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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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움 갤러리 직원 전용 주차장에 진회색 세단이 들어섰다.
마침 통화를 하고 있던 강 비서가 “어어, 오셨어요. 끊어.” 하며 말했다. 주차 라인 안에 바퀴가 깔끔하게 들어가는 게 보인다. 서둘러 차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우선경이 내렸다.
그는 강 비서를 보자마자 차마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이맛살을 구겼다. 키 190이 넘는 장정은 어울리지도 않게 화려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뭐예요.”
“첫날이시니까요. 축하드립니다.”
강 비서는 제가 다 뿌듯하다는 듯이 웃으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우선경은 한숨과 함께 뒤돌아 차 문을 마저 닫았다.
“우리가 오랜만인 건 아는데, 강 비서님 하루빨리 내 취향 다시 파악하셔야겠네요. 나 이런 거 질색하는 거 잊었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주는 선물은 기꺼이 받았다. 하지만 이걸 들고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막막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꽃다발을 들고 서 있자 곁눈질하던 강 비서가 선물을 잽싸게 회수해 갔다.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씩하게 말했다.
“이따가 대표실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눈치가 완전히 죽진 않았네, 선경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기꺼운 웃음을 지었다. 예전처럼 강 비서를 뒤에 달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우연인지 마침 건물 입구에는 김주원 수석 큐레이터도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시그니처 같은 검은색 투피스 정장을 입고서 반갑게 눈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설마 전 직원이 다 이러고 있는 건 아니겠죠.”
“취임식도 따로 안 하셨잖아요, 직원들이랑 인사는 하셔야죠.”
아니란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김주원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갤러리를 향해 손짓했다.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갤러리 뒤편엔 업무용으로 사용 중인 단독 건물이 있다. 김주원은 독특한 외관 때문인지 간혹 이곳도 갤러리인 줄 알고 흘러 들어오는 관람객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클래식한 분위기로 꾸며 놓은 카페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1층 전체는 직원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였고, 2층부터 5층까지가 주 업무 공간으로 쓰이는 중이다.
사방으로 나 있는 유리창으론 조명보다 환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넓고 긴 바에선 바리스타들이 주문받은 음료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커피 원두 갈리는 소리가 감각적인 배경음악에 섞여 활기를 돋웠다.
“커피 한잔 드시겠어요?”
“이따가요.”
김주원 큐레이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서 걸었다.
엘리베이터는 놔두고 일부러 계단으로 이동했다. 2층부터 4층까지 천천히 돌아보며 직원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여기는 디자인팀입니다. 총 8명이고요. 정가영 팀장이 담당하고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안녕하세요.”
주로 회사에만 머물며 일하는 디자인팀은 다른 갤러리 직원들보다 옷차림이 한결 자유로웠다.
직업 특성 때문인지 미적인 감수성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는데, 직원들은 뻣뻣한 첫인사를 하면서도 버릇처럼 몰래 대표의 스타일을 훑었다.
소문만 들어오던 우선경은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미형이었다.
뭐랄까, 잘생겼다고 하기엔 외형이 너무나 미려했고, 그렇다고 여자처럼 예쁘장한 것만도 아니었다.
섬세한 이목구비는 다소 예민해 보이는 분위기와 조화롭게 어울렸고, 어린 나이임에도 엄격한 품위가 느껴졌다.
소매를 두어 번 접어 올린 헐렁한 하늘색 셔츠는 베이지색 팬츠에 밀어 넣어 날씬한 허리를 드러냈다. 여기에 착용한 시계와 구두 모두 구하기 힘든 빈티지 명품이었다.
편안해 보이면서 절제된 고급스러움이 엿보이는 착장은 조금만 훑어봐도 대표의 감각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디자인 팀 직원들은 남몰래 시선을 교환하며 광대를 씰룩거렸다.
우선경은 천천히 디자인팀 내부를 스캔했다. 더럽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잔뜩 어질러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한창 일하던 중이라 데스크 곳곳과 중앙에 놓인 원탁 위엔 온갖 잡다한 자료와 서류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의 시선이 책상을 하나하나 살피자, 직원들은 긴장된 숨을 삼켰다. 흡사 불심 검문을 받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선경의 입에선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정가영 팀장님. 작업용 컴퓨터, 쓸 만해요?”
“네? 어… 그럭저럭요.”
“저게 언제적 모델인데 아직까지 씁니까. 디자인 프로그램 가뜩이나 뻑나기 쉬운데. 필요한 수량이랑 원하는 모델 적어서 오늘까지 보고서 올리세요. 눈치 본다고 작년, 재작년 모델 고르지 말고 가장 최신 사양으로 전부 교체하세요.”
“우앗! 감사합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환호와 가까운 감사 인사는 대충 흘려듣고 또 한 번 계단으로 이동했다. 회계팀과 휴식 공간이 있는 3층을 방문하고, 그다음엔 기획팀과 홍보팀이 붙어 있는 4층에 도착했다.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은 대부분 큐레이터들이다.
다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두 손을 합장하고 있길래, 선경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환영의 박수는 면할 수 있었다.
둥그렇게 반원을 그리며 서 있는 인원만 해도 스물이 넘었다. 하나같이 기대에 찬 얼굴로 우선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지자, 보다 못한 김주원이 한 발짝 다가오며 넌지시 속삭였다.
“대표님, 뭐라도 한 말씀 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
후우, 앞머리가 날리도록 크게 숨을 내쉰 선경은 직원들을 둘러보다 결국 운을 떼었다.
“뭐…, 어린 대표 밑에서 일하는 게 탐탁지 않다 느끼실 순 있겠지만, 라움 갤러리에서 일하는 게 자랑스럽다고 느끼게끔 만들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필요한 지원은 아낌없이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좋은 기획을 하시고, 좋은 작품을 발굴하는 데에만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이번만큼은 박수갈채를 막지 못했다. 대표님, 멋있어요! 누군가 주접스러운 환호성을 지르자 일동 웃음이 와르르 터져 나왔다.
참지 못하고 같이 웃어버린 선경은 감당할 수 없는 분위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몸을 돌린 그는 웃음을 애써 삼키며 이만 올라가죠, 하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미소를 띠고 있던 김주원이 먼저 길을 트며 지나갔다.
빙 돌아 나가는 길에 선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뭔가 거슬리는 기분에 슬쩍 돌아보자 낯익은 얼굴이 정면에 보였다.
눈이 마주친 박진상은 히익, 소리를 내며 놀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나름 열심히 숨어 있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 됐다.
그의 헛된 노력을 못 본 척해 주며 선경은 다시 계단을 밟았다. 층계를 반쯤 올랐을 때쯤 옆에서 걸음을 맞추던 김주원에게 물었다.
“박진상 큐레이터는 지금 소속이 어디죠?”
“기획팀입니다.”
“올해 삼 년 차죠? 다음번 기획 회의는 박진상 씨가 진행해 보라 하세요. 회의 때 저도 참석할 거라고 미리 공지해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5층은 대표실 하나뿐이다.
문을 열고 들어온 선경은 드디어 혼자 남게 되자 짧은 한숨을 내쉬며 뒷목을 주물렀다. 그냥 순회만 돌았을 뿐인데 벌써부터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인 없이 텅 비어 있던 대표실은 며칠 전 인테리어를 마쳤다. 덕분에 모든 곳에서 새것의 냄새가 났다.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킨 우선경은 창가에 허리를 비스듬히 기대고 섰다. 팔짱을 낀 채 앞으로 제가 지낼 대표실을 그림 보듯이 감상했다.
송옥희 전 대표는 2년 전 라움 갤러리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말이 좋아서 자진 퇴임이었지, 거의 쫓겨난 것과 다름없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다른 갤러리에서 거액의 연봉을 받아 스카우트되어 갔다는데, 실상은 라움의 향후 몇 년간의 전시회 기획안과 컨택 작가 리스트, VIP 고객들을 빼 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주원은 엄연한 재산권을 빼앗겼다며 고소를 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우선경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라움을 맡게 되면 싹 다 갈아엎을 기획들이었으니 빼간 정보들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고, VIP 고객이야 다시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 우량 고객 몇 명 빠져나갔다고 해서 갤러리 운영이 힘들어질 만큼 라움의 기반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송옥희가 대표 자리에서 날아간 이후, 갤러리를 대신 맡아 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 자리에 김주원을 밀어 넣었다. 부담스러워하는 그녀에게 적자가 나도 상관없으니 네임밸류만 잃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김주원은 매달 리포트를 작성해 런던에 있는 우선경에게 보고를 해왔고, 익숙하지 않을 회사 운영 일을 썩 잘해 주었다. 우선경 역시 그만큼 김주원의 능력과 노고를 높이 사 섭섭지 않게 대우해 줬다.
높은 연봉은 물론이고 갤러리와 가까운 주상복합 아파트와 중형급 세단, 거기에 운전이 가능한 비서까지 붙여 주었다. 아, 물론 비서는 강준일 비서였다.
지난 2년간의 기억을 떠올리던 우선경은 추억을 떨치고 일어나 제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벽면에 가깝게 놓인 까만 철제 책상과 회전의자가 몸에 맞춘 듯 편안하다. 착석감이 만족스러운지 팔걸이에 손을 걸치고 좌우로 의자를 돌려보았다. 이후 손을 가볍게 풀어 준 뒤 키보드를 톡톡 두드려 잠들어 있는 컴퓨터를 깨웠다.
순식간에 일할 준비를 마친 우선경은 가장 먼저 메일함부터 열었다.