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하얀 눈송이는 느리고 힘없이 내렸다. 땅에 닿자마자 녹는 것이 많이 쌓일 것 같지는 않았다.
뜻밖의 첫눈에 길을 걷던 사람들은 손바닥을 내밀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잠시 멈춰 서서 허공을 올려다보던 선경은 살을 에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감상은 제쳐 두고 발길을 움직였다.
칼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약속 때문에 차를 두고 와서 12월의 한파를 고스란히 체감해야 했다.
정문까지 걸어가는 길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새삼스레 캠퍼스가 참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까 한 번을 안 마주치는 건가.
어쩌면 우연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매번 학교에 올 때마다 기대를 품곤 했다. 하지만 현실은 야속하게도 한지석의 그림자조차 스친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수요일이다. 한지석이 유일하게 수업이 없는 날이었고, 선경은 이번 학기 마지막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우리는 정말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학교 전경을 눈에 담으며 선경은 입김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정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짤막한 메시지를 보내놓고 핸드폰을 다시 코트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흩날리는 눈송이가 얼굴에 달라붙는 게 싫어 일부러 바닥만 내려다봤다. 백색의 보도블록 위로 무수히 스쳐 가는 발들이 보였다.
“선경아.”
도무지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환청인가 싶었을 때, 시야에 낯익은 신발이 들어왔다. 우선경, 또 한 번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마주치면 어떤 말이 나올까, 머릿속으론 수없이 상상해봤다.
혹시 울지는 않을까. 말 한 마디 못 해 보고 얼어붙지는 않을까. 멋없이 도망치거나, 바닥에 주저앉거나, 한지석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최악의 상상까지 해 본 적도 있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하지만 생각 외로 담백한 인사가 흘러나왔다. 우선경은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놀라웠다.
“잘 지냈어?”
“응, 너는.”
“나는 뭐 늘 똑같지.”
예사로운 대화가 거짓말처럼 술술 이어졌다. 헤어진 사이답지 않게 덤덤히,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검찰청 실습도 끝났겠네. 그래서 학교 나왔구나. 어땠어. 잘 끝냈어?”
“아니, 완전 엉망이었어.”
“왜 그랬어. 잘 좀 하지.”
“…그러게.”
한지석은 다소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허탈한 웃음이 얼굴에 번졌다. 그는 핼쑥해진 민낯을 점검해 보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잠을 못 자 푸석해진 피부와 눈 밑의 퀭한 그림자를 우선경이 알아채지 못하길 바랐다.
“할아버지는 좀 어떠셔?”
“괜찮아, 건강도 많이 좋아지셨고. 생각보다 예후도 괜찮아. 뉴스에선 당장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떠들어대는데 실제로 보면 놀랄걸. 오히려 쓰러지시기 전보다 더 정정하셔.”
“다행이네. 너는, 아픈 데 없고?”
“…나는.”
선경은 잠시 머뭇거렸다. 너무나 익숙하고 다정한 걱정에 입술이 굳어 움직이질 않는다. 온 힘을 다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야 했다.
“응, 괜찮아.”
뒤늦게서야 겨우 대답이 나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가에 옅은 미소도 걸쳤다.
잠시 나왔다 들어가는 길이었는지, 한지석은 가방도 없는 맨몸에 지갑과 휴대폰만 들고 있었다. 그의 눈이 분주하게 주위를 살폈다.
이런 날씨에, 그것도 학교 정문 앞에서 우선경이 혼자 서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차는?”
“아. 오늘 누구를 만나기로 해서.”
“선경 씨!”
멀리서 외치는 소리에 두 사람의 얼굴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길가에 세워진 외제 차에서 공효준이 내리고 있었다.
늦었다는 사실에 당황했는지 그는 외투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손에 덜렁 움켜쥔 채 우선경이 있는 곳까지 달려왔다.
“미안해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야 했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괜찮아요.”
“추운데 계속 밖에 있었어요?”
공효준은 손에 들고 있던 머플러를 펼쳐 우선경의 목에 둘렀다. 제 추위보다 선경의 휑하니 빈 목덜미가 더 신경 쓰였나 보다.
부드러운 캐시미어가 목과 아래턱에 둘둘 감겼다. 남자가 즐겨 쓰는 향수 냄새와 더불어 페로몬이 짙게 배어 있었다.
몇 발자국 떨어져 있던 한지석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진한 향이었다.
한지석은 조용히 공효준을 훑어 내렸다. 어떤 사람인지 가늠해 보려는 건지 그의 말투와 옷차림, 사소한 행동까지 주의 깊게 살폈다.
공효준이 그 시선을 못 알아챌 리 없었다. 게다가 상대가 우성 알파라는 사실이 공효준의 신경을 건드렸다. 하지만 그는 표정 관리에 능숙했다. 굳어진 눈가를 사르르 풀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
“대화 중이셨나 봐요.”
“네, 아는 형을 만나서요.”
아는 형. 생각지도 못한 지칭에 한지석은 고개를 떨구며 웃었다.
이제는 고작 그 정도의 사이가 맞는데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잘 지내.”
“…….”
“가죠, 춥네요.”
우선경은 짧게 인사를 전하며 등을 돌렸다.
공효준이 그의 등에 손을 얹으며 에스코트하듯 이끌었다. 순순히 걸음을 옮기고, 공효준이 열어 주는 조수석에 몸을 밀어 넣는 모습까지, 모든 장면이 느리게 재생되는 영상처럼 지석의 눈에 담겼다.
자동차 보닛을 빙 돌아 서둘러 운전석으로 돌아가던 공효준은 차에 타기 전 한지석을 보며 가볍게 눈인사를 던졌다. 딱히 자랑이나 과시도 아니었다. 그저 몸에 밴 매너와 같았다. 좋은 사람인 게 분명했다.
검게 틴팅된 외제 차는 시동을 걸기가 무섭게 혼잡한 대학가를 빠져나갔다.
우선경이 미련 없이 떠난 자리를 홀로 지키던 한지석은 목구멍이 턱턱 막히는 기분에 허리를 숙이고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날씨가 이토록 추운데 이마엔 식은땀이 흥건하다. 지석은 도로석 위에 주저앉아 얼굴을 쓸었다. 젖은 속눈썹에 매달린 게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안 갔다.
거지같은 놈이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면 저딴 놈 만나지 말라고 화를 내고 끌고 갈 명분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지석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떨었다. 본인의 처지가 우습기만 했다.
이 멍청한 새끼야. 다 네가 자초한 거야.
메스꺼움을 참아가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누군가 바늘로 뱃속을 사정없이 찌르는 느낌이다. 고문이 따로 없었다.
***
공효준은 조심스럽게 스피커 볼륨을 낮췄다. 차에서 흘러나오던 피아노 선율이 급격하게 잦아들었다.
작게 내쉬는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차 안이 고요해졌지만, 우선경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텅 빈 눈으로 내내 창밖만 내다보느라 상대가 뭘 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는다.
조용히 눈치를 보던 공효준이 물었다.
“지금 영화 볼 기분 아니죠?”
“… 괜찮아요, 봐도 상관없어요.”
“아까 그 남자 누구였는지 물어봐도 돼요? 헤어진 전 남친?”
“…….”
삐딱하게 돌아가 있던 우선경의 얼굴이 운전석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공허하던 얼굴은 일순간 서늘하게 굳어버린다.
“제가 대답해야 하나요?”
“많이 좋아했나 봐요. 아니지, 지금도 좋아하는 거죠?”
“공효준 씨.”
“상대도 그런 것 같던데.”
공효준은 꾸준히 전면 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여유로운 목소리와 달리 운전대를 쥔 손엔 힘이 바짝 들어가 있다.
“마음 정리 쉽지 않다는 거 잘 알아요. 서두르라 재촉할 생각도 없고. 우선경 씨가 나에게 갖는 마음이 그저 호감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결혼을 급하게 한다고 해서 감정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죠.”
“…….”
“그냥 나한테도 기회만 준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난 어떻게 해서든 우선경 씨 마음에 들 자신 있으니까. 원래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는 게 확실하다잖아요. 내가 끼어들게만 해 줘요.”
우선경은 꺾인 고개를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휙휙 뒤바뀌는 풍경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영화를 보면서도 통 집중이 되질 않았다.
분명 치고받고 부수는, 시끄러운 액션 영화였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기억나는 거라곤 눈발 날리는 거리에서 보았던 한지석의 모습뿐이었다.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어두워진 걸 본 공효준은 나름 분위기를 전환한답시고 장소를 옮겼다.
도착한 곳은 한강이 내다보이는 공원 둔치였다.
거짓말처럼 똑같은 곳을 마주하자 선경은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을 경험했다.
단단하게 가공해 놓은 줄 알았던 심장은 고장 얇은 판자 한 겹으로 덧대어 놨던 것뿐이다. 퍼붓듯이 쏟아지는 그리움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려 버린다. 선경은 아이처럼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이유를 모르는 공효준은 크게 당황하며 그를 차로 데려갔다. 도무지 눈물을 그치지 않는 우선경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도 모르고 그저 휴지만 찾을 뿐이었다. 이따금 등을 두드려 주고, 미지근한 물도 권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우선경은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아직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탓에 목소리가 헐떡거렸다.
“…미안해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요.”
“그렇게 힘들어요?”
“없으니까, 죽을 거 같은데…, 어떡해요. 앞으로 평생 이러고 살 순 없어요.”
큰 눈에선 또 한 번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지켜보던 공효준조차도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음…. 내가 어떻게 해 주면 좋으려나.”
방법을 찾지 못하고 한참 위로만 해 주던 공효준은 차 시동을 걸었다. 일단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맞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