지 우선경과는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공재식 의원은 콕 짚어 우선경을 초대했다. 우선우, 우재경도 아닌, 아직 그럴듯한 직함 하나 없는 막내를 말이다.
그가 무슨 의도로 부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집안을 대표해서 온 것이니 실수 없이 행사에 참여하는 게 중요했다.
이후로도 의미 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공재식 의원은 할아버지의 건강은 요즘 어떠시냐, 학교에 다닌다고 들었는데 힘든 점은 없느냐, 취미 같은 게 있느냐 등등 온통 신변잡기만 훑는 질문을 던졌다.
대화하면서도 누군가를 찾고 있는지 그의 눈동자가 분주히 주변을 살폈다.
그렇게 번잡스러운 행동을 이어 가던 중 공 의원이 누군가를 보고 크게 반색했다. 어찌나 급했는지 대화 도중 손을 올리고 “어, 여기야, 여기!” 하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그의 외침에 우선경은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포멀한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인파를 해치며 우선경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땅딸막한 공재식 옆으로 붙어 서자 그의 훤칠한 키가 더욱 돋보였다. 공 의원은 뿌듯한 얼굴로 남자의 허리를 손으로 툭 쳤다.
“이쪽은 내 큰아들이에요. 작년에 학업 마치고 한국에 완전히 들어왔습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한국에 아는 지인들이 별로 없어요. 오늘 나 도와주겠다고 같이 나와서 고생하고 있는데, 이참에 인사 나누면 좋을 것 같아서. 그 왜, 젊은 사람들끼리 두루두루 친해지면 좀 좋은가.”
공 의원이 제 아들이랍시고 소개한 이는 알파였다.
방금까지도 다른 곳에서 손님맞이를 하고 온 터라 남자는 다소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버지의 재촉에 아들은 머쓱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공효준입니다.”
아, 이거였구나. 공재식이 여기까지 저를 부른 속내가 이제야 뻔히 들여다보였다.
우선경은 재벌가를 향한 그의 욕심에 새삼스레 환멸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알파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안녕하세요, 우선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