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공효준 27세. 미국 명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왔다는 그는 현재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선거캠프에서 활동 중이라고 했다. 아마도 정치판에 뛰어들 생각인 것 같았다.
외모는 공 의원을 닮아 조금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말투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절제하고 있지만 은근하게 풍기는 페로몬 역시 그가 알파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소개를 받은 뒤 두 사람은 따로 자리를 이동했다. 케이터링이 마련된 연회장 한 켠을 서성이며 어설픈 대화를 나눴다.
“여기서 우리가 제일 어린 것 같군요.”
“네, 그래 보이네요.”
그나마 공효준이 어렵게 말을 붙여 봤지만 대화는 늘 한쪽에서 칼같이 끊겼다. 아, 귀찮아. 선경은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되씹으며 말없이 주스만 홀짝거렸다.
공효준마저 입을 열지 않으니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참다못한 우선경이 먼저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혹시 화났어요?”
“그럼 기분이 좋겠습니까? 불려 와서 알파 소개나 받고 있는데.”
선경의 말투는 이제 대놓고 뾰족해졌다. 와중에도 반듯한 자세와 온화한 표정은 흐트러짐이 없다.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공효준과 꽤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저도 아버지가 그러실 줄 몰랐어요. 어쩐지 오늘따라 자꾸 잘 꾸며 입으라 하시더라고요. 그냥 손님맞이 때문에 신경 쓰시는 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엮어 주실 줄은 저도 정말 몰랐습니다.”
“그럼 피차 불편하겠군요. 다행이네요, 적당히 눈치 보다가 헤어지죠.”
“우선경 씨는 저랑 대화하는 게 불편해요?”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짝다리를 짚고 되묻는데 마치 이런 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 같았다.
뭐야, 이 반응은. 우선경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조용히 대꾸했다.
“네, 저는 공효준 씨에게 관심이 없으니까요.”
“꼭 이성적으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참에 친구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집요하시네요.”
대화가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겠다. 선경은 씁쓸한 마음을 주스와 함께 삼켜버렸다.
이게 술이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얼굴 가득 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원한다면야 이쪽에서도 얼마든지 응해 줄 수 있다.
“그래요. 뭐, 이것도 비즈니스니까.”
한 시간 정도가 더 지난 뒤, 우선경은 대기하고 있던 검은 세단에 올라탔다.
피곤했는지 문을 닫자마자 넥타이 매듭부터 헐겁게 끌어 내리고, 시큰거리는 눈가를 손바닥 끝으로 문질렀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강 비서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뭐… 이제 이런 건 별일 축에도 안 들겠죠.”
“네?”
“아니에요. 출발하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행선지를 묻는 강 비서의 질문에 선경은 잠시 창문에 머리를 기대며 생각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선경은 자신을 채워 줄 넓은 품이 간절했다.
***
한지석은 오늘 따로 선약이 있었다. 새롭게 터를 옮긴 천사원에 들러서 후원하는 아이를 만날 거라고 했다.
그는 선경에게 같이 가 볼 것을 권했지만, 공 의원의 출판 기념회 일정과 겹쳐 거절했었다. 사실 봉사활동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런 곳에 가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았다.
새로 옮긴 곳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아도 될 만큼 넓었다.
탁 트인 운동장을 배경 삼아 한눈에 봐도 새 건물 티가 여실히 흐르는 연수원 건물이 자태를 뽐냈다.
이 와중에 입구에 걸린 ‘천사원’ 현판은 예전에 있던 곳에서 떼 온 건지 온통 색이 바래고 녹슬어 있어 더 눈에 띄었다.
강 비서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마침 그 옆자리엔 한지석의 차가 주차돼 있었다. 다행히 엇갈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먼저 가 보세요.”
“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
인조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선 아이들이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구석에 있는 농구 코트에서는 제법 나이가 찬 아이들이 모여서 농구공을 튕기느라 바빴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유독 큰 남자는, 멀리서 봐도 한지석이 분명했다.
선경은 그늘진 스탠드에 앉아 그 모습을 구경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온갖 화려함과 욕심이 그득했던 곳에서 숨통이 막힐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온몸의 긴장이 풀어지며 더할 나위 없는 편안함을 느낀다.
우선경은 좀 더 힘을 빼고 편안하게 다리를 늘어트렸다. 옷에 흙먼지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쿡쿡, 누군가 선경의 어깨를 찌르더니 저기요오, 하고 힘없이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다섯 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 아이가 풍성한 원피스를 입고 인형을 끌어안고 있었다.
아이는 치마를 잡더니 무릎을 까딱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어… 안녕.”
“저기요, 왕자님이에요?”
“응?”
아이는 혀가 짧은 발음으로 최대한 또박또박 말했다. 무엇에 그리 확신했는지 두 볼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외쳤다.
“왕자님 맞죠! 슈가슈가 문에 나오잖아요.”
“아… 미안,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어.”
“나 만나러 온 거 아니에요? 고으니 어제 케이크에 소원 빌었는데.”
아이의 표정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왕자님이 자신을 모르는 척하는 게 못내 섭섭한 모양이었다.
어린아이를 어떻게 달래 줘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머리 위로 한지석의 그림자가 졌다.
그는 아이의 겨드랑이로 손을 끼워 넣더니 하늘 위로 번쩍 들었다.
갑작스러운 고공비행에 공주풍 원피스가 붕 뜨고, 아이는 신난 듯 웃음을 터트렸다.
“왕자님은 삼촌 만나러 왔어. 몰래 나온 거라 사람들이 알아보면 안 된대.”
“나 그거 알아, 비밀인 거지?”
“와,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알아? 똑똑이네.”
한지석은 답지 않게 애를 잘 다뤘다.
능숙하게 아이를 달래더니 또래 애들이 소꿉장난을 하며 놀고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티셔츠 소매로 닦아내며 다가왔다. 우선경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별로 놀란 얼굴이 아니다. 오히려 핀잔하는 투로 눈을 흘겼다.
“애기들까지 꼬시면 곤란한데? 나 지금 다섯 살짜리랑 경쟁해야 되는 거야?”
선경은 고개를 치켜들고 물었다.
“슈가슈가 문이 뭔지 알아?”
“만화영화야. 거기 주인공이 좋아하는 남자가 슈가슈가 나라 왕자님이거든.”
벌어진 입술이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황당함에 뭐라 반응해야 될지 모르는 듯했다.
한지석은 그런 선경을 위아래로 훑었다.
고급스러운 정장을 빼입고, 드물게 머리까지 곱게 넘긴 모습은 자신이 봐도 귀족적인 우아함이 흘렀다. 곱디고운 얼굴로 저런 차림을 하고 있으니 어린애 눈엔 왕자님처럼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닮았어.”
“놀리지 마, 장난칠 기분 아니야.”
“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았지? 잘 차려입고 어디 좋은 데 다녀온 거 같은데.”
“나 좀 안아 줘.”
우선경이 다짜고짜 손을 뻗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한지석은 입고 있는 티셔츠를 살짝 들췄다. 젖어 있는 게 영 신경 쓰였다.
“뛰고 와서 땀 났을 거야.”
상관없어. 우선경은 재차 졸랐다. 한지석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스탠드 계단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팔로 우선경을 가득 끌어안았다.
“무슨 일 있었어?”
“응. 그런데 말 안 할래.”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우선경은 말없이 고개를 묻었다. 희미한 땀 냄새 속에 한지석의 페로몬이 스며 있었다.
코를 박고 쇄골과 목덜미에 고인 묵직한 향기를 맡으니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진다. 허리가 으스러질 것 같았지만 그 압박감마저 좋았다. 선경은 넓은 어깨에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여기 언제까지 있을 거야?”
“글쎄. 일단 샤워하고. 점심 먹고. 애들 공부도 좀 봐 주고. 아, 다른 것보다 현진이를 보고 가야 돼. 오늘 그것 때문에 온 거라.”
“현진이?”
선경은 고개를 빼꼼 들고 되물었다. 저에겐 낯선 이름을 그가 친근하게 부르는 게 신기했다.
한지석이 큰 손으로 선경의 뺨을 감쌌다. 양쪽으로 볼을 꾸욱 누르자 짜부라진 입술이 볼록 튀어나왔다.
질색하듯 찡그린 표정까지 더해지니 견딜 수 없이 귀여웠다. 지석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온 김에 같이 만나고 가자.”
***
가방끈을 움켜쥐고 터덜터덜 걸어오는 발걸음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침울한 얼굴을 땅바닥에 고정한 채 김현진은 습관 같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여기저기를 이유 없이 배회하고 다니느라 귀가가 조금 늦었다.
아침에 나갔던 현진이 천사원으로 귀가했을 때는 이미 오후 4시가 훌쩍 지났을 즈음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있던 원장이 아이를 보자마자 달려왔다.
“현진아,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 와! 핸드폰은 왜 꺼져 있고?”
“네? 아, 배터리가….”
김현진은 주머니 속에 넣어 뒀던 핸드폰을 꺼냈다. 아무리 두드려도 화면은 반응 없이 까맣게 먹통이다.
오래된 핸드폰은 배터리가 하루를 못 갔다. 딱히 만지고 논 것도 없는데, 오늘은 반나절을 못 넘기고 방전이 돼버렸다.
그걸 본 원장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큰 소리를 냈던 게 못내 미안했는지 현진의 어깨를 다정스레 두드렸다.
“별건 아니고, 지석이 와서 연락했던 거야.”
“형 왔어요?”
한지석의 이름을 듣자 우울하던 눈망울이 금세 반짝거렸다.
원장은 웃으며 현진의 뒷머리를 헝클였다.
“그럼. 온 지 한참 됐어. 너 보고 가겠다고 계속 기다리는 중이야. 2층 회의실로 빨리 올라가 봐.”
김현진은 가방끈을 부여잡고 잽싸게 뛰어갔다. 얼굴엔 모처럼 환한 웃음이 번졌다.
힘차게 내딛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두 칸씩 밟으며 빠르게 올라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회의실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닫혀 있는 문을 열려던 그때, 문득 창문 너머로 움직이는 사람의 형체를 보고 말았다.
“…….”
형은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처음 보는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 김현진은 몰래 창가에 붙어서 둘의 모습을 숨죽여 지켜봤다.
남자는 예의 없이 회의실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상체를 뒤로 젖힌 채 성의 없이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형과 친한 사이인지 행동이 무례하고 스스럼없었다.
나이는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돈이 많은 건 분명했다.
몸에 맞춘 듯 선이 완벽하게 떨어지는 정장은 재질마저 부드럽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한 번도 저런 옷을 입어 본 적 없는 현진의 눈에도 비싼 옷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남자는 귀찮은 듯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드렁한 표정이 무색하게 얼굴은 반짝반짝 윤이 났다. 하얀 피부는 햇볕을 쫴 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티 없이 맑았고, 뺨과 입술엔 건강한 혈색마저 돌았다.
바람이 불자 자연스럽게 뒤로 넘겼던 머리가 흩날렸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기자 둥글고 매끈한 이마가 드러났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그의 머리카락 색처럼 까맣고 촘촘한 속눈썹이 나붓나붓 움직였다.
남자는 얼굴에 닿는 햇빛이 귀찮은지 고개를 살짝 젖혀 해를 피했다. 신기하게도 동작 하나하나가 게으르면서 동시에 품위가 넘쳤다.
그가 한쪽 발목을 좌우로 돌렸다. 어딘가가 불편한지 미간을 찡그리자 형이 아래로 내려가 구두를 벗겼다.
형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꿇어앉은 채 남자의 발을 주물렀다.
마사지를 해 주는 손길은 귀한 것을 다루듯이 세심하고 정성스러웠다. 발목을 잡아 주던 손이 둥근 복사뼈를 쓰다듬더니 검은 정장 바지를 거침없이 들췄다.
부드러운 원단 밖으로 드러난 남자의 다리는 하얗고 가느다랬다. 형은 손바닥으로 둥그스름한 종아리를 주물렀다.
느긋한 마사지가 이어지자 남자는 발끝을 꼿꼿하게 세우며 형을 제지했다.
‘아직도 사람이 안 됐구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고 조용했다. 형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선 안 되겠지?’
‘절대 안 돼. 생각조차 하지 마.’
‘빨리 돌아가야겠다.’
형은 곧장 허리를 세우고 일어났다. 남자가 앉아 있는 책상을 양손으로 짚고 고개를 숙였다. 팔 안에 가둬 둔 남자와 얼굴이 겹쳐져 뭘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헉!”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유추하지 못할 만큼 현진은 어리지 않았다. 벌어진 입에서 놀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현진은 벽에 기댄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박자를 무시하며 미친 듯이 뛰어댔다.
주먹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놀란 마음이 진정되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섭섭함과 배신감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형을 빼앗겼다는 기분에 눈물이 찔끔 나고, 근거를 알 수 없는 열등감 때문에 뱃속에 불길이 일었다.
쾅, 현진은 회의실 문을 세게 걷어차고 도망치듯 복도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