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67화 (67/127)

#67

어느새 신발 끝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선 구도경이 불쑥 고개를 숙였다. 우선경의 목 근처에서 코를 가져다 대더니 숨을 깊게 들이쉰다.

우선경은 놀란 내색도 없이 손만 들어 올려 사촌 형의 어깨를 밀쳤다.

구도경은 순순히 뒤로 두어 발짝 물러났다. 고개를 치켜든 얼굴에는 재미있다는 듯 진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정말이네, 너 진짜 오메가 됐구나?”

“…….”

“시계는 누구 주려고, 네 건 아니지? 그러면 알파 애인? 혹시 나도 아는 사람인가?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렇지? 오랜만에 봤으니까 형이랑 얘기 좀 하고 가.”

우선경은 대답 대신 등을 돌렸다. 묵묵히 주문서와 결재란에 마저 서명을 적어 넣는다.

그 뒤에선 구도경이 히죽대며 우선경이 하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알파 페로몬이 물씬 풍겨왔다. 선경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여태껏 이랬다는 말이지. 구도경의 조심성 없고 오만한 행태에 질색하며 주먹을 코 밑에 가져다 붙었다. 불쾌한 페로몬 냄새는 쉽게 가시질 않았다.

***

구도경을 따라 자리를 옮긴 VIP 라운지는 마치 호텔 객실을 방불케 했다.

온통 고급스러운 것들로 치장된 공간은 특정 고객층만 이용할 수 있는 곳답게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어 다른 손님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용한 분위기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라운지 전담 직원이 들고 온 다과상이 손님 앞에 각 맞춰 놓여졌다.

1인용 나무 트레이 위에는 접시에 받쳐진 새하얀 물수건과 조각 케이크, 종지에 담긴 견과류, 한입 사이즈의 초콜릿 쿠키,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잔이 담겨 있었다. 모두 백화점 지하 식품관에서 공수해온 유명 브랜드 제품이었다.

우선경은 그것을 힐끗 쳐다만 보고 손도 대지 않았다. 구도경도 딱히 권유하지 않고 저 혼자 다과를 즐겼다. 커피잔이 반쯤 비었을 때, 그는 심드렁히 질문을 던졌다.

“요즘 뭐, 한국에서 학교 다닌다면서. 다닐 만하냐?”

어울리지도 않게 형 노릇을 하는 모습에 선경은 기가 찬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신경 꺼. 언제부터 우리가 서로 관심 가졌다고.”

“까칠한 건 여전하네. 이제 좀 살가워질 때도 되지 않았나? 특히 너 같은 남자 오메가는 야들야들하게 굴어야 해. 안 그러면 알파들이 거들떠도 안 본다고.”

“어디다 대고 그딴 소리를 해.”

대놓고 오메가 취급하자 우선경은 불쾌한 언사에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구도경은 낄낄, 웃음을 흘리며 접시에 놓인 쿠키를 집어 먹었다. 역시 우선경 속 뒤집는 것만큼 재밌는 건 없다.

우선경이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소식은 미국에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 꼿꼿한 성격에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하던 찰나였는데, 오늘 백화점에서 마주친 건 구도경 역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진득하게 치켜뜬 눈이 앞에 앉아 있는 사촌 동생을 훑었다. 우선경은 소파에 삐뚜름히 앉아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하여간 싹수없게 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저 잘난 낯짝이야 원래부터 번드르르 빛났으니 새삼 놀라울 것도 없고.

그러고 보면 체형과 외모 모두 베타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다만 한 가지,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만 빼놓고.

살짝 내리깐 시선이라던가, 짧게 내쉬는 한숨 같은 것에서 알 수 없는 나른함이 엿보였다. 보다 보면 묘하게 기분을 동하게 만드는 것이 아까부터 거슬리던 참이다.

저게 남자 맛을 좀 봤나 보지?

아까 시계를 구입하던 우선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틀림없이 행복에 젖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공들여 가며 선물하는 주인공이 과연 누굴까. 실소가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참을 수 없이 궁금해졌다.

구도경은 얼굴도 모르는 시계의 주인과 우선경이 붙어먹는 것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저게 남자 아래에 깔려 허덕거린다니 감히 상상조차 되질 않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엔 오메가란 말이지?

남 앞에서 굽힐 줄 모르는 저 까다로운 면상도 알파 앞에선 맥없이 무너진다는 얘기다.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감이 차오른 구도경은 소파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재킷 단추를 슬쩍 풀었다.

늘 그렇듯 알파의 우위를 자랑하기 위해 페로몬을 흩뿌렸다. 이 정도면 웬만한 오메가들은 맥도 못 추고 절절매기 마련이다.

하지만 구도경의 예상과 달리 우선경은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되레 눈을 살벌하게 치켜뜨며 노려봤다.

“뭐야.”

“…뭐가.”

“씨발, 미쳤어? 지금 어디다 대고 페로몬을 묻혀. 당장 안 치워?”

우선경은 평소 잘 하지도 않던 욕까지 내뱉었다. 기분 더럽다는 듯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격렬한 반응에 놀란 구도경은 쿠키를 잘못 삼켰는지 컥컥, 사레들린 기침을 뱉었다.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지만 당황한 표정은 쉽게 감출 수 없었다.

당장 라운지를 떠나려고 하는데 살벌한 분위기를 가르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우선경은 나가려던 발길을 잠시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발신자는 배 집사였다.

“네.”

-도련님, 어디십니까. 지금 당장 성북동으로 오셔야겠습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선경은 본능적으로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란 걸 느꼈다.

잠깐의 시간 차이를 두고 구도경의 핸드폰도 울리는 게 보였다.

불안한 마음이 한껏 더 고개를 치켜들었다. 선경은 전화기를 움켜쥐고 마른침을 모아 삼켰다.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회장님이 쓰러지셨습니다.

***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평소처럼 골프를 즐기던 중, 우 회장은 갑자기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의식을 완전히 잃는 데까진 삼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운 좋게 함께 라운딩을 돌던 일행 중에 심폐 소생술을 할 줄 아는 이가 있었다. 빠른 대처 덕분에 위기는 모면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진 우 회장은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우 회장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해외에 나가 있던 우재경까지 가장 빠른 비행편으로 급히 귀국했다.

서화 그룹 총수의 갑작스러운 병환 소식은 세간에도 금세 퍼졌다.

언론의 열렬한 관심 속에 가족들은 병원에 머물렀고, 마음을 졸이며 함께 곁을 지켰다. 다행히도 우 회장은 수술 후 사흘 만에 깨어날 수 있었다.

한번 죽을 고비를 넘긴 탓인지, 이후 우 회장은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수심에 잠긴 얼굴을 하고 혼자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건강을 회복해가던 어느 날, 할 말이 있다면서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보안이 삼엄한 VIP 병실에 우씨 일가가 모두 모였다.

“내가 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구나.”

“그런 말 마세요, 아버지. 아직도 건강하시잖아요. 충분히 오래 사실 수 있어요.”

“나도 앞날이 창창하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이번에 겪어 보니 알겠더구나. 당장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사람 인생이야. 더군다나 나 같은 늙은이는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는 법이지.”

우 회장은 부쩍 수척해진 얼굴을 매만졌다.

주름이 가득한 피부는 코끼리 가죽처럼 질기고 거칠었다. 상념이 깃든 눈으로 한 곳에 모인 자식과 손주들을 두루 훑었다.

“조만간 유언장을 공증받을 생각이다.”

“할아버지!”

“갑작스럽게 결정하는 건 아니야. 이미 예전에 작성해 둔 유언장을 공개하는 것뿐이다. 너희에게 물려줄 몫들은 이미 다 나눠 뒀으니 걱정할 것 없다. 그것과는 별개로 하나 더 부탁할 것이 있다.”

확고하게 의사를 밝히던 우 회장은 제 곁에 서 있던 우선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선경은 말없이 할아버지의 손을 꼭 붙들었다.

“선경아.”

“네.”

“죽기 전에 너 결혼하는 건 보고 갔으면 좋겠구나.”

“…….”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우리 선경이는 제대로 된 짝 만나는 거 내 눈으로 꼭 봐야 되겠어.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다. 그때까지는 할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아 있을 테니까.”

갑작스러운 부탁에 우선경은 뭐라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새파랗게 질려가는 손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 회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대답을 재촉하듯 맞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약속해 줄 수 있지?”

“…네.”

선경의 입이 강제로 열렸다.

신음처럼 새어 나오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우 회장은 조금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시선을 비껴 자신의 딸을 찾았다.

“정화, 네가 집안 어른이니 나 대신 선경이 짝 찾는 거 책임지고 돕도록 하고. 집안, 성품 꼼꼼히 따져서 어디 한 곳 비지 않는 번듯한 놈으로 찾아내거라. 결혼시키면 그쪽한테 본사 임원 자리 내줄 테니 사업 이끌 만한 수준은 갖춰야 될 거다.”

“아버지, 어떻게 생판 남한테 그런 자리를 넘겨주실 수 있어요! 그럴 거면 차라리 우리 도경이나 예진이한테…!”

고모 우정화는 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지시에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없던 눈물을 짜내던 사람이 이제는 두 눈을 부릅뜨고 항의했다.

“이런 것까지 가타부타 말꼬리를 잡을 셈이냐! 욕심 좀 정도껏 부리고, 이번엔 내 말 들어!”

우 회장은 짙은 병색이 무색하게 노성을 질렀다.

VIP 병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할 말을 잃은 우정화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블라우스 소매를 움켜잡았다.

모두 숨죽이며 눈치만 보고 있을 때, 흥분을 가라앉힌 우 회장은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선경이, 올해 안에 식 올려라.”

“…….”

“다들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해. 유언장 공증하는 날 다시 부르마.”

쉬고 싶으니 이만하고 나가 봐. 할 말을 끝낸 우 회장은 손을 내저으며 식구들을 모두 물렸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선경은 질끈 눈을 감았다.

올해는 이제 채 삼 개월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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