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68화 (68/127)

#68

얼마 후 변호사가 입회한 자리에서 유언 공증이 이루어졌다.

우 회장은 이미 몇 해 전부터 재산 상속에 대해 고민했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변호사가 긴 페이퍼를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낭독했다.

누군가는 기쁨을 몰래 삼켰고, 누군가는 못내 아쉬움을 보였다. 하지만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그 욕심 많은 우정화조차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우 회장이 최대한 골고루 나눠 주려고 고심했다는 게 느껴지는 유언장이었다.

우재경은 우 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서화의 주식 60%를 양도받게 되면서 최대주주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완벽하게 경영권을 승계받은 셈이다.

장남 우선우에겐 성북동 저택과 별채를 포함한 자회사 주식들이 돌아갔고, 우선경은 라움 갤러리의 소유권과 우 회장의 개인 소장품 300여 점을 증여받게 되었다.

이외에도 우 회장 소유의 부동산과 현금 자산은 상속세를 제외한 뒤 모두 복지 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 본인이 죽고 난 뒤 재벌가의 상속 문제가 언론에 오르내릴 때를 대비한 처사였다.

그리고 몇 가지 추가 사항을 유언장에 보탰다.

하나는 우선경의 남편에게 ㈜서화의 임원 자리를 약속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사회의 승인이 필요하겠지만, 우 회장이 직접 공언한 이야기니 거의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결혼과 관련된 신탁이 추가되었다. 내용은 비밀리에 부쳐졌지만 가족들은 나머지 주식의 행방이 이곳에 있으리라 예상했다.

또 하나는, 우선경 남편감 찾기에 대한 보상이었다.

우 회장은 올해 안에 혼인이 이뤄진다면 남해에 있는 리조트를 그 즉시 우정화의 명의로 이전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고모는 여전히 본사 경영권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지 못하다가 뒤늦게 알게 된 보상의 존재에 기꺼워했다. 남해 리조트는 펜트하우스로만 이루어진 객실과 22만평의 골프장, 수영장과 레스토랑을 갖춘 특급 휴양 시설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제시한 알파의 기준이 좀 엄격하긴 했지만, 고작 인연을 맺어 주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는 게 리조트라면 훨씬 남는 장사였다.

덕분에 그녀는 요즘 괜찮은 집안을 물색하고 다니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유언장 공증 절차가 마무리되고, 우 회장은 조금 더 회복 기간을 거친 후 퇴원했다. 이후로는 별채에서 기거하며 건강을 회복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다행히 회복 속도는 빨랐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있는 만큼 예전처럼의 외부 활동은 즐기지 못하게 됐다. 가족들의 염려 속에서 보양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우재경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게 되었다.

우선경은 이번에는 누나를 제대로 배웅해 주기 위해 공항까지 따라 나왔다. 일찍부터 움직인 탓에 탑승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출국장에 있는 카페에 들러 따뜻한 차를 주문했다. 남매는 마주 앉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지친 한숨을 내뱉었다.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이후로 워낙 정신없이 지낸 터라,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수척하게 말라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우재경이었다.

“한지석 씨에겐 언제 말할 거야?”

“…곧 해야지.”

동생의 목소리는 피곤이 겹겹이 묻은 사람처럼 형편없이 갈라지고 있었다.

안색마저 핏기 없이 해쓱한 게, 병자가 따로 없었다. 재경은 고생을 자처하는 동생을 못마땅한 듯 흘겨보았다.

“거봐. 내가 뭐랬어? 힘들 거랬지?”

아니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선경은 씁쓸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본인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한지석은 현재 검찰청에서 실무 수습을 진행하고 있었다. 합숙하던 때보다야 훨씬 자유롭게 지내고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우선경이 만날 상황이 못 됐다.

틈틈이 통화를 하곤 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 아직까지 결혼에 관한 그 어떤 언급도 하지 못했다.

우재경은 본인이 더 답답한 듯 셔츠 옷깃을 잡고 펄럭거렸다. 흘러내린 긴 머리를 성의 없이 쓸어 넘기며 한 번 더 물었다.

“잘될 가능성은 아예 없는 거야?”

“글쎄.”

“뭐가 됐든 너무 많이 상처는 받지 마.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되니까. 사랑 같은 건 원래 쓸데없이 감정만 잡아먹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부질없고 무용한 것일 뿐이야.”

“누나는 이제 괜찮아졌어?”

누구를 사귀었는지, 왜 헤어졌는지, 얼마나 사랑했는지. 선경은 알지 못한다. 너무 사적이라 차마 묻지 못했던 말이기도 했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동생에게 재경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축축해진 눈빛으로 보건대, 그것은 거짓말임이 분명했다.

다음 날, 우선경은 서울 서부지검 앞으로 나갔다.

건물이 바로 내다보이는 도로 앞 주차 구역에 차를 세워 두고 그 앞에서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렸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정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수습생은 야근을 시키지 않는 모양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퇴근하는 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정장을 입고서 검찰청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모습은 새삼스럽지만 참 근사해 보였다.

주변에 같이 근무하는 수습 동기들과 검찰청 직원들도 함께 있었지만 우선경의 눈엔 오직 한지석만 보였다.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목에 걸린 출입증 카드를 벗어 재킷 안주머니에 정리해 넣던 한지석은 불현듯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우선경을 발견한 순간, 차갑게 식어 있던 얼굴엔 거짓말처럼 화사한 기색이 번졌다.

눈이 마주치자 우선경은 차에 기대 있던 몸을 바르게 세웠다. 어느새 코앞으로 달려온 한지석에게 “안녕”, 하고 무심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 잘생긴 얼굴은 연신 웃음을 보이면서도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야. 말도 없이.”

“그냥, 지나가는 길에 보이길래 잠깐 들러 본 거야. 마침 끝날 시간도 됐길래.”

“왔으면 왔다고 문자라도 남기지.”

우선경은 말없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희미하게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지치고 어두워 보이는 표정에 한지석은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훑었다. 잠깐 기다렸다는 것치고는 손바닥에 닿는 하얀 뺨이 차갑게 얼어 있었다.

“괜찮아?”

걱정하는 질문에 선경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뺨에 닿은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따뜻하고 큰 손은 그 자체만으로 위안이 돼 주고 있었다.

우 회장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한지석도 많이 놀랐다. 언론에서는 매일같이 우경환 회장의 건강 상태에 대해 보도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고령의 나이인 만큼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를 마치 기정사실처럼 떠들어댔다.

지금까지 역대 재벌 총수들의 사망 나이, 앓았던 질환, 이후 벌어진 상속 전쟁 등등…. 온갖 자극적인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재벌가의 속사정은 늘 그렇듯 인기 좋은 이야기 소재였다.

서화 그룹의 후계 구도와 이후 진행될 승계 절차에 관한 루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왔다. 항간에는 최근 우 회장이 유언장 공증을 받았다는 얘기까지 떠돌아다녔다.

가끔씩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목소리가 축축 처져 있고, 평소보다 우울해한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우선경의 어수선한 집안 상황을 고려해 만나자고 재촉하진 않았다.

그가 먼저 괜찮아질 때까지 우직하게 기다리고 있으려 했는데 이렇게 별안간 나타날 줄은 몰랐던 거다.

반가우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한지석은 고개를 숙여 우선경의 안색을 자세히 살폈다.

살이 빠진 데다가 눈 밑이 깊게 그늘져서 그런지 우선경은 웃고 있는데도 어딘가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였다.

단순히 피곤해 보이는 것과는 달랐다. 상념이 가득한 표정을 한지석이 놓칠 리 없었다.

“무슨 일 있지?”

“오늘 일정 더 없으면… 나한테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바르르 떨리는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한지석은 지체 없이 선경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그 짧은 순간 동안 가슴이 불안함에 요동쳤다.

한지석은 차에 오르자마자 히터부터 틀었다. 썰렁했던 공기가 훈기로 변할 때까지도 우선경은 한참 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을 곱씹었다. 한지석은 그런 선경의 얼굴을 내내 바라보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조수석 창 너머로 회색의 딱딱한 건물이 보였다.

똑같은 사이즈의 창문들이 층층마다 획일적으로 늘어서 있는 것이 권위주의적이고 경직된 검찰청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우선경은 그 앞에 서 있던 한지석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웃는 것도, 찡그리는 것도 아닌 쓰디쓴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아까 잘 어울리더라,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멋있었어. 형은 정말로 공직이 더 어울리나 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래.”

“우리 시한부였던 거 기억하지?”

선경은 운전석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눈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나 올해 안에 결혼해야 된대.”

“…….”

예상치 못한 말에 한지석은 입을 다문 채 굳어 버렸다. 우선경을 바라보며 느리게 깜빡거리던 눈꺼풀이 어느 순간 지그시 감겼다. 지석은 이마를 문지르는 척 일그러진 눈가를 가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왜 그렇게 빨리.”

“미안해.”

우선경은 죄를 고백하는 사람처럼 힘겹게 사과했다. 고개가 아래로 맥없이 떨어져 내렸다.

목구멍 위로 치밀어 올라오는 서러움을 눌러 삼키느라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내쉬는 숨소리만 적막한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이를 악문 선경이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었다. 한지석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눈앞에 있는 대시보드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우선경은 손바닥에 손톱이 박히도록 두 주먹을 힘껏 쥐고, 준비해온 말들을 대사처럼 읊었다.

“할아버지 소원이래시잖아. 어쩌겠어. 결혼하는 거 빨리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들어드려야지.”

“…….”

“고모가 벌써 선 볼 상대 알아보고 있어. 당장 이번 주말부터 매일 시간 내야 된대. 어차피 고모가 골라온 사람 중에서긴 하곘지만 그래도 최대한 내 맘에 드는 사람 나타날 때까지 만나 보래. 뭐 그렇게 계속 만나다 보면 누구 하나는 내 취향인 사람 나오겠지.”

“우선경.”

“…….”

“애쓰지 마, 너 그러는 거 안 어울려.”

한지석은 고작 말 한마디로 사람을 허물어트렸다.

왼손을 가져가더니 힘이 들어간 손가락을 하나하나 열었다. 손톱자국이 콕콕 박힌 살갗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러면 우리는 약속한 대로, 여기까지 하는 건가?”

“…응.”

“이렇게 빠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그는 다소 허무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같으면서도 한지석은 잡은 손을 놔주지 않았다. 이걸 놓으면 정말로 끝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얽혀 있는 손가락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끝끝내 붙잡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과 결혼하자고 한다면 좋을 텐데, 다시 한번 확인하는 냉정한 현실에 선경은 조수석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슴 언저리가 뻐근하게 조여왔다. 남은 손으로 셔츠를 움켜쥐고 들숨을 크게 삼켰다.

“형은, 아직도 생각 없는 거지?”

“…….”

“그깟 판사 같은 거 안 해도 사는 데 지장 없잖아. 그냥 포기하고 사업하면 안 돼? 나랑 결혼하면 할아버지가 회사에 자리 만들어 주신대. 같이 외국 나가서 경영 공부 조금 더 하고 들어오면….”

“선경아.”

“…….”

“미안해.”

사과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더 이상 애걸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본인만 구차해질 뿐이다.

우선경은 시큰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조금 차오른 눈물을 일부러 짓눌러 없앴다. 입에 고인 더운 숨을 길게 뱉은 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약속한 게 있는데 구질구질하게 굴었네.”

“…….”

“가끔 연락하자. 마주치면 인사도 하고. 나쁘게 헤어진 사이도 아닌데 너무 정 없이 끊어낼 것 없잖아.”

“그래.”

“수습 잘 마치고. 건강 잘 챙겨.”

“…….”

“갈게.”

대답이 없는 한지석을 뒤로하고 우선경은 조수석 문을 열고 나왔다.

온통 깜깜해진 세상이 그를 반겼다. 어느새 눈물이 뺨을 한가득 적셨지만,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한지석은 우선경에 제 차로 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난 뒤에야, 운전대에 두 팔과 고개를 차례대로 파묻었다.

머리가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방금 내가 무슨 얘기를 했던가….

그 역시 실감이 안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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