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72화 (72/127)

#72

반포에서 성북동까지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선경은 스스로 숨을 고르고 진정했다. 울었던 흔적도 최대한 지워냈다. 창문을 조금 열어 찬바람을 쐬니 달아올랐던 눈가는 느리지만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어느새 차는 주택들이 길게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섰다. 차가 멈추고, 백색의 전조등 불빛만 어둡고 조용한 길목을 밝혔다.

“괜찮아요?”

“죄송해요. 마지막까지 못 볼 꼴을 보여서.”

“아니, 이러면 내가 더 이상 조르지도 못하잖아요. 하아, 우선경 씨 진짜…. 너무 야박하네.”

“…죄송합니다.”

떨리는 목소리는 연신 사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효준은 탄식을 길게 뱉었다.

지금껏 늘 빈틈없고 당돌한 모습만 봐오다 감정에 마구 휘둘리는, 날것의 모습을 보고 나니 꿈이라도 꾼 듯 어안이 벙벙해진 느낌이다.

공효준은 이제 와서야 우선경이 제 나이답게 보인다고 생각을 했다.

결국은 이런 솔직한 모습도 그 남자와 관련되어서야 볼 수 있다는 건가. 약간은 허망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효준은 잠시 말을 아끼며 운전대만 꾹꾹 쥐었다. 전면 창을 바라보는 시선이 살짝 위로 들린다. 다시 제자리를 찾은 효준의 눈빛은 살짝 단단해졌다.

“제가 속이 좁아서 집 앞까지 데려다주진 못할 것 같네요.”

“네.”

“조심히 들어가고. 추운데 밖에 너무 오래 있지 말아요.”

우선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배웅까지는 원치 않았다.

공효준이 이렇게까지 해 주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친절이라 여겼다. 안 그래도 그 앞에서 아이처럼 울었던 게 민망했던 터라 재빨리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잠시 약해졌던 눈발이 지금은 함박눈이 되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오히려 눈이 내리니 추위가 잦아든다. 온통 조용한 가운데 까만 하늘에선 사박사박 눈 내리는 소리만 들렸다.

지긋이 하늘을 둘러보다 대문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담벼락 앞에 서 있는 기다란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얼굴을 확인한 선경은 너무 놀란 나머지 제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버렸다.

그런 우선경에게 한지석이 성큼 다가왔다.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그의 얼굴은 온기를 모두 빼앗긴 사람처럼 핏기 없이 파르스름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보며 우선경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움직였다.

“…왜, 여기 있어.”

“묻고 싶은 게 있어서.”

한지석이 입을 열었다. 입김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온몸엔 한기가 가득했다.

“내가 많이 늦은 거 아는데.”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이제라도 내가… 다 포기하고 온다면, 너 내 옆에 있어 줄 거야?”

“…….”

“우선경, 너랑 결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한지석은 코앞까지 다가와 물었다. 애원하는 목소리와 달리, 자세는 곧고 눈빛은 여전히 형형하다.

손을 뻗으면 너무나 쉽게 닿을 거리인데도, 우선경이 허락하지 않는 한 선을 넘지 않을 작정인지 요지부동 주먹만 쥐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을 모르겠어. 그러니까 네가 알려 줘.”

“…나한테 사랑한다고 해.”

고작 말 한마디면 됐다.

긴 숨을 토해내던 지석은 흐리게 웃었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너로 인해 내 삶이 통째로 바뀐다고 해도 상관없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게 미래든, 내 자유든 원하는 건 뭐든 내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우선경은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제대로 확인받고 싶었다. 무서워서 몇 번이고 들어야 했다.

반드시 한지석의 목소리로 직접 말하는 걸 들어야만 현실이라는 게 믿어질 것 같았으니까. 선경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지석의 옷깃을 붙들었다.

“제대로 말해. 나 사랑한다고. 빨리 말해!”

“사랑해, 선경아.”

한지석은 흥분하며 소리치는 우선경을 가득 끌어안았다. 내내 막혔던 숨통이 비로소 트인다. 이걸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온몸이 우선경의 냄새를, 체온을, 식지 않은 애정을 열렬히 반겼다.

이후로도 한지석은 끊임없이 사랑한다 고백했다. 선경이 이제 됐다고 먼저 말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바닥엔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담벼락 앞에서 한 몸처럼 얽힌 이들은 여전히 떨어질 줄 몰랐다.

풀리기는커녕 서로에게 고개를 기대고 더 강하게 껴안았다. 빈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 안 늦었어?”

“늦었어. 엄청 늦었는데, 봐주는 거야.”

“미안해…. 앞으로는 잘할 테니까….”

한지석의 쉰 목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땐 이미 그 큰 몸이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선경이 그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형, 한지석! 왜 이래, 형!”

얼굴이 온통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치 혈색이 모두 빠져나간 사람처럼.

이렇게 날씨가 추운데 이마와 뺨, 목덜미엔 식은땀이 가득했다. 한눈에 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여 선경은 발을 동동 구르며 재차 안색을 살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나 좀 봐봐.”

“괜찮, 아. 괜찮….”

벽에 겨우 기대서 있던 몸이 결국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버린다.

“형!”

우선경이 재빨리 팔로 지탱했지만 덩치와 무게 모두 제가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비스듬히 안겨 있던 지석이 완전히 정신을 잃자 선경은 허겁지겁 제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지석의 몸 위에 덮었다.

그를 바닥에 눕혀놓고 집 앞으로 달려갔다. 벨을 누르고 아무나 빨리 나오라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잠시 뒤 선경의 목소리를 들은 배 집사와 고용인 여럿이 대문 밖으로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

“아니, 잠깐만 보고 나오겠다니까?”

“안 돼요.”

“여기까지 왔는데 이럴 거야? 얼굴만 좀 보자고. 앞으로 식구 될 건데 인사 좀 하는 게 뭐 어때서 그래?”

“그만 가세요. 부른 적도 없는데 왜 병원까지 와서 아픈 사람 귀찮게 하시는 건데요?”

“야!”

면회가 엄격히 통제된 병실 앞에서 짧은 언쟁이 오갔다.

명품과 보석으로 평소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한 우정화는 우선경이라는 철옹성에 막혀 문고리조차 잡아 볼 수 없었다.

어른을 물로 봐도 유분수지, 끝끝내 문도 열어 주지 않고 쫒아내는 어린 조카의 작태에 결국 참았던 성질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오늘 아침, 우선경은 대뜸 전화를 걸어 선을 그만 보겠다고 선언했다. 결혼할 사람을 정했다는 말과 함께.

물론 상대는 우정화가 소개해 주지 않은 제3의 인물이었다. 덕분에 잡아놓은 일정을 모두 제쳐놓고, 직접 따져 묻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우정화는 팔짱을 낀 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선경을 올려다봤다.

“그래서 앞으로 선은 안 보시겠다, 내가 그 고생을 했는데 결혼은 저 알파랑 할 거라고.”

“고모가 이어 줬다고 말할게요. 그동안 고생하셨는데 보상은 제대로 받으셔야죠.”

“정말이지!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너.”

어차피 리조트가 중요했지, 조카가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었다. 확답을 받고 나서야 우정화는 날 선 태도를 누그러트렸다.

기분이 좀 풀리자 슬슬 다른 떡밥이 궁금해진다. 안에 누워 있는 남자에게 지극한 관심이 생겼다.

저 우선경이 푹 빠져서 정신 못 차리게 만든 장본인이 대체 누군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우성 알파라던데, 잘생겼겠지?

병실 문에 달린 작은 쪽창으로 얼굴이 슬쩍 기울자, 선경이 제 손바닥을 펼쳐 창문을 가린다.

절대로 안 보여 주겠다는 지독한 고집에 괜한 오기가 생길 지경이다. 우정화는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본다고 닳아?”

“닳아요. 나중에 결혼식 할 때나 보세요.”

“싸가지 없기는. 가만 보면 넌 재경이보다도 더 해.”

간다, 약속한 거 잊지 말고. 흥미를 잃은 우정화는 칼같이 돌아섰다. 볼일이 끝났으니 더 이상 이 지긋지긋한 병원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고모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던 선경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묵직한 미닫이문을 열고 내내 막고 서 있던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퇴원을 준비하던 참이라 한지석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환자복 상의를 벗은 맨몸이 훤히 드러났다.

넓은 어깨와 탄탄해 보이는 근육은 여전했지만 한눈에 봐도 살이 빠진 모습이었다. 우선경은 그의 얼굴과 몸을 고루 훑으며 눈살을 찡그렸다.

병명은 급성 위궤양이라고 했다.

타들어 가는 통증을 참기도 힘들었을 텐데 그마저도 방치해 둔 탓에 위염이 위궤양으로 번진 상황이었다. 평소 자기 관리 잘하던 인간이 왜 이렇게까지 미련하게 굴었나, 조금 화가 날 정도였다.

선경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걸 본 지석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우정화의 목소리가 안까지 들려와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다.

“왜, 들어오시라고 하지.”

“우리 고모 안 겪어 봐서 그래. 스트레스로 병난 사람한테 스트레스를 더 안겨 주라고? 차라리 내가 욕먹는 게 나아.”

선경은 벗어놓은 환자복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딱히 할 필요는 없었지만, 가만히 있는 게 왠지 더 어색했다.

“학교는, 이렇게 빠져도 괜찮아?”

“괜찮아. 자퇴서 냈어.”

“뭐?!”

우선경과의 결혼을 결심한 날, 곧바로 지도교수를 만나러 갔다.

그의 외삼촌이기도 한 고종환 교수는 아쉬워했지만 지석의 선택을 존중해줬다.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표했다.

서류를 제출하자 제적 처리는 단 1시간 만에 이뤄졌다.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미련이 안 남을 정도였다.

“내가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널 찾아갔다 생각해?”

“안 받아 주면 어쩌려고 그랬어?”

“글쎄, 받아 줄 때까지 빌어 보려 했지. 안 되면 뭐… 인생 망하기밖에 더 할까.”

“와… 미쳤구나, 진짜.”

선경은 여전히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입을 벌린 채 미쳤다는 말만 연발했다. 그는 셔츠를 막 어깨에 걸치고 있는 지석에게 홀린 듯 다가갔다.

한지석은 제 품 안으로 뛰어든 선경을 엉겁결에 마주 안았다. 뭐에 그리 감동인 건지 맨살에 얼굴을 부비고 가슴과 목에 쪽쪽 입을 맞추는 걸 난감한 듯 쳐다보며 웃었다.

“나 진짜 형이 결혼 후회하는 일 없도록 잘해 줄 거야.”

“일단… 지금 너무 자극하지는 말고.”

“아, 미안. 아무도 없어서 너무 막 나갔네.”

환자한테 들이댄 게 민망했는지 우선경은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금세 다시 잡혀 품속에 갇혔다. 이번엔 한지석이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뽀뽀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치, 인사 같은 건데. 그럼 조금만 할까.”

눈치를 보며 슬슬 고개를 꺾었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살점이 부드럽게 겹쳐진다.

지석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그는 입술을 가까이 붙인 채 “우선경, 입이 너무 열려 있는데.”라고 중얼거렸다. 선경이 웃으며 그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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