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73화 (73/127)

#73

병원에서 퇴원한 직후 한지석은 우 회장에게 호출을 당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함께 별채로 찾아갔지만, 우선경은 그날 하루 동안만큼은 출입을 금지당했다. 철저하게 한지석과 독대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오후 3시에 들어갔던 사람은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배 집사를 붙잡고 안의 상황을 물어봤지만 할아버지의 언질이 있었는지 단 한 마디도 언급해 주지 않았다. 그나마 광주댁이 저녁 식사 후 주안상이 들어갔다는 말을 전해 줬다. 술이라니! 한지석은 지금 환자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어떻게 술이 들어갈 수 있지?!

할아버지의 괄괄한 성격에 미루어 볼 때 밤새 퍼먹이며 괴롭혀댈 게 분명했다. 결국 우선경은 걱정에 밤을 꼴딱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아침 7시가 되자 할아버지의 오래된 기상 습관에 맞춰 별채 앞에서 대기했다.

한겨울에 겉옷도 없이 니트에 파자마 바지만 덜렁 입고 서 있는 우선경을 보곤 별채 고용인들이 지레 놀라 문을 열어 주고야 말았다.

거실로 들어온 선경은 다짜고짜 배 집사부터 찾았다. 마침 대청마루로 나오는 중년의 남자를 보자마자 그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할아버지는요?”

“방금 기침하셨습니다. 지금 씻으러 들어가셨으니 조금만 기다리시죠.”

배 집사가 능숙하게 우선경을 어르고 달랬다. 다소 정신없어 보이는 막내 도련님을 데려가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혔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 잔주름이 잡힌 눈가엔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 말로는 할아버지를 찾으면서, 큰 눈을 두리번거리며 한지석의 흔적을 쫓는 게 그의 눈엔 마냥 귀여워 보였다.

“어제 많이 드셨어요?”

“예, 기분이 좋으셨는지 오랜만에 아끼던 술도 꺼내시더군요. 물론 직접 드신 건 아니시고요. 회장님 요즘 술 입에도 안 대시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그 술을 누가 다….”

선경이 답답한 한숨을 터트릴 때였다. 건넛방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사람이 기어 나왔다.

아침까지도 술에 만취해 있는 건 큰 형 우선우였다. 한지석은 그 뒤를 따라 멀쩡한 상태로 걸어 나왔다.

***

“어제 그 술 내가 다 먹었어….”

우선우는 까치집이 된 머리를 움켜잡고 앓는 소리를 뱉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진한 술 냄새가 났다. 선경이 말없이 손사래를 치며 코앞까지 밀려오는 시큼한 냄새를 없앴다.

그 와중에 눈은 한지석의 얼굴을 훑느라 바빴다. 제 알파를 챙기느라 큰형의 술병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형은, 안 마신 거 맞지?”

“느이 형 여기 죽어가는데….”

“지석이 형 말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약도 하루 치 안 먹었어. 내가 챙겨 왔으니까 이따가 아침 먹고 바로 먹자.”

저 매정한 자식, 우선우는 콧물을 훌쩍이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으어어, 숙취가 심한지 짐승 같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각선에 앉아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우 회장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기분 좋게 아래턱을 문질렀다.

“선경이가 저러는 거 보면 단단히 빠졌나 보구나. 걱정 말아라, 설마 내가 막 퇴원한 사람한테 술을 먹였으리라고.”

“의사가 아직 무리하면 안 된댔어요.”

“알았다, 이놈아. 벌써부터 제 서방이라고 챙기고 드는 것 좀 보게. 어디 무서워서 손주사위랑 밥 한번 먹겠나. 나도 우리 지석이 함부로 다룰 생각은 없다. 약은 내가 미처 생각을 못 했네.”

“괜찮습니다. 크게 아픈 것도 아닌데요.”

본 지 하루 만에 ‘우리 지석이’가 됐다. 아무래도 할아버지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다.

슬쩍 손가락을 얽어 넣었다. 한지석은 말없이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아 왔다.

결혼 준비는 빠르게 진행됐다.

우 회장의 허락을 받은 다음 날, 한지석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자퇴 선언에 놀랄 새도 없이 재벌가와 사돈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에 부모님은 사뭇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 물론 부모님을 이해시키는 부분은 한지석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가 몇 날 며칠 동안 공을 들여 설득한 덕분에 한지석의 부모님께도 승낙을 얻어 낼 수 있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뭐…. 우리야 둘이 잘 살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아휴, 선경 씨, 그러지 말고 편하게 앉아요.”

한지석의 모친은 집으로 찾아온 우선경이 아직도 어려운지 그가 뭘 할 때마다 안절부절 못하며 부담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말조차 놓지 못하고 우선경 씨, 하고 늘 존칭을 붙였다.

스무 살밖에 안된 앳된 청년은 몸가짐이 어찌나 바른지 방석에 무릎 꿇고 앉아서도 시종일관 허리를 곧게 폈다.

하얗고 고운 얼굴은 진주처럼 은은한 영채가 돌았다. 오목조목 따져보아도 안 예쁜 구석이 없었고 자세와 말투, 몸에서 나는 향기까지 귀태가 흘렀다.

제 아들놈이 오메가와 결혼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남자 오메가를 데려올 줄 꿈에도 상상 못 했던 모친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이 왜 우선경에게 빠졌는지 통감하고 있었다.

우선경은 준비해 온 상자 중 하나를 슬쩍 앞으로 밀어 보냈다. 나비가 새겨진 검은 목각함에는 한지로 된 종이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꼽으신 결혼식 날짜입니다. 모두 길일이라고 하던데, 아버님 어머님이 보시고 괜찮은 날로 골라 주셨으면 합니다.”

“어머나, 이렇게까지.”

모친이 종이를 들어 날짜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옆에서 시종일관 무뚝뚝하게 앉아 있는 남편에게도 의사를 물었다.

연말이 좋으냐, 해를 넘기는 게 좋으냐 슬쩍슬쩍 말을 걸었다. 한지석의 부친은 관심 없는 척 팔짱을 끼면서도 눈동자를 굴리며 날짜를 훑었다.

“날짜는 다 좋은데, 식 준비하는 게 너무 촉박하지 않을까요? 전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결혼식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문가가 다 맞춰 준비해 줄 거라서요.”

“그럼 혼수나 예물 같은 건….”

“아, 그건요.”

우선경은 또 하나의 자개함을 앞으로 꺼내 왔다. 크기는 아까보다 못했지만, 외양만큼은 더욱 화려했다. 무지개 빛깔의 나전칠기가 영롱한 광택을 빛냈다.

선경은 자개함을 조심스럽게 내밀며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일정이 촉박하다 보니 일가 친척분들께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일까지 자택으로 인사 선물을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이건 그 리스트구요.”

“…세상에.”

지석의 어머니가 입을 벌리며 자개함에 든 봉투를 꺼냈다. 길게 이어지는 명단에는 이름과 선물 내역이 명세서처럼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가까운 형제자매, 사촌부터 멀게는 육촌까지. 그 수만 해도 백여 명이 넘었다.

한복과 명인이 제작한 유기 반상기는 기본으로 포함되어 있었고 외제 차, 순금 세트, 명품 가방, 최상급 진주, 백화점 상품권, 홍삼 등등 촌수에 따라 선물의 종류도 천차만별 다양했다.

“어머님, 아버님께선 금전적인 걸 한사코 마다하신다길래 두 분 예단은 생략했습니다.”

“그래요. 잘했어요. 나는 지금 이 종이만 봐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대신 다른 걸 해드리려고요.”

담담한 목소리로 덧붙이는데 그게 어찌나 의미심장하게 들리는지, 지석의 어머니는 가슴을 누르며 작게 딸꾹질을 했다. 옆에 계신 아버지가 서둘러 식은 찻잔을 건넸다.

선경은 작게 호흡을 가다듬더니 속사포 같은 말을 이어갔다.

“저희는 한국에 신혼집이 없으니까 혼수도 필요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지금 살고 계신 집을 좀 바꿔드리고 싶습니다. 형 얘기 들어 보니까 가구랑 가전 모두 사용하신 지 최소 십 년은 넘으셨다면서요. 하루 날 잡아서 여행 다녀오시면 그사이 모두 교체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저기, 선경 씨. 우리 집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나는 지금도 충분해, 지금 이건 너무 과해요.”

“어머니, 저 결혼하면서 아무것도 안 해 가면 그걸로도 뒷말 나와요. 제 사정 봐주신다 생각해 주시고 제발 받아 주세요.”

“설마…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한다고요? 얘, 지석아, 정말이니?”

터무니없는 말에 놀란 듯 모친의 눈동자가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우선경 옆에 선비처럼 앉아 있는 아들에게로 향했다.

재차 확인하는 질문에 한지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묵묵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이미 그도 한차례 설득해 봤지만, 우선경의 쇠심줄 같은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우선경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말을 더 얹었다.

“마음 같아선 집도 더 넓은 곳으로 옮겨드리고 싶은데, 한남동 공관도 마다하셨다면서요. 괜히 제가 나섰다가 지금까지 지켜 오신 청렴한 신조에 누를 끼칠까 싶어서 걱정이….”

“어머, 그건 정말 아니야! 우린 이걸로도 충분해요!”

지석의 어머니는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며 손을 내저었다. 격렬한 만류에 선경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정확히 십 분 뒤, 초인종 소리와 함께 양복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배 집사를 필두로 인테리어 디자이너, 서화 백화점 VIP 퍼스널쇼퍼, 가전제품 매장 총괄 매니저가 양손 가득 카탈로그를 들고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손님들의 방문에 지석의 모친은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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