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홍 검사가 눈을 댕그랗게 뜨며 경악스러운 탄성을 질렀다.
조용히 밥을 먹던 수습생들까지 덩달아 놀라 고개를 들었다. 윤지형 검사라면 법조계 명문가 출신으로 서부지검에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검사 때려치우신답니까?”
“그건 아닐걸? 잘 안 된 모양이더라고.”
“선배님이 그걸 어떻게 아시는데요. 직접 들으셨습니까?”
“잘됐으면 진즉에 자랑하고 다녔겠지. 자신만만하던 놈이 여지껏 아무 말도 없는 거 보면 몰라? 사이즈 딱 나오지.”
윤지형 그 새끼 까였어, 사이다를 한 모금 넘기며 조 검사는 낄낄 웃음을 흘렸다. 동기의 개망신만큼 즐거운 건 없었다.
“그래도 좀 놀랍네요, 윤 검사님이라면 곧 죽어도 지검에 뼈를 묻으실 거라 생각했는데…. 재벌가랑 결혼하면 이 바닥 떠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나도 그게 좀 놀랍긴 했는데, 저 막내가 워낙 와꾸가 괜찮다네? 윤 검도 거기에 혹해서 나가 본 모양이야. 뭐 결혼 생각이 진짜로 있었던지까진 모르겠고.”
“궁금하긴 하네요.”
“에휴, 재벌가 데릴사위 자리는 진심 하나도 안 부럽다. 인생 저당 잡히는 거지 뭐. 안 그러냐, 얘들아.”
조 검사가 던지는 농담에 수습생들은 따라 웃으며 분위기를 맞춘다. 그 옆에서 한지석은 느리게 밥알을 씹었다.
입안에 들어 있던 흰 쌀밥은 곤죽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목구멍이 턱 막혀 밥 한 톨도 삼킬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입안에서 겉도는 것을 물과 함께 억지로 넘겼다.
지석은 지금 본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명치끝이 걸레처럼 쥐어짜이는 느낌이었다.
***
“솔직히 말해 봐. 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우정화가 삼백안을 치켜뜨자 흰자위가 사방에 드러났다. 우아한 목소리와는 결이 다른 귀신같은 얼굴이었다.
번뜩이는 눈동자가 조카의 옷차림을 못마땅하게 훑었다.
본인은 아침부터 샵에 다녀오며 온갖 치장을 다 했는데, 정작 선을 봐야 하는 당사자는 무슨 자신감인지 집에서나 볼 법한 행색을 하고 있다.
청바지에 티셔츠, 그 위에 넉넉한 카디건만 덜렁 걸치고 나타난 걸 보니 오늘도 글렀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우선경은 생기 없는 나무토막처럼 의자에 구부정히 걸터앉은 채 잔소리를 들었다. 노골적인 면박에도 어깨를 으쓱거리고 말 뿐이다.
선경은 아무렇게나 말린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주위를 돌아봤다. 주말의 호텔 라운지는 사람으로 넘쳐났다. 어제도, 그저께도 본 똑같은 광경이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우선경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가져다 붙이며 비스듬히 턱을 괬다.
“일부러 그럴 이유가 뭐 있어요. 저만 손해인데.”
“나 힘들게 하려고 일부러 다 퇴짜 놓는 거 아니야? 아니 어쩜 그렇게 많이 만나놓고도 눈에 차는 사람이 없을 수가 있어?”
선경은 눈꼬리를 접으며 애써 웃음을 지어냈다.
“고모, 어차피 해야 될 결혼이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랑 하고 싶어요. 평생 같이 살아야 될 텐데 아무나 고를 수 있어요?”
“진심이야?”
“걱정 마세요. 진지하게 하고 있어요.”
반쯤은 사실이었다. 벌써 선을 보기 시작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모는 절대 먼저 그만둘 사람이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알파를 소개해 줬고, 심한 날은 하루에 두 명을 연달아 만난 적도 있었다.
대체 어디서 사람을 그렇게 구해 오는 건지… 아무래도 선경이 먼저 포기하고 아무하고나 결혼하겠다 선언할 때까지 밀어붙일 작정인 듯싶었다.
그러니 별수 있나. 적절히 타협하는 수밖에.
순순한 대답에 우정화의 귀신같던 눈이 한결 누그러들었다.
오른손을 들어 흘러내린 짧은 머리를 귀 뒤로 곱게 넘겼다. 손목에 감긴 팔찌가 치렁치렁 늘어지며 눈부시게 빛났다.
“네가 눈이 너무 높아서 그래. 오늘 나오는 사람한테는 살갑게 좀 굴고 그래 봐.”
“…….”
“대답 안 해?!”
우선경은 대답 대신 가슴을 부풀리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모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마침 창문 밖에는 호텔 측에서 심혈을 기울여 조성해 놓은 일루미네이션 조형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수십만 개의 전구가 찬란한 빚을 내며 점멸하는 모습에 저절로 시선이 꽂혔다. 그러고 보니 벌써 겨울이 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염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는데,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목소리가 어딘지 낯익다. 고개를 돌린 선경은 옆에 서 있는 공효준을 보고 놀라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머! 아니에요, 저희가 일찍 온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정화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공효준과 인사했다. 반갑게 악수를 나눈 뒤 자연스럽게 소개를 시작했다.
“여기는 공재식 의원님 첫째 아드님 공효준 씨. 그리고 이쪽은….”
“저희 구면입니다. 몇 달 전에 아버지 출간기념회 때 인사 나눈 적 있어서요.”
“어머! 정말요? 세상에. 인연이다, 인연! 그치, 선경아?”
“…….”
우정화는 반색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유달리 과장된 목소리에 반해 우선경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민망해진 우정화는 흠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붉어진 뺨을 부채질하던 그녀는 이만 비켜 줄 테니 둘이서 얘기하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나가기 전, 우선경의 팔을 안 보이게 꼬집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모가 떠난 뒤 둘만 남게 되자, 우선경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공효준을 쳐다봤다.
“아버지 따라 정치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죠. 하지만 뭐… 우선경 씨와 결혼할 수 있다면야 직업 정도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죠.”
결혼,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하는 단어에 순간 환멸이 났다.
고작 한 번 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달려드는 공효준의 가벼움 또한 좋게 보이지 않았다. 삐딱한 마음을 담아 일부러 쏘아붙이듯 말했다.
“외국에서 공부까지 하셔놓고 쉽게 포기하실 정도면 그렇게 대단한 꿈은 아니었나 보네요.”
“쉽게 포기할 만큼 반했다고 하면 믿어 줄 겁니까?”
“…무슨.”
황당함에 웃음도 안 나왔다. 우선경이 뒤늦게 정색하며 “아니요.” 하고 답했다.
공효준은 그럴 줄 알았다며 희게 웃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메뉴판을 건넸다.
“배고픈데 뭐 좀 먹죠. 밥이라도 맛있는 거 먹어야 이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 아닙니까.”
“…….”
못 이기는 척 메뉴판을 훑었다.
자주 먹어서 이미 물릴 대로 물린 코스 요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절로 한숨이 밀려 나왔다.
공효준은 확실히 정치에 소질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는 말로 사람을 현혹하는 특이한 재주가 있었다.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날을 바짝 새운 우선경과 달리, 그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심지어 일부러 집안이나 결혼과는 거리가 먼 주제들만 꺼냈다.
아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다는 게 눈에 보였지만, 그게 또 생각만큼 거슬리진 않았다.
아마도 그의 화술이 본인을 낮추고 잘난 체하지 않는 방향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태껏 만나온 알파들과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
“그래서 조카가 나만 보면 댕댕이를 키우고 싶다고 졸라대는데, 아직도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대체 댕댕이가 뭐예요?”
“멍멍이요.”
“왜 그게 멍멍이죠?”
“그게 글자를 조금 바꿔 보면….”
막상 말로 설명하자니 답답했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글자를 그리던 선경은 손도 안 댄 디저트 접시를 앞으로 끌고 왔다.
덩어리진 초콜릿 소스를 디저트스푼 끄트머리에 묻혀 그릇 위에 ‘멍멍이’를 적었다. 그리고 일부를 살살 지웠다. 마법처럼 멍멍이가 댕댕이로 바뀌는 걸 보던 공효준은 아아, 깨달음의 탄성을 질렀다.
“아니 왜 멀쩡한 한글을 이렇게 읽죠?”
“그게 요즘 애들한테는 유행이니까요.”
“와, 이걸 알다니. 그럼 우선경 씨도 요즘 애들이었군요.”
“저 스무 살인데요.”
선경은 자존심 상한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공효준은 어린애처럼 이를 드러내며 히히 웃었다. 양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상체를 가깝게 붙여왔다.
“그럼 그 말도 알겠네요. 띵작?”
“그건 명작.”
“요즘 상영하는 영화 중에 띵작이 있다나 봐요. 벌써 800만이 넘었다던데 봤어요?”
“아니요.”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래요?”
“저는 영화 안….”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데이트 제안이 들어왔고, 우선경은 습관처럼 거절부터 뱉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순 없었다. 일단 시도라도 해보자, 결심했다.
“그래요, 같이 봐요.”
***
2학기 마지막 수업이 끝나는 날은 유난히 추웠다. 우선경은 셔츠와 니트를 겹겹이 껴입고, 코트에 장갑까지 중무장한 채로 인문관을 나섰다.
종강 시즌이라 그런지 학교는 어디를 가든 분위기가 들떠 있었다.
다들 잘 지내, 우선경은 강의실을 나오기 전 그동안 친분이 생긴 사람들이게 인사를 건넸다.
과 사람들은 그것이 그저 겨울방학을 잘 보내라는 인사인 줄로 알고 있었지만 우선경에겐 나름의 작별인사였다.
내년에 다시 학교에 올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결혼을 하고 나면 해외로 떠나지 않을까. 선경은 누군지도 모를 사람과 함께 외국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건물 밖을 나오니 눈발이 날리는 게 보였다.
올겨울, 첫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