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65화 (65/127)

#65

2학기가 시작되면서부터 한지석은 본격적으로 공부에 열을 올렸다.

그 전에도 많은 시간을 학업에 할애하는 편이었지만 이제는 거의 학교에서 살다시피 했다.

고3 수험생도 이보다 열심히 하진 않을 텐데.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공부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우선경은 졸지에 수험생 뒷바라지하는 부모의 심경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고.

어차피 지금이 한창 중요한 시기라는 건 알고 있었고, 우선경은 딱히 한지석만 바라보고 사는 인간도 아니었다.

그냥 저 나름대로의 현생을 살다가 한지석이 보고 싶어질 때면 슬쩍 찾아와 얼굴만 보고 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지석이 어디에서나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거였다. 그는 우선경이 언제든 자신을 보러 올 수 있도록 카페나 도서관 같은 개방된 공간에 머물렀다.

오늘도 도서관을 찾은 한지석은 자리에 앉기 전 핸드폰부터 꺼내 들었다.

[법전원 도서관 1층 열람실. 3시까지.]

자신이 있는 장소와 머물 시간을 적어 우선경에게 문자를 보냈다.

약속을 하진 않았으니 그가 올지 안 올지는 알 수 없다. 이건 그냥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 같은 거였다.

한지석은 할 일을 마치고 나서야 책을 꺼내고 착석했다.

주위가 훤히 뚫린 도서관 열람실은 오늘따라 사람이 없었고, 부쩍 쌀쌀해진 날씨 탓에 공기마저 썰렁했다.

지석은 귀에 이어폰을 끼워 넣고 잔잔한 음악을 틀었다. 깍지 낀 두 손을 허공으로 쭉 펴 올리며 가볍게 몸을 풀어 준 뒤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두툼한 판례집을 펼쳤다.

한참 동안 집중을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방해되지 않는 반경에 따뜻한 커피가 담긴 종이컵이 슬쩍 올라왔다. 커피를 두고 간 남자는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빙 돌아가더니 의자를 당겨 맞은편에 앉았다.

한시선은 내내 책에 박혀 있었지만, 한지석은 우선경이 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커피 향보다 더 인상적인 우선경의 페로몬이 차가운 공기에 스며 있었다. 필기를 이어 가던 한지석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주변엔 온통 한지석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만 있었다.

다들 국어사전처럼 퉁퉁한 책들을 펼쳐 놓고 읽고, 쓰고, 외우기 바빴다. 이 와중에 우선경만 유일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널찍한 책상 위에 팔꿈치를 붙이고 비스듬히 턱을 괸 채 공부에 집중하는 한지석을 구경했다.

재미있는 거라도 보는 듯이 까만 눈이 행복하게 반짝거린다.

그는 커피도 마셨다가 핸드폰으로 인터넷도 했다가, 다시 한지석 구경하는 걸 반복했다. 그렇게 사십 분 정도를 앉아 있던 우선경은 무음으로 설정해 둔 핸드폰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곤 커피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는 시간을 오래 잡아먹지 않았다. 통화를 끝낸 뒤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던 선경은 짐을 다 챙겨 나온 한지석을 보고 놀란 듯 되물었다.

“왜 벌써 나와?”

“그냥, 오늘은 집중이 잘 안 되네. 아무래도 쉬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그렇게 설렁설렁 해도 돼? 나중에 시험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내 주변에서 그런 걱정 하는 거 너밖에 없는 거 알아?”

한지석은 가볍게 핀잔하며 우선경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둥그런 어깨뼈를 감싸 쥐고 발걸음을 부드럽게 재촉했다.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던 우선경은 마지못한다는 듯 떠밀려 갔다.

도서관을 나와서 멀지 않은 주차장까지 함께 걸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사람들이 은근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혼자 다녀도 시선을 끄는 판국에 눈에 띄는 사람 둘이 붙어 다니니 당연한 결과였다.

대놓고 인정한 적은 없었지만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다.

가뜩이나 재벌 4세인 게 알려져서 요즘 여러모로 말이 많은데, 한지석과의 관계까지 보태져서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다.

학교에선 애정 행각은커녕 손 한번 잡아 본 적 없건만 귀신같이 눈치를 챘다며 우선경은 황당해했다.

이번에도 시선을 의식했는지 슬쩍 거리를 벌리려 하길래, 한지석은 선경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대신 재빨리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그의 관심을 돌렸다.

“나 검찰 수습 결과 나왔어.”

“뭐? 어떻게 됐어?!”

“붙었지.”

“정말?!”

한지석의 합격 소식에 우선경은 걷던 것도 멈추고 옆을 돌아봤다.

백오십 명 안에 들었어?!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지고 얼굴이 화사한 빛이 도는 게 제 일인 양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검찰에 지원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워낙에 경쟁률이 높다는 얘길 들어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검찰 심화 실무 수습은 검찰을 지망하는 로스쿨생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선발되기 위해선 1, 2학년 성적이 중요했는데 실무에 지원한 전국 법률전문대학원 학생들 중 백오십 명만 뽑힌다고 들었다.

사법시험이 없어졌으니 검찰청으로 들어가려면 이 관문을 꼭 통과해야 했다. 적어도 합격은 했으니까, 이제 변호사 시험만 붙으면 검사직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소리다.

“잘됐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해?”

“다음 달부터. 2주는 연수원에서 합숙하고 나머지 2주는 지망하는 검찰청으로 나가고.”

“합숙?”

“응, 다행히 사법연수원이 용인에 있어서 멀진 않아.”

“그러면 2주 동안은 얼굴도 못 보겠구나.”

선경은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아랫입술이 툭 불거져 나온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지? 한지석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사랑스러운 모습에 가슴께가 간질거리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슬쩍 팔을 내려 비어 있는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지금 많이 봐둬. 나중에 아쉬워하지 말고. 눈치 없이 공부하라고 돌려보내지도 말라는 소리야.”

“그거야 나는 그쪽이 떨어질까 봐 걱정되니까 하는…. 아니, 그런데 여기 지금 학교야. 손은 좀 놓지?”

“남들 눈 신경도 안 쓰면서 이런 건 싫어하더라, 내가 창피해?”

“가뜩이나 무성한 소문에 굳이 기름 부을 필요 있어? 그냥 얌전히 가.”

아까 그렇게 햇살처럼 웃어 줄 때는 언제고, 우선경은 냉정하게 손을 뿌리쳤다.

고민도 안 하고 냅다 걸어가 버린다. 한지석은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무슨 소문?”

“내가 돈으로 그쪽 꼬셨다던데.”

“얼굴이 아니고?”

“하!”

기가 막힌 소리에 우선경은 하늘을 쳐다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뒤로 돌리며 한지석을 노려보는데 눈초리가 잘 벼려진 칼날처럼 매섭다.

“적당히 해. 나 놀리는 게 재밌어?”

“사람들이 뭘 모르네. 내가 만나 달라고 빌었는데. 또 그런 얘기 듣거든 자신 있게 얘기해. 한지석이 제발 만나 달라고 몇 날 며칠을 쫓아다녔다고.”

“퍽이나 믿겠다. 그쪽 추종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좋겠네요, 한지석 씨. 인기 많아서.”

“뭔 상관이야. 나는 딱 한 명만 좋아해 주면 되는데.”

“…….”

뻔뻔스러운 말에 날 서려 있던 눈빛은 힘이 풀린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귓바퀴를 벌겋게 물들이는 모습에 한지석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완연하게 퍼져 나갔다.

지석은 빈손을 잡고 다시 손가락을 촘촘히 얽어 넣었다.

“가자. 이러고 있는 시간도 아까워. 빨리 가서 우선경 껴안고 기력 충전해야지.”

“사람을 무슨 보조 배터리 취급하고 있어.”

머리 위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한지석은 깍지 낀 손이 풀리지 않도록 힘이 꽉 쥐었다. 빈틈없이 맞붙은 손바닥이 후끈후끈했다.

***

그리고 얼마 뒤, 한지석은 예고한 대로 연수원에 입소했다.

계절은 이제 막 초겨울로 넘어서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진 만큼 한지석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더 큰 공허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연락이라도 자주 할 수 있다면 모를까, 통화는커녕 자기 전 문자를 주고받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바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사법연수원은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보고 싶어도 꾹 참는 수밖에 없다. 우선경은 문득문득 한지석이 생각날 때마다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거긴 어때? 할 만해? 밥은 잘 나오고? 거기 춥지는 않아?

묻고 싶은 것을 틈틈이 써 두면 한지석은 그걸 모아 긴 답장으로 적어 보냈다. 그마저도 긴 하루 일과를 끝내고 보내오는 터라 자정을 훌쩍 넘길 때가 부지기수였다.

수십 줄이 넘어가는 긴 메시지는 마치 하루를 압축한 일기와도 같았다. 아침엔 몇 시에 일어났는지, 일어나서 무얼 했는지, 오늘은 어떤 걸 배웠는지, 삼시 세끼로 뭐가 나왔고, 같은 방을 쓰는 연수생은 어떤 잠버릇이 있는지까지도.

그날 주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세세하게 담고 있어 문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한지석의 일과를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사진이라도 한 장 보내 주지. 글자만 가득한 메시지를 여러 번 정독하던 우선경은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핸드폰을 베개 밑에 쑤셔 박았다.

지이잉.

한참 수면에 빠져 있는데, 머리맡에 놔둔 핸드폰이 길게 울렸다.

잠결에 진동을 느낀 우선경은 손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잡았다.

가물가물 뜬 눈으로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깊게 잠긴 목소리로 겨우 전화를 받았다.

-미안, 자는데 깨웠지.

“으응, 지금… 몇 시야.”

우선경은 퉁퉁 부은 눈꺼풀을 비비며 시계를 찾았다. 새벽 세 시 반이었다. 이 시간에 대체 무슨 일이지?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려던 찰나, 한지석은 뜬금없는 소리를 뱉었다.

-나 지금 집 앞인데, 잠깐 나올 수 있어?

“…뭐? 어디라고?”

일순간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우선경은 전화기를 쥔 채 그대로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커튼과 창문을 차례대로 열어젖히고 고개를 내밀어 보니 믿을 수 없게도 담벼락 앞에 서 있는 멀끔한 형체가 보였다.

선경은 곧바로 전화를 끊고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현관을 활짝 열고, 슬리퍼만 덜렁 꿰어 신은 채로 정원을 내달렸다. 굳게 닫힌 대문이 삐거덕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지석이 정말로 집 앞에 있었다.

추운 날씨에 두 뺨이 시리고, 낯익은 페로몬이 코끝을 스쳤지만, 그때까지도 꿈을 꾸는 듯 실감이 나질 않았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왜 여기 있어? 무슨 일 있어?”

“너무 보고 싶어서, 택시 타고 잠깐 나왔어.”

뭐? 황당무계한 말에 선경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용인에서 여기까지가 어떻게 잠깐이야. 차라리 영상통화를 하든가 하지.”

“전화로는 안아 볼 수가 없잖아.”

한지석은 대뜸 팔을 당겨 우선경을 끌어안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 바깥에 있었던 건지 그의 몸엔 한기가 잔뜩 스며 있었다.

그에 반해 잠옷에 카디건만 걸치고 나온 우선경은 방금까지도 자고 있던 사람답게 따뜻하고 말랑했다. 온몸에서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아, 살 것 같다. 품 안에 가득 끌어안고서야 한지석은 지친 한숨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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