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한지석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짧은 자기소개를 마친 뒤 지석은 마주 보이는 직원들의 얼굴을 두루 살폈다. 하나같이 놀라고 벙찐 표정들을 하고 있다.
그나마 옆 사람을 따라 관성적으로 박수를 치긴 하는데, 누가 봐도 썩 달가워하는 느낌은 아니다. 낙하산 인사가 불만인지 대놓고 흘겨보는 시선들도 곳곳에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라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지석은 오히려 입술을 끌어올렸다. 여유가 가득한 웃음과 달리 눈빛은 흔들림 없이 강직하게 빛났다. 그는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며, 당당하게 말을 이어 갔다.
“여러분이 어떤 부분을 우려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 자리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모든 부서가 중요하고 의미 있겠지만 그중 경영지원본부는 특히나 회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본부장직을 맡은 만큼 제 모든 역량을 다해 책임지고 이끌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정중히 소신을 밝히자 아까보다 더 큰 박수가 몰아쳤다. 사람들의 날 선 표정도 훨씬 부드럽게 풀렸다.
확실히 카더라만 믿는 것보단 실제로 보고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게 좋았다. 나지막하게 깔리는 목소리와 진중한 어조, 또 조각 같은 외모가 어우러지니 신임 상무이사의 호감도는 한결 높아졌다.
직원들과 짧은 상견례를 끝낸 한지석은 가볍게 묵례한 뒤 수행 비서를 데리고 사무실을 떠났다. 긴 다리로 내딛는 보폭마저 시원시원하게 넓었다.
그가 파티션이 길게 늘어선 복도를 지나 코너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그때까지 강제로 입을 닫고 있던 전략기획실 오 대리는 참았던 탄성을 터트렸다.
“우와, 뭐야! 나 우성 알파 처음 봐!”
“과장님, 이게 말로만 듣던 그건가요? 얼굴 복지?!”
곁에 있던 이 주임까지도 말을 보탰다.
둘은 어제까지만 해도 가족 경영 같은 악습은 타파해야 한다느니,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느니 하며 한지석 신임 상무이사의 발령 소식에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던 사람들이었다.
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정 과장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오히려 한지석의 외형보다 입고 있던 질 좋은 정장이나 언뜻 보이던 명품 시계에 더 눈길이 갔다. 급이 다른 재력에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28살의 잘생긴 본부장에 재벌가 사위… 완전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캐릭터네. 하긴 우재경 씨도 그랬지. 우리랑 사는 세상이 달라.”
“그냥 밑도 끝도 없이 꽂은 건 아니던데요. 한 상무님 학력 봤어요? 한국대 경영학과에 로스쿨 다녔던 이력도 있고, LBT 출신이에요. 사실 나이랑 경력 말고는 별로 깔 것도 없어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딨겠냐. 성격이 개 같거나, 일을 못한다거나…. 분명 어디 하자가 있겠지. 뭐, 일단 두고 보자고.”
이후로도 한지석의 품평은 길게 이어졌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그가 떠나고도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
한지석의 개인 오피스는 12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쾌적하다 못해 텅 빈 복도가 그를 맞이했다. 사무실이 모여 있는 곳과 몇 층은 떨어져 있는 데다 몇몇 중역들만 사용하는 곳이라 특히 더 한산했다.
처음 오는 곳이라 고 비서가 한 발짝 앞서 걷고 있었다. 뒤따라가던 한지석은 살짝 시선을 내려 수행 비서의 걸음걸이를 지켜봤다.
미끄러운 바닥을 밟는데 구둣발 소리도 나지 않는 게 신기했다. 오늘 처음 소개받은 고 비서는 40대 초반의 남성으로 비서직 경력이 꽤 길었다.
점잖은 인상에 목소리는 튀지 않았고, 말이 많은 편도 아니다. 게다가 임원급만 주로 보좌해와서 그런지 상당히 눈치가 빠르고 분위기를 잘 캐치할 줄 알았다. 업무 능력이 출중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안내를 받아 오피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통의 임원실과 달리 실용적으로 보이는 작은 사무실이 하나 나왔다.
자리마다 컴퓨터가 놓여 있었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공간엔 별도로 마련된 소파와 티 테이블이 보였다. 한지석과 고 비서가 들어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안에는 이미 직원들이 배꼽 위로 손을 모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여기는 비서실 직원들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고 비서의 소개에 직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허리를 숙여왔다. 그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베타 남성 1명에 베타 여성 2명. 그러니까 총 3명의 비서가 붙은 셈이다.
이럴 필요까지 있나. 이제 갓 임원이 된 자신에겐 너무 과한 특혜가 아닌가 싶었지만, 한지석은 속내를 감추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오른손을 뻗어 비서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안쪽에 있는 문을 열자 그제야 제대로 된 공간이 나왔다. 숨겨져 있던 집무실은 안에서 업무와 접대, 회의를 모두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넓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전면에 보이는 묵직한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ㄱ자로 꺾인 책상은 크기가 워낙 커 그 위에 세 개의 모니터가 올라가 있어도 여유 공간이 넉넉했다. 으리으리한 책상을 훑던 한지석의 시선이 그 앞에 놓인 까만 명패에 고정됐다.
‘경영지원본부長 한지석 상무이사’
음각으로 파인 이름을 괜히 한번 쓰다듬어 보던 지석은 햇빛이 비쳐 들어오는 왼쪽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울의 테헤란로와 빼곡한 빌딩 숲이 내려다보였다. 불쑥 현실감이 더해진다.
감상은 그쯤에서 멈추고, 책상을 빙 돌아서 의자를 빼내 앉았다.
모니터 옆에 놓인 내선 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누르자 밖에서 대기하던 비서가 곧바로 응답했다.
-네, 이사님.
“지난번에 요청했던 자료들 혹시 준비됐습니까.”
-지금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비서 한 명이 문을 대신 잡아 주고, 고 비서가 바퀴 달린 트레이를 끌며 들어왔다.
도서관에서나 볼 법한 3층 카트에는 책 대신 노란 서류철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모두 지난 5년간 전략기획실에서 진행됐었던 회의 기록이었다.
그 양이 워낙 방대해서 과연 다 읽을 수나 있을까 싶은데, 한지석은 북 카트를 힐끗 쳐다보더니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적네요. 여기 뒤로 놔주세요.”
“저 이사님, 그리고 이건 따로 부탁하신 자료입니다.”
고 비서가 까만 USB를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안엔 경영지원본부 소속 직원들의 간단한 신상 정보와 인사 기록이 모두 담겨 있었다.
사실 인사과에 부탁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였지만, 분명 뒷조사를 한다느니 개인 사찰을 한다느니 말이 나올 게 뻔해 은밀하게 부탁해 둔 것이었다.
한지석은 USB를 집어 들며 반색했다.
“고마워요, 꼭 필요했던 건데.”
“그리고 재무회계팀 백형수 이사님이 만나 뵙길 청하셨습니다. 편하신 시간을 알려 달라 하셨고요.”
“지금은 좀 그렇고, 두 시 정도가 좋겠군요.”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비서들이 나가자, 한지석은 손에 쥔 USB를 컴퓨터에 연결해 내용을 훑었다. 직원들의 얼굴과 이름, 인사 고과 내역이 담긴 이력서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정보를 눈에 새기느라 그의 눈동자는 한참 동안 모니터에 고정됐다.
그러기를 한 시간쯤, 예고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두 시에 만나기로 한 백 이사가 다짜고짜 집무실로 들이닥친 것이다. 그는 애초부터 한지석과의 시간 약속 따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죠. 실례를 무릅쓰고 먼저 찾아왔습니다. 반갑습니다. 백형수라고 합니다.”
“한지석입니다.”
허울 좋은 인사와 함께 악수를 나눴다. 겉보기에는 제법 화기애애한 듯 보이지만 오가는 눈빛은 치열하다. 맞잡은 손에서조차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이야, 집무실 수준부터 다르군요. 이 정도면 부사장님 집무실보다 좋은 거 같은데?”
“새것은 뭐든지 좋아 보이는 법이죠.”
“밖을 보니까 비서도 세 명인가 되는 거 같던데. 벌써부터 그렇게 보좌할 일이 많습니까?”
“비서는 제가 요청한 것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군요. 아마도 필요할 만하니 그렇게 붙여 준 것 아니겠습니까.”
“위세가 참 대~단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백형수는 픽, 웃음을 흘리며 소파에 먼저 주저앉았다. 어린놈의 새끼가 건방지기까지 하구만, 한지석이 생각보다 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느꼈는지 그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우 회장님께서 한 상무에게 기대를 많이 걸고 계신다면서요. 부담이 상당하겠어요.”
“…….”
“나도 한때 다 겪어 봤던 것들입니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데 적응은 어렵고, 의지는 열렬한데 내 뜻대로 주변이 쉽게 따라와 주질 않죠. 그래서 내 편, 내 사람이 중요한 거예요, 회사라는 건 말이죠. 약육강식의 세계예요. 받쳐 주는 세력이 없으면 금방 도태되고 마는 게 이쪽의 섭리죠.”
말을 빙빙 돌려 말하고 있지만, 백형수 이사의 요지는 단순했다. 자신의 파벌로 들어오라는 거다.
그는 현재 실세인 조상진 부사장과 함께 본사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아마도 우재경이 한국으로 돌아와 경영권을 물려받기 전, 입지를 더욱 단단하게 굳히고 싶을 것이다.
아직 우재경과 한지석의 신뢰 관계가 돈독하지 않을 때를 이용해 먼저 그를 포섭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백형수는 소파에 느긋하게 허리를 기댔다. 기름진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며 말했다.
“조만간 자리 만들겠습니다. 부사장님과 함께 술 한번 마시죠. 앞으로 같이 회사를 이끌어갈 사이인데, 데면데면하게 굴 필요 뭐 있겠습니까. 우리도 한 상무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그것참 영광이군요.”
지석은 심드렁한 마음을 감추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찬가지로 웃고 있는 백형수와 시선이 맞부딪혔다.
사내 정치판에서 구를 대로 구른 백 이사의 내공은 보통이 아니었다. 앞으로 치열한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겠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