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아무리 야심한 시간이라고 하지만 집 앞에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
우선경은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한지석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 역시 오랜만의 재회가 반갑지 않을 리 없었다.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뺨에 닿는 모든 게 서늘했다. 선경은 양팔을 더 강하게 옭아매며 차갑게 식은 몸을 제 체온으로 녹였다.
“택시 타고 오는 데 얼마나 걸렸어?”
“한 시간 이십 분.”
“갈 때도 그 정도 걸리겠네. 내 차로 데려다줄게. 이 동네 택시 잘 안 잡혀.”
“만나자마자 보낼 생각부터 하다니,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한지석은 그 큰 손으로 우선경의 등을 세심하게 보듬었다. 정수리와 이마, 귓바퀴에 짧게 입을 맞추더니 어깨를 붙잡고 잠시 몸을 떼어냈다. 설마 벌써 가야 되는 건가 싶어, 우선경은 아쉬운 얼굴을 들었다.
“선경아.”
“응.”
“나 지금 너랑 같이 가고 싶은 데가 있는데.”
***
새벽녘의 한강 둔치는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넓게 트인 공간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비둘기나 길고양이조차 이 시간엔 잠을 자는 게 분명하다.
그나마 줄지어 선 가로등이 은은한 불빛을 뿌려대고 있어서 무섭지는 않았다.
비록 한강은 온통 새까매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대신 대교 위 금색 야경이 유유히 흘러가는 까만 물에 아름답게 비쳤다.
우선경은 한강이 내다보이는 벤치에 덩그러니 앉아, 커피를 뽑으러 간 한지석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슬리퍼에 숨겨진 발가락이 꼼질거렸다. 잠옷 차림으로 밖에 나와 있는 게 여전히 실감이 안 났다.
등 뒤에 있는 자판기에서 덜커덩 뭔가가 굴러 나오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옆자리에 앉은 한지석은 차가워진 선경의 손에 따뜻한 캔 커피를 쥐여 줬다.
우선경은 온기 가득한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너울거리는 검은 한강 물을 내려다봤다. 입천장에 들러붙는 인공적인 커피 향과 들척지근한 단맛에 불현듯 인상이 써졌다.
“난 지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어. 새벽 네 시에 한강 구경이 말이나 돼?”
“내가 스트레스 푸는 방식이야. 가끔 공부하다가 답답하면 이렇게 나오거든. 아무도 없고 조용해서 머리 식히는 데 좋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우선경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형이랑 해 본 것 중에 제일 미친 짓인 거 같아.”
“형이라고 부르니까 이상한데.”
“그럼 뭐 계속 한지석 씨, 그쪽, 이렇게 부를까? 원하면 그렇게 하고.”
까칠한 대답에 한지석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뀐 호칭이 마음에 드는지 커피를 마시면서도 계속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생각해도 오늘은 좀 심했지, 누가 보고 싶어서 뛰쳐나오는 건 나도 처음이었거든.”
“.......”
“생각해 보니 같이 사진 한 장 안 찍었더라고. 이럴 때를 대비해서 오늘 한 장 찍어 가려고.”
“나 사진 찍는 거 싫어하는데.”
“내 것도 줄 테니까 한 장만 찍게 해 줘.”
한지석은 지갑 속에서 작은 사진 하나를 꺼냈다.
얼마 전 새로 찍은 증명사진이었다. 거래를 제안한 그는 어때, 하며 사진을 우선경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간식에 홀린 강아지처럼 고개가 따라 움직였다. 손에 들린 작은 인화지 속엔 정장을 입은 한지석이 있었다.
선경은 참지 못하고 냉큼 사진을 채갔다.
손에 넣은 것을 뚫어지게 관찰하던 선경은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지 눈썹 앞머리에 힘을 줬다.
“…인상이 왜 이렇게 차갑게 나왔지. 사진빨이 잘 안 받나?”
“본인 앞에서 그런 얘기 해도 되는 거야?”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닌데, 나 좀 봐봐.”
선경은 한지석의 얼굴을 붙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해 주고, 턱 끝을 붙잡아 각도를 맞춘다.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들더니 그 상태로 여러 장을 찍었다. 역시 사진관이 문제였나 보다. 핸드폰으로 대충 찍었는데도 결과물엔 놀랍도록 잘생긴 얼굴만 담겼다.
하여간 생긴 것 하나는….
우선경은 그제야 만족스러워졌는지 입꼬리를 삐쭉 올리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 제가 좋아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지석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지금 되게 행복해 보이는 거 알아? 내 얼굴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
“응.”
“뭐 좋아해 주니 다행이긴 한데, 그럼 증명사진은 필요 없겠네.”
“아니, 이것도 가질 건데?”
혹여나 도로 뺏어 갈까 싶어 우선경은 손에 쥐고 있던 사진을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 얼른 집어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손으로 주머니 위를 덮으며 단속했다.
지석은 웃으며 제 핸드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움직이더니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켜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지?”
“꼭 지금이여야 해? 나 지금 파자마 차림인데?”
“나만 볼 건데 뭐 어때.”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고민하던 우선경은 결국 포기했는지 몸을 반쯤 돌려 앉았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알겠어, 그럼 얼른 찍어.”
다소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양손을 앞으로 모아 벤치를 짚은 자세는 곧고 반듯하기만 하다. 한지석을 바라보며 가만히 기다렸다.
이렇게 대놓고 사진을 찍혀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표정은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렌즈는 쳐다보지도 못하고 지석의 손끝만 봤다.
“…….”
카메라를 들고 있던 한지석은 액정이 아닌 그 너머의 우선경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내 보고 싶었던 얼굴이 앞에서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큰 눈은 느리게 깜박거렸고, 희었던 볼이 복사꽃처럼 발그레 물들어간다. 그 모습을 카메라가 아닌 제 눈으로 담고 싶었다.
고집스럽게 굳게 다물린 입술이 벌어지며 왜 그래? 하고 묻는다. 하얀 입김이 부셔져 나오는 순간, 지석은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벤치 위에 내던졌다.
예고도 없이 몰아붙이는 키스에 우선경은 다급하게 손을 뒤로 짚었다.
고친 자세는 불안정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마저도 없었다면 뒤로 홀랑 넘어가 버렸을 거다.
한지석이 거의 몸을 짓누르는 탓에 고개가 반쯤 뒤로 꺾여 버렸다. 뺨엔 우뚝한 콧날이 내리눌렸다. 흡사 잡아먹히는 모양새였다.
강바람을 맞아 차가워진 입술과 달리 안을 파고든 살덩이는 델 듯이 뜨거웠다. 섞이는 타액과 살점에선 달큰하고 인공적인 커피 맛이 났다.
선경은 주먹을 움켜쥐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지석이 입안으로 밀어 넣어 주는 애정을 기꺼이 받아 삼켰다. 마음이 벅차오르다 못해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중간 중간 불편했던 자세가 바뀌더니 결국은 한지석 위에 올라앉아 몸을 겹친 채로 진한 입맞춤을 이어 갔다. 깊게 혀를 섞었다가,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또 가끔은 그냥 하염없이 끌어안고 있기만 했다.
이곳이 야외인 것도 잊고 키스에 열중하다 보니 캄캄했던 한강 변엔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조금씩 지나다닐 때가 돼서야 우선경은 정신을 차린 듯 퍼뜩 얼굴을 들었다. 하도 빨려 입술이 퉁퉁 부르터 있었다.
“형, 늦었어. 가야지.”
“응. 그래, 가야지.”
느리게 대답하면서도 아쉬운지 끌어안은 허리를 놔주지 못했다. 지석은 한숨을 토해내며 우선경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맞닿은 몸에서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게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렘의 단계를 넘어서 사랑에 젖어 들었다는 걸 증명하기엔 충분했다.
***
사실 백화점에 올 생각은 없었다.
그저 수업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낯익은 백화점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고, 다음 주부터 한지석이 검찰청으로 수습을 나간다는 사실이 연이어 떠올랐을 뿐이다.
뭐라도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주차장 방향으로 운전대를 틀고 있었다.
일 층에 즐비한 명품 매장을 오가며 머플러와 장갑, 코트 같은 것을 둘러보던 선경은 문득 시계 매장으로 흘러들어 가고 말았다. 거기서 한지석과 찰떡으로 어울리는 시계를 발견했다.
무광의 메탈시계는 한 치의 틈 없이 견고해 보이는 게 딱 한지석을 보는 것 같았다.
투명한 사파이어 글라스는 외부의 거친 자극에도 쉽게 상처 나지 않을 만큼 단단했고, 베젤과 시계판은 모두 블랙이라 정장이나 캐주얼 상관없이 어느 룩에나 소화하기 좋았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손목에 채운다면 틀림없이 완벽하게 어울릴 만한 디자인이었다.
선경은 그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러다 결심한 듯 시계를 내려놓고 말했다.
“이거, 바로 구입 가능한가요?”
“해당 모델 같은 경우는 웨이팅 기간이 최소 한 달은 걸립니다.”
“기다릴게요. 대기 올려 주세요, 혹시 커스텀도 가능한가요? 인덱스 부분은 다른 보석으로 좀 바꿨으면 하는데.”
“네, 고객님. 원하시는 대로 세팅 가능하십니다. 저희 쪽에서 취급하는 보석은 따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여기랑, 이 부분에요. 우선경은 시계와 카탈로그를 번갈아 보며 신중하게 주문을 넣었다. 직원은 요청 사항을 받아 적느라 쉼 없이 펜을 움직였다.
욕심을 부리면 한도 끝도 없이 화려해질 것 같았다. 한지석은 분명 손목 전체에 다이아몬드를 휘감아놓아도 잘 어울리겠지만, 몇 년 뒤 재판장에 가서도 착용할 걸 고려해 과욕은 버리기로 했다.
최대한 깔끔하면서 눈에 잘 띄지 않는 포인트에 적절히 보석을 심어 넣었다.
“서브마리너는 너한테 안 어울려. 넌 좀 더 얇고 화려한 걸 차야지.”
그때 빈정대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
설마, 하고 반쯤 몸을 돌린 선경의 눈에 구도경의 싱글벙글 웃는 낯이 들어온다.
뱀같이 길게 째진 눈매와 다소 검게 탄 피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두른 것으로도 모자라 본인이 연예인이라도 되는 양 화려하게 세팅한 머리까지.
구도경은 마지막으로 봤던 이 년 전과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정 안 가는 특유의 거드름 또한 여전했다.
마음 같아선 대꾸도 안 하고 매장을 나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고모의 관할 아닌가. 보는 눈도 있으니 최대한 구도경의 체면을 세워 줘야 했다. 우선경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안부를 물었다.
“한국엔 언제 들어왔어?”
“지난주에. 안 그래도 한국 들어오면 제일 먼저 확인하고 싶었는데 운 좋게 여기서 만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