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74화 (74/127)

#74

***

“적당히 하지 그랬어, 우리 어머니 오늘 심장 떨려서 잠도 못 주무실 거야.”

“나 굉장히 절제한 건데. 그리고 남의 집 귀한 외동아들 데려가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되는 거 아냐?”

선경은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중얼거렸다. 오히려 제 욕심껏 더 하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시간만 조금 더 있었어도 어머님을 설득해 두 분 차도 더 좋은 거로 바꿔드리고, 골프장 회원권도 몰래 구입해드리는 건데… 손님이 몰려오는 바람에 지석의 방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다시 기회를 노려 보는 수밖에.

못다 한 계획은 잠시 뒤로 미뤄 두고 일단은 지석의 방을 둘러보기로 했다. 책상 위에 걸터앉은 선경의 고개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적당한 크기의 방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하얀 침구로 덮여 있는 슈퍼 싱글 사이즈의 침대와 붙박이 옷장, 낡은 소설책과 시집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책장과 아직 형법서와 법전들이 쌓여 있는 책상까지. 모두 한지석의 냄새로 가득하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한지석은 의자에 앉아 선경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역시 저의 오래된 공간에 우선경이 들어와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우선경 스케일을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 마. 씀씀이 줄이는 건 어려워도 키우는 건 금방이거든. 아, 그리고 이건, 형 거야.”

선경은 방금 떠올랐다는 듯이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그 안에서 나온 건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남성용 시계였다.

“별건 아니야. 그냥 내 방 소파에 굴러다니는 거 주워 왔어.”

우선경은 직접 폴딩 버클을 열더니 지석의 손목에 시계를 채웠다. 맞춘 것처럼 길이가 딱 맞았다.

“예쁘네.”

비싸 보인다며 뭐라 할 줄 알았건만, 지석은 의외로 시계를 마음에 들어 했다.

“괜찮아? 마음에 들어?”

반응을 보자 내심 뿌듯했는지 선경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시계를 찬 지석을 내려다본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잘 어울렸다.

“응, 네가 해 주는 건 다 마음에 들어. 안목이 좋잖아.”

“내가 고른 것 중에 한지석이 제일 고급스러운데, 그건 어떻게 생각해?”

“그건 내 입으로 평하기가 곤란한데.”

지석이 웃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자연스럽게 보내오는 신호에 선경은 허리를 깊게 숙여 그의 입술과 볼에 쪽쪽 입을 맞췄다.

참새처럼 쪼아대던 귀여운 입맞춤은 어느새 겹쳐지는 시간이 길어지고 농도도 짙어졌다.

장소를 망각하고 열중해버린 지석은 입에 고인 침을 삼키며 어렵게 고개를 뗐다. 아쉬운 듯 엄지로 선경의 젖은 입술을 문질렀다.

“여기서 더 하면 큰일 나겠는데.”

“다른 얘기 꺼내 봐.”

“으음, 나 오늘 아침에 결혼반지 찾아왔어.”

“뭐?!”

그걸 왜 지금 말해! 우선경은 눈을 크게 뜨며 달려들었다. 아예 책상에서 내려와 지석에게 매달리듯 안겼다.

“뭔데, 궁금해! 보여 줘!”

“안 돼.”

“아, 왜!”

“결혼식 때 보여 주기로 했잖아. 그때까진 궁금해도 참아.”

한지석은 끝까지 완강했다.

얼마 전엔 느닷없이 결혼반지를 주문하고 왔다는 얘기를 하며 사람을 놀래키더니, 심지어 반지가 나왔는데도 안 보여 주는 건 정말 너무했다.

물론 한지석의 미적 감각을 의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결혼반지 아닌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면 상상이라도 하게, 말로 설명해 줘.”

제발, 선경은 애타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지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선경의 손을 끌어왔다. 가지런한 손가락이 보기 좋게 놓였다.

“색은 화이트골드고 굉장히 슬림해. 부분 부분이 각지게 컷팅되어 있는데 빛을 받을 때마다 반사돼서 예뻐. 넌 손가락이 워낙 곧으니까 약지에 끼워놓으면 정말 잘 어울릴 거야.”

“계속 말해 봐.”

“가운데는 다이아를 넣었는데 캐럿이 크지는 않아. 매일 끼고 다녀야 하니까.”

“잘했어.”

“그리고 안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새겨놨는데….”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듣고 있던 선경의 눈가가 행복에 잠긴 듯 사르르 접히며 도홧빛으로 물들었다.

***

런던의 봄은 무척이나 변덕스럽다.

아침엔 목이 움츠러들 정도로 쌀쌀했다가, 오후에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훈풍이 불었다.

게다가 하늘은 어찌나 흐린지.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내리고 그치길 반복했는데 영국으로 온 지 두 달쯤 지나니 이제 오락가락하는 날씨쯤이야 그러려니 하고 웃어넘기게 됐다.

오늘은 모처럼 하늘이 맑았다.

학교 앞 드넓은 잔디밭은 짓이겨진 풀냄새가 생생했고, 쏟아지는 햇볕은 따스하고 보드라웠다. 보기 드문 살가운 날씨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도 여유가 만만하다.

런던 비즈니스 스쿨이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센트럴 카페도 모처럼 테라스를 오픈했다.

카페 로고가 새겨진 초록색 어닝을 길게 펼치고 그 아래로 작은 테이블과 철제 의자를 다닥다닥 붙여 자리를 만들었다.

협소한 공간임에도 다들 모처럼 좋은 날씨를 놓칠 수 없었는지 테라스는 차와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느새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손님의 대부분은 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경영 대학원답게 다양한 국적의 유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저기 저 남자, 멋있다. 내 취향이야.”

“검은 셔츠? 그러게, 동양인치곤 키가 크네. 알파인가?”

옆자리에 앉은 오메가 두 명이 가볍게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자리가 가까워 얘기가 저절로 귓가에 박힌다. 커피를 앞에 두고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우선경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치켜뜬 눈이 그들과 같은 곳으로 향했다.

유백색의 건물에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섞인,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높이 있는 남자가 보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잘생긴 얼굴은 어디서나 눈에 띄기 마련이다.

“가서 말 걸어 볼까?”

“애인 있지 않겠어?”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그냥 보내기엔 너무 멋진…, 세상에! 이쪽으로 오네!”

붉은 고수머리를 살살 꼬아대던 남자는 알파가 막상 카페를 향해 걸어오자 지레 놀라며 펄쩍 뛰었다. 옆에 있던 친구는 깔깔 웃으며 그의 어깨를 장난스레 밀쳤다.

한지석은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며 금세 야외 테라스로 다가왔다. 우선경이 앉아 있는 의자 등받이와 테이블에 각각 손을 뻗으며 허리를 숙였다.

가볍게 입을 맞추는데, 반겨 주기는커녕 뾰족해진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입술을 뗀 지석은 선경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대신 정리해 주며 난감한 듯 웃었다.

“왜 화가 나셨을까, 많이 기다렸어?”

“어디 솔드아웃 표시를 해 놓을 수도 없고. 이건 뭐 반지를 끼고 다녀도 유부남 티가 안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

우선경은 불편한 심기를 애써 누르고 짐을 챙겼다. 지갑에서 5파운드를 꺼내 커피잔 밑에 끼워 넣더니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지석을 올려다보며 여전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대로 해.”

“응?”

“키스 제대로 하라고.”

밑도 끝도 없는 재촉이었지만 한지석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허리에 손을 감고 분부대로 깊게 입술을 겹쳤다.

길거리에서 진한 키스를 해도 여기선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남의 눈치 안 보고 서슴없이 애정 표현을 할 수 있는 것, 그 역시 영국 생활로 얻게 된 것 중 하나였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두 사람은 바로 런던으로 넘어왔다.

우선경은 내내 바라왔던 예술 경영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한지석은 MBA 과정에 지원했다.

둘 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새로운 자리에서 경영을 해나가야 하는 입장이라 학업에 진심으로 열과 성을 다했다.

학비며 생활비 같은 금전적인 문제는 우 회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해 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스트레스 받을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공부에만 전념하고, 행복한 신혼을 즐기기만 하면 됐다. 그야말로 남 부러울 것 없는 유학 생활이었다.

조금 걸어 집 근처에 있는 오래된 서점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올리브 컬러로 덧칠된 목조건물은 한눈에 봐도 역사가 묻어나 보인다.

클래식하고 고풍스러운 외관과 달리 안에는 온갖 희귀한 잡학 서적들이 가득했다. 한지석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유독 좋아했다.

서점에서 한참 책을 고르고 나선,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식당으로 넘어갔다.

평소 자주 찾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자 직원은 단골손님을 알아보고 그들에게 가장 목 좋은 창가 자리를 내줬다.

우선경은 간단한 클럽 샌드위치와 카프레제 샐러드를, 한지석은 관자가 올려진 바질페스토 파스타를 시켰다. 식사가 나올 동안 선경은 잠시 창밖을 내다봤다.

쾌청한 날씨 덕분인지 매일 보던 나이트 브릿지 거리가 평소보다 더 활기차 보였다. 마침 그 앞을 한 무리의 관광객이 지나가자 선경은 잊고 있었던 게 불현듯 떠올라 이마를 짚었다.

“맞다, 무열이가 다음 달에 놀러 온다고 했는데.”

“왜?”

“왜긴, 나 보고 싶어서지.”

여자 친구와 세기의 사랑을 꿈꾸던 권무열은 얼마 전 실연을 겪었다. 여친도, 절친도 제 곁에 없으니 부쩍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았다.

결혼식 할 때도 사연 있는 전 남친처럼 꺼이꺼이 울더니 결국은 런던행인가. 한지석은 뺀질뺀질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닌지 반듯하던 입매가 절로 삐뚤어진다.

“오는 건 상관없는데, 잠은 나가서 자라고 해.”

“왜, 집에 방도 남는데.”

“친구한테 우리 밤마다 뒹구는 소리 들려주고 싶으면 그러든가.”

그제야 우선경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 부분은 미처 생각지 못했는지 얼굴을 붉힌다. 목덜미를 살살 문지르는데 그새 무슨 상상을 했는지 귓바퀴와 목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옆집에서 항의 들어왔어. 새벽에 시끄럽다고.”

“그 집은 다 좋은데 방음이 형편없어. 침실 벽 쳐봤어? 벽이 텅 비어 있던데.”

“…이따가 들어가면서 와인이라도 사 가자. 뇌물이라도 주면 좀 참아 주겠지.”

“절대 줄이겠다는 소리는 안 하네.”

“시끄러워, 밥이나 먹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타박하자 지석은 웃음을 터트리며 알겠다,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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