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안타깝게도, 현실은 각박했다. 이별의 슬픔에 젖어 들 시간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리조트에 대한 고모의 집착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조카의 결혼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을 줄 알았더니 눈에 불을 켜고 조건에 맞는 알파들을 찾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정화가 인맥을 총동원해 뽑아놓은 리스트만 해도 무려 30명에 이르렀다. 처음엔 이들을 한 명 한 명 다 만나 봐야 한다는 생각에 숨통이 막혀왔다.
선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모에게 붙들려 결혼할 알파들의 신상과 집안 내력에 관해 설명을 들어야 했다. 지겹다 못해 넌더리가 날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그냥 아무나 대충 골라 도장을 찍을까도 생각했다.
대충 하루 만나고 끝내도 되는 사람들이라면 그나마 신경이라도 덜 쓰일 텐데, 다들 집안과 조금씩 연관되어 있어 망나니처럼 굴 수도 없었다.
오늘도 선을 보고 온 우선경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였다. 마침 본가에 머물고 있었던 우정화가 그의 귀가를 알아채고 득달같이 달려왔다.
“왔어?! 오늘 어땠니? 그 알파 괜찮지 않았어?”
“…….”
“표정이 왜 그래, 별로였어? 이번엔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들었는데?”
이제 막 슬리퍼를 꿰어 신고 집 안으로 들어온 우선경의 팔을 붙잡으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잔소리와 같은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지끈 울렸다.
“고모, 저 피곤해요. 내일 얘기하면 안 돼요?”
“나는 뭐 안 피곤한 줄 아니?! 지금 너 때문에 내 일은 하나도 못 보고 있다고! 말하고 들어가. 더 만나기로 했어, 안 했어?!”
선경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눌렀다.
여기서 대들거나 싫은 티를 내 봤자 자신에게 득 될 것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냥 빨리 원하는 대로 말해 주고 벗어나는 게 편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오늘 있었던 일을 짧게 보고했다. 고모의 기대에 찬 얼굴은 얘기를 들을수록 어두워졌다.
겨우 방으로 도망쳐 온 선경은 문부터 걸어 잠갔다.
코트를 벗어 대충 소파에 내던지고 그 위로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모든 게 귀찮고 피곤해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매일 신경줄을 갉아먹으면서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중이다.
더 이상 아무런 낙도 없었고, 뭔가를 해내겠다는 목표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냥 남이 정해 준 대로 살다 보면 언젠간 끝이 나겠지. 약해질 대로 약해진 마음을 쇳물에 담그다 보면 어느새 무던해지는 날이 올 거라 믿었다.
엎드려 누운 채 눈만 껌벅이고 있는데 소파 아래로 떨어트린 손끝에 초록색 종이봉투가 툭, 걸렸다.
“…….”
언뜻 내려다본 시선 끝에 낯익은 시계 로고가 보였다.
아…. 우선경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낮에 전화가 왔었지, 주문했던 상품이 일찍 준비되었다는 연락에 강 비서를 보내 찾아왔던 것이 이제야 생각났다.
선경은 게으르게 손을 뻗어 쇼핑백을 끌어왔다.
몸을 뒤집고 봉투 안에서 선물 상자를 꺼냈다. 무게가 꽤 나가는 케이스를 배 위에 올려두고 거침없이 포장을 해체했다.
보석함 같은 묵직한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 새것 특유의 반짝거림을 자랑하며 시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네 손가락에 감아 들어 올리자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테인리스의 차가움과 무게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인덱스에 박아 넣은 다이아몬드가 새까만 시계판과 대비되며 눈부시게 빛났다.
무미건조한 눈으로 보석의 빛을 쫓던 선경은 시계를 발치로 툭, 던졌다. 상자와 보증서도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팔등을 끌어올려 눈가를 덮었다.
다 귀찮고 부질없었다.
***
서울 서부지검 앞 식당가는 점심시간답게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조한일 검사는 다소 정신없는 상태로 곰탕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넓은 가게는 테이블도, 손님도, 일하는 직원까지 많아 먼저 온 일행을 찾기 힘들었다.
검은 뿔테 안경 속에 담긴 눈이 기민하게 가게 내부를 훑었다. 그의 눈에 유독 눈에 띄는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야, 인간 등대가 따로 없네. 그는 두툼한 입매를 길게 끌어올리며 수습생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조 검사가 다가가자 자리에 앉아 있던 수습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어어, 괜찮아. 앉아, 앉아.”
손을 대충 휘저으며 조한일은 남은 의자를 빼내 앉았다. 수습생들을 데리고 먼저 곰탕집에 와 있었던 후배 검사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희 이게 회식입니까?”
“나도 좀 더 멋들어진 곳에서 먹이고 싶은데, 오후에 있는 공판 시간이 앞당겨져서 어쩔 수가 없네. 미안하다. 대신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이 집 수육도 잘해. 야, 홍 프로. 수육 대자로 하나 시켜 봐.”
지시가 떨어지자 후배 검사는 허리를 반쯤 꺾으며 곧바로 주문을 넣었다.
“사장님, 여기 수육 대자 하나랑 특곰탕 5개요!”
그사이 조한일 검사와 마주 앉아 있던 수습생 한 명은 잽싸게 일어나 컵에 물을 따랐다.
미리 세팅한 수저 옆에 내려놓으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저는 곰탕 괜찮습니다! 좋아합니다!”
“그래, 인마. 많이 먹어라.”
서부지검 앞 곰탕집은 거의 구내식당과 다를 게 없었다. 수습생들도 이 주 동안 검찰청을 다니면서 일주일에 서너 번은 먹었을 거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불만을 늘어놓지 않았다.
오늘은 벌써 검찰 실무 수습 마지막 날이다. 익숙한 맛집에서 먹는 점심 회식은 특별할 게 없었다.
흔한 술 한잔 오가지 않았고, 옷매무새는 넥타이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다. 목에 걸린 공무원증만 셔츠 위에서 덜렁거렸다.
“그래, 겪어 보니까 어떻든? 생각보다 별로지? 일 많고, 꼰대들 많고, 위계질서는 빡빡하고.”
조 검사는 소주 대신 사이다 병을 기울였다. 손바닥만 한 작은 맥주잔에 기포 가득한 음료수가 콸콸 채워진다.
수습생 중 하나는 한 손으로 가슴 아래를 받치며 경건하게 잔을 받았다.
“그게 검찰의 매력이라고 생각함돠!”
“프핫, 이 새끼 또라이네.”
조한일의 입에서 헛바람이 담긴 웃음이 터졌다.
그래 화이팅해라, 과하게 기합이 들어간 수습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적당히 응원을 던져 줬다.
순서대로 한 잔씩 따라 준 뒤 그가 들고 있던 병이 방향을 꺾었다. 이번엔 제 옆에 앉아 있는 한지석 차례였다.
“너는 인마, 오늘만큼은 사고치지 말고.”
“죄송합니다.”
마찬가지로 사이다를 따라 주며 넌지시 충고했다.
한지석은 딱딱하게 굳은 입가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그 역시 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들었다.
“안 그러던 놈이 헛짓거리 하니까 걱정돼서 그러지. 안 그러냐, 홍 검?”
“한지석 이제 정신 차렸을 겁니다.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3부장님께 직빵으로 까였습니다.”
서부지검을 지원한 수습생 중 여러모로 관심을 받았던 한지석은 초반의 기대와 달리 수습 기간 내내 실수를 연발했다. 분명 처음 며칠 동안은 완벽한 모습을 보여 줬었다.
그런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애가 나사가 빠진 것처럼 굴더니 굵직한 사고를 연달아 쳐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딘가 정신을 빼놓고 다니는 놈 같았다.
그를 눈여겨볼 만한 재목이라 여겼던 조한일은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조 검사의 눈이 안경 속에서 잠시 번뜩였지만 금세 시들해지고 만다. 사정은 안타까우나 일개 수습생까지 신경 써 줄 정도로 한가롭지 않았다.
“뭔 일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차려라. 공과 사를 분리하는 것도 검찰직의 덕목이야. 알겠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선배님, 그쯤 하시고 식사하시죠.”
“어어, 그래.”
들어 봤자 별반 도움도 안 되는 조언보다 당장 배를 든든히 채워 주는 식사가 더 중요한 법이다.
후배 검사의 지적에 조한일은 콧대에 걸쳐진 안경대를 추슬러 올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검찰청 앞 식당답게 가게에선 늘 연합뉴스를 틀어놓고 있었다. 마침 대통령의 해외 순방 일정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습관적으로 TV 화면에 눈길을 던지면서 식사를 이어갔다.
-이어지는 소식입니다. 서화 그룹 우경환 명예회장의 건강 악화 소식과 함께 그룹 주가 향방에 연일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변동폭이 크지 않으나 금융권 일각에선 우 회장 일가의 그룹 경영권 확보를 위한 주식 지분의 추가 매입과 분할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뉴스의 주제가 바뀌며 화면에는 서화 그룹 본사의 전경과 우경환 명예회장의 사진이 차례로 나왔다.
열심히 숟갈질하던 조 검사는 뉴스 화면을 힐끗 쳐다보곤 혀를 쯧쯧 내쳤다.
“우경환도 결국 가는구나. 그렇게 잘나가더니.”
“아직 안 죽었습니다. 선배님.”
“모르는 거야. 너 심근경색 재발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처음 쓰러질 때는 사망률이 20%인데, 재발하면 85%로 확 뛰어. 그냥 뒤진다고 보면 돼.”
“히익, 그 정도입니까? 아, 저 콜레스테롤 수치 높은데….”
홍 검사는 걱정되는 듯 툭 튀어나온 배와 팔뚝 살을 연신 주물렀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왠지 기름진 곰탕에도 손이 안 갔다. 그는 젓가락으로 콩나물 반찬을 집어 먹으며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올해 80이 넘지 않았습니까. 경영에 손 뗀 지도 몇 년 됐던데. 뭐 후계는 이미 다 정해 놨겠네요.”
마침 뉴스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었다. 푸른 배경에 그래픽이 떠오르며 우 회장 일가에 대한 가계도가 화면에 그려졌다.
인물 소개와 함께 현재의 직업과 영향력, 차후 그들이 갖게 될 경영권에 대해 아나운서가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미 얼굴이 공개된 우선우와 우재경은 정식 프로필 사진이 나왔지만 우선경은 불투명한 사람 모양의 이미지로만 소개됐다. 삼 남매 중 막내라는 언급과 함께 그의 향후 행방에 관한 다양한 예측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육을 입에 집어넣던 조한일이 TV 쪽을 가리키며 흘낏 턱짓했다.
“저 막내 말이야, 완전 잭팟이라며.”
“아, 그 얘긴 저도 들었어요. 우 회장이 엄청 아낀다면서요. 다들 누가 데려가느냐 점치고 있던데. 듣기로는 결혼하면 한몫 제대로 챙겨 준다던데요.”
한 자리 건너 떨어져 앉아 있던 홍 검사가 아는 척을 해왔다. 조한일은 또 한 번 안경을 밀어 올리며 제가 알고 있는 고급 정보를 던졌다.
“그래서 요즘 알파들이 죄다 쟤 만나려고 눈에 불을 켠대잖아. 그거 알아? 형사 2부 윤지형도 지지난주에 쟤랑 선 봤어.”
“히익! 진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